전쟁...../임진왜란

임진왜란 ...북관대첩

구름위 2013. 5. 3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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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관(北關. 함경도를 뜻하는 지역명) 대첩은 함경도 의병장인 정문부가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침략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패하였다.

그중 침략군 제2군 대장인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중 하나, 가토 기요마사는 서울점령이후 곧바로 북쪽으로 진격하여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이에 함경도에선 국경인, 국세필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화군, 순화군 두왕자를 잡아다 왜군에 가담하였고 여진족이 침략하여 함경북도를 유린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경성 어량리 무계사람 이붕수와 지달원,강문우,최배천등이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자 가담하여 임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우선 정문부는 안원 권관 강문우에게 기병 몇을 주어 국세필이 있는 경성-일본군이 지키는 길주성간의 소식통을 끝게 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정문부는 창의대장, 종성 부사 정현룡이 부장, 이붕수는 창의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었다.

 

 이렇게 거병한 정문부는 의병 300여명을 대리고 먼저 경성으로 갔다. 경성에는 국세필의 군세가 있었는데 정문부는 그의 권한을 인정하고 잘 회유하여 무사히 입성할수 있었다. 경성내에는 이기수와 그의 관노들이 의병들을 위해 식량과 무기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의병들이 입성한 후 성을 파수하던 사람이 왜군의 순찰병 40여명이 올거라고 정문부에게 말했다. 정문부는 강문우에게 기병 20여명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라 명했다. 성문으로 들어오던 순찰병들은 돌격해오는 기병대를 보자 모두 도망쳤지만, 순찰병 전원이 강문우의 기병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문부는 경성에 입성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를 받아들인 국세필은 자주 정문부를 의심하였고 죽음의 위협까지 주었지만 정문부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한편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것을 의심하던 길주성의 가토 우마노조는 휘하 장수를 보내 경성으로 가도록 했다. 92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일본장수는 성밖에 군사들을 배치시키고 아무렇지 않게 성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으로 하여금 일본장수를 죽이게 했다. 정문부가 일본장수의 목을 취하자 김범, 이희당이 성벽으로 올라가 군사들로 하여금 화살을 쏘게 하였다.

이에 일본군이 도망을 가자 강문우등이 추격하여 섬멸하니 왜군의 피가 길바닥을 적셨다고 전한다.

 

 1592년 10월에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이 신세준과 유생들에 의해 처단당하고 얼마후, 정문부는 또다른 반역자인 정말수를 치기위해 명천성으로 군을 몰았다. 명천성에선 정말수를 몰아내자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었으나 정말수가 화포를 동원하여 막으니 봉기가 실패하였다. 이에 정문부는 오촌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각각 30명의 기병과 몇몇 제장들을 주어 총 60여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급습하라 명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골로 숨었는데 경성 토병 전덕인의 도움으로 정말수와 그의 부장들을 잡아들여 목을 베었다. 정말수의 난을 평정한 정문부는 명천성을 되찾게 되었다.

 

창의토왜도-북관유적도첩 中

 

 본격적인 일본군과의 전면전에 앞서 정문부는 그동안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과 그 일당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이로써 함경도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백성들은 너도나도 정문부의 의병에 가담하고자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반란주동자들의 숙청으로 길주 이북, 함경북도는 일본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정문부는 1592년 10월 20일까지 3000여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제 정문부는 일본군이 지키는 길주성으로 가기위해 군사 1000여명을 몰고 명천성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들이 정문부를 말렸지만 정문부는 개의치 않고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주장하였다. 이무렵, 길주성엔 1000여명의 군사가 지키고 있었고 성 남쪽에 있는 영동에 300여명이 주둔하고 있어 서로 왕래하며 의지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우선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경성이북 출신 군사 1000여명은 자신과 정현룡이 맡고, 고령첨사 유경천에게 길주 출신 군사 1000여명을 주어 갯마을에 진을 쳐 일본군을 감시하게 하고, 경원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 서북보의 토병을 관리하고 정병을 징병하여 복병을 두었다. 정문부는 인의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여명을 주어 길주 북쪽에 있는 야간창에 진을 치게한다. 또한 명천에서 400여명의 군사를 고참 지방에 보내 중요 길목에 매복시켰다.

