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구름위 2013. 5. 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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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동안에 가장 유명세를 얻은 의병장은 곽재우나 김덕령이지만, 이룩한 전과로 따진다면 나는 단연 함경도를 일본군의 손에서 되찾아낸 정문부를 꼽고 싶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 2번대와 매국노 국경인의 수작으로 함경도는 한 때 도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북평사 정문부의 탁월한 의병 전쟁으로 인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국토와 백성을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 중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진 20,800명은 한양에 입성한 후, 진로를 동북 방향으로 돌려 강원도를 순식간에 석권하고 함경도로 북상해 오기 시작했다.

 

  가토는 6월 1일, 함경도와 강원도의 길목인 철령을 거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너희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 항복하는 주민들은 결코 해치지 않으니, 안심하고 나와 우리를 맞으라.”하고 외치며 통행증을 뿌렸다. 무섭게만 여겨지던 일본군이 뜻밖에도 난폭 행위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함경도 백성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나라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적군의 앞잡이로 돌변했다.

 
  가뜩이나 함경도 주민들은 추운 날씨와 여진족의 잦은 침입에 중앙 정부로부터 고위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차별 대우를 받아 조선 왕조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던 터였다. 여기에 함경도로 피신을 온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이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를 빼앗는 등의 행패를 부리자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들어와 위민 정책을 펴자 함경도 주민들은 억눌려 왔던 불만을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함경도를 지키고 있던 남병사 이혼과 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은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일패도지했다. 이혼은 달아났다가 일본군과 내통한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고, 한극함은 여진족의 영토로 넘어 갔으나 도로 그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도망쳤으나 역시 친일 반역자들에게 생포당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한 함경도는 이처럼 자중지란을 맞아 붕괴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도 없어지고 주민들이 적개심을 품고 반민 행위를 일삼자 겁에 질린 임해군과 순화군은 국경의 끝인 회령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함경도 백성들의 민심이 조선 왕조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숙부 국세필과 짜고서 회령의 군사들과 무뢰배들을 선동하여 두 왕자를 붙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경천동지할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순변사 이영(李瑛)과 부사 문몽원(文夢轅)이 이 일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국경인이 그 사실을 미리 입수하고 부하들을 보내 군관들을 죽이자 겁이 난 그들은 달아나 버렸다.

 
  왕자 일행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대가로 국경인은 가토로부터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라는 관직을 받았고 그의 숙부인 국세필과 다른 일당들도 허울뿐인 벼슬을 얻어 의기양양했다.

 
  이렇게 해서 여진족과 마주한 함경도 북방 최전선인 회령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러 진(鎭)과 보(堡)의 토병(土兵)과 호수(豪首)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일본군은 함경도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부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하게 된 셈이었다.


  이대로 일본군과 반민들의 손에 계속 지배될 것 만 같았던 함경도의 상황은 그러나 얼마 못가 급변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올 터인데, 그럼 왜군을 도운 함경도는 역적의 소굴로 간주되어 토벌을 당한다!”라는 소문이 퍼졌으며,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쪽에서도 식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함경도 백성들을 상대로 양식과 옷을 빼앗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가차 없이 죽이자 일본군에 보여주었던 백성들의 인심이 점차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이 무렵 정문부는 일본군과 반역자들을 피해 자신의 제자인 교생 지달원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지달원의 집은 경성의 가장 외진 해변 가에 있어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한동안 몸을 피한 채,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던 정문부는 일본군에 대한 주민들의 심기가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조정에서 명군을 끌어들여 일대 반격을 하려 한다는 조짐을 파악하자 지금이 바로 일어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제자 지달원과 최배천 등과 함께 은밀히 뜻있는 선비들과 무사들을 규합했다. 수백 명의 함경도 지방 군사들과 선비, 무사들이 모였고 그들은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는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를 선봉에 내세우고 즉시 부성(府城)에 이르렀다. 부성은 국경인의 숙부인 국세필이 다스리고 있었다. 정문부가 강문우를 보내 “관북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항복하면 살려두겠지만, 저항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위협하자 국세필은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정문부는 “크고 작은 병사와 백성들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국세필에게 그대로 예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아마 일단 국세필 일당들을 안심시켜 놓은 뒤에, 부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들을 더 모으고 그렇게 해서 세력을 탄탄히 다진 다음 국세필 일당들을 제거하려 했던 계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부성을 제압한 정문부는 각 성읍에 격문을 퍼뜨렸다. 그것을 본 종성(鍾城)의 무사 김사주와 경성인 오박 등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종성 부사 정현룡과 경원 부사 오응태, 경흥 부사 나정언과 고령 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은 산 속에 숨어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와서 모였다.


  이렇게 해서 함경도 의병들의 수는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의병 중에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뽑아 선봉대를 조직했고 이를 유경천이 거느렸다.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1백 명의 군사를 보내 성의 서쪽에 와서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강문우가 선봉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자 남은 왜병들은 달아났다.

 
  일본군 일단의 병력을 격퇴시키자 의병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부성의 백성들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각 지휘관들은 군사를 출동시킬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내통했던 국세필 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 일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를 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안심하라.”하고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일본과 내통한 수천 명의 백성들을 전부 처벌하려 했다가는 심한 반발을 사고 폭동이 일어날 우려도 있었다. 최소한의 처벌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문부의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

 
  국세필 일당을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국경인 차례였다. 정문부는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수천의 의병들이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함경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라고 외쳤다.

 
  이 격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글을 읽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은 동료 유생들과 군사들을 모아 국경인이 사는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국경인을 신세준과 다른 유생들이 참살하였고, 이로써 함경도 제일의 반역자는 숙부와 함께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국경인의 사망으로 많은 성과 요새들을 의병들이 접수했으며 다른 반역자들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달아났다. 하지만 아직 함경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정문부는 의병을 둘러 나누어 한 쪽은 고참역(古站驛)으로, 다른 한 쪽은 명천(明川)으로 보내 일본군과 내통했던 정말수를 죽이고 성을 되찾게 하였다. 그러자 부성에 군사를 보냈다 패한 길주의 일본군이 다시 성 밖으로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명천의 해창(海倉)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길주성의 동쪽에 있는 장덕산(長德山) 밑에 이르렀으나 이미 길주의 남쪽 마을에 함경도 의병들이 매복해 있었다. 의병들이 먼저 산 위를 차지하자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서둘러 산을 오르려 했다. 이 때 유경천이 기병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와 동시에 고경민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대포를 쏘며 병사들을 돌진시키자 일본군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황급히 퇴각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의병들이 추격하였다. 그들은 계곡을 겹겹이 에워싸고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그날 밤,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심해 일본군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고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의병들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함경도에서 살아오면서 추위에 익숙해진 형편이었는데 반해, 일본군 대부분은 따뜻한 남쪽 지방 출신이어서 추위에 더욱 약했다.

 
  아침이 되자 의병들은 포위망을 열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급습을 감행했다. 이미 일본군 중 적지 않은 병사들이 손발이 부르트고 쓰러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6백 명의 일본군이 죽임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길주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감히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문부가 의병 본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쏘아댔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도 커질 것 같아 정문부는 일단 물러나고, 그들을 더욱 추위에 떨게 만들어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으로 성의 땔감 공급로를 차단했다.


  이 때, 일본군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면서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 하자 정문부는 의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양측 군대는 쌍포(雙捕)에서 전투하였는데 수와 기세에서 밀린 일본군이 패주하자 의병들이 추격하면서 적병 60명을 참살했다. 패배한 일본군은 책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해가 바뀐 1593