 

 10월 30일, 일본군 1000여명이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군대와 맞닥드렸다. 이에 일본군이 후퇴하자 원충서는 추격을 시작했다. 워낙 일본군의 수가 많아 잠시 병사를 물리고 방어하는 중, 고참에서 매복하던 방원만호 한인제가 기병 300여명을 이끌고 원충서와 합류한다. 처음엔 조선군의 공격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나, 한인제 외에도 여러 복병들이 원충서와 합류하자 일본군 장수 5명이 400여명의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조선군에게 돌격한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난사하며 조선군을 맞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기병을 중심으로 평지에서 돌격전을 펼치니 일본군이 힘을 다하여 퇴각을 시작했다. 곧곧에 등장하는 조선군 복병들을 감당하지 못한 일본군은 결국 장덕산 위에서 괴멸되었고, 정문부는 살아남은 자들을 죽이기 위해 산에 불을 놓아 불태워 죽여버렸다. 이 싸움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하였다.

 

 11월 1일, 정문부는 드디어 길주성을 치기위해 군사를 3개로 나누어 성을 포위했다. 전날, 장평 전투의 승리를 바탕으로 성을 함락시키고자 했으나 2차례의 공격에도 성을 넘지 못하고 쌍방의 피해만 늘어갔다. 이에 정문부는 군대를 길주성 주변에 매복시키고 정예 병력들만 데리고 영동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치기위해 이동했다. 그무렵 영동의 일본군은 근처 마을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복병중에 본 길주토병 김국신이 자신의 군사로 맞서는 것은 물론 이를 정문부에게 알렸다. 정문부는 자신의 3개부대를 이끌고 영동의 일본군을 공격하니 정예병들이 칼로써 치자 일본군이 패하여 달아났다. 쌍포를 거쳐 영동에 있는 자신들의 목책으로 달아나던 일본군은 뒤따라온 조선군의 궁시에 모두 전멸되었다. 정문부는 죽은 일본군의 성기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었으며 그 주검들을 10여리에 늘여놓았다. 또한 목책에 있던 일본군 장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죽은 일본군을 희롱하였다. 

 

 한편, 정문부가 함경도일대를 수복하자 서울에서 피난 온 장사치와 사대부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경인, 국세필등이 반란을 일으킬때 함경도 사람들에게 생필품등을 빼앗긴 사람들로 그 죄를 물어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자 했으나 정문부는 그들의 청탁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의 공으로 회령부사가 된 부장 정현룡에게 가서 사정을 했다. 이에 정문부가 정현룡을 꾸짖자 정현룡은 앙심을 품고 장사치와 사대부, 함경감사 윤탁연과 합세해 조정에 그를 헐뜯는 글을 보냈다. 윤탁연은 선조가 총애하던 신하로써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성품이 괴팍하여 사간헌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는 왕자 임해군이 회령으로 피난갈때 함게 대동했는데 왕자가 일본군에게 잡히자 선조가 함경감사의 벼슬을 내리고 의병을 모으게 했으나 뚜렷한 전과 없이 허송세월을 보낸 인물이다.평소 정문부의 전공을 시기하던 윤탁연은 조정에 수차례 장계를 보내 정문부를 깎아내렸고, 결국 조정의 명으로 11월 21일에 조선군 대장을 정현룡으로 갈아치워 버렸다. 그러나 군사들은 정현룡보다는 정문부를 따르고 있었다.

 

 이때, 함경도 북병사가 와서 정문부에게 말하길 6진(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순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들을 몰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군관과 군사 50여명을 대리고 즉시 회령으로 가 민생을 안정시켰다. 특히 6진은 여진족의 침입이 심하여 그들을 정리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12월 23일, 정문부는 종성,온성,경성에서 각각 50여명의 병사를 차출하여 종성 부계리 방면에 매복시켰다. 1593년 1월 7일, 매복지역으로 들어온 여진족 군사들은 조선군에 의해 패하였고 여진족 말 2필과 활 1장, 화살 9대, 비단 칼집 1벌등을 얻었고 여진족에게 붙잡혀 합세한 조선인 반역자들을 처단하였다. 이때 조선군의 피해는 통역사 한명이 죽은것으로 끝났다.

 

 이무렵, 함경도 조선군이 정문부가 대장자리에서 물러나자 사기를 잃었고 이틈을 타 일본군과 반란군 잔당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대장자리를 정현룡에서 경원부사 오응태로 바꿔도 소용이 없었다. 정문부를 시기하던 윤탁연도 사대부의 비난이 거세지자 어쩔수 없이 1월13일에 정문부를 다시 대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제일 먼저 7일에 있었던 부계리 전투에 대한 공문을 받고 과거시험을 치자고 제안하였으며 여러 군대를 방문해 위로하니, 흩어졌던 군세는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1월 19일, 정문부는 길주와 영동 남쪽에 있는 단천 공격을 감행한다. 일본군 장수가 100명을 거느리며 2명의 기병을 대동하고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매복중이던 원충서가 10여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단숨에 일본군 장수를 죽였다. 장수가 죽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허겁지겁 성으로 도망을 쳤다. 정문부는 기병 200기를 다시 4개 대로 나누어 1월 22일에 단천에 도착했다. 제1대가 성으로 가 일본군을 희롱하자 일본군 200여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조선군을 공격했는데 조선군은 거짓퇴각을 하여 매복지역까지 일본군을 끌어들였다. 일본군이 매복에 걸려들자 단숨에 나머지 3개 대의 기병들이 나와 일본군을 도륙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쳐서 살아서 성에 들어간 자들은 30여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정문부는 가부와 임명에서도 적을 물리쳤으나 끝없이 조정의 은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하여 두 전투는 기록하지 않는다.

 

 1월 28일, 전날 일본군이 단천 북쪽의 마천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마천령을 넘은 1000여명의 군세는 삿사 마사모토가 이끄는 군대로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기위해 출격한 군대이다. 그들이 길주 임명에 도착하자 정문부는 기병 600여명을 매복시켜 일본군이 뒤를 보일때까지 대기했다. 일본군이 뒤를 보이자 매복하고 있던 기병대가 뛰쳐나와 일본군의 앞과 허리, 뒤를 치며 일본군을 유린했다. 이에 일본군은 길주성 남쪽의 백탑교까지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대기하던 원충서의 군대가 화살을 퍼부었다. 양군은 조총과 화살로써 공격하였고 간간히 조선기병대가 근거리에서 활을 쏘아댔다. 이에 일본군은 성으로 후퇴했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의 숫자가 두려워 더이상의 추격은 하지 않았다. 이날 일본군은 죽은 병사들을 소각하고 길주성마저 불태웠다. 이날 조선군도 주을온만호 이희당과 거병때 함께한 이붕수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25명이 죽었다.

 

이날 저녁,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풀고 길주 북부로 퇴각했다. 가토의 군대 대부분이 길주에 진주해 있었으며 이 군대 모두가 정문부와 조선군을 치기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을 안것이다. 그러나 한인제는 이대로 물러설순 없다며 정예병만을 거느리고 길주 인근에 진을 치고있었다. 그는 길주성이 불타자 다음날 새벽에 길주성 입성을 단행한다. 이미 밤을 틈타 일본군은 달아났고 없었다. 한인제는 길주성 화재를 진압하고 정문부에게 알리어 칭찬을 받았다. 정문부는 한인제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북쪽으로 보내고 이때를 노려 일본군을 추격하였다. 그때 일본군은 길주성 군대와 구원군대가 함께 정신없이 함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3000여명이던 길주성 군세가 1500여명도 않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2월 중순, 군량과 마초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하고 함흥에 도착한 정문부는 일본군을 볼수 없었다. 이미 4일에 가토의 제2군 전부가 함흥에 도착했었고 11일에 동해안을 따라 퇴각했기 때문이다. 가토는 여진족의 하나인 노토부락을 공격하다 크게 패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었고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에 의해 피폐해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의 극한추위에 휩쓸려 말과 군사 태반이 동사하였고 식량난에 시달린 나머지 아사자가 속출했다. 29일에 서울에 입성한 제2군은 전사자를 계산하니 22000명중 8864명이 전사한것으로 통계되었다. 함흥이 수복되고 함경북도와 남도의 의병군이 만나면서 정문부의 군대 5000여명은 다시 윤탁연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군이 퇴각을 하자 의병은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당시 영흥부사로 있던 정문부는 윤탁원의 허위보고와 사대부에 대한 뇌물공세로 공을 인정받지 못해 1593년 4월, 자신의 군사들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게 주고 경상도 청송으로 내려갔다. 그를 따르던 휘하 장졸들도 조금 승진을 했을뿐이고 벼슬이 없는 자들은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했다. 후에 1594년 4월에 다시 온성 부사로 전직하였다.

  정문부 의병장 초상화.



함경감사 윤탁연은 선조의 비호아래 갖은 비리와 사치를 즐기며 살다가 1594년 3월에 함경도에서 죽었다. 그는 은으로 가마를 만들고 뇌물을 착복했으며 죄를 벌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악덕관리였다.

 함경도 북병사로 있던 정현룡은 조선군 1325명과 항왜 25명으로 여진족 수장 역수의 석성을 무너트리고 여진족을 섬멸했다. 이후 1595년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이 되어 1610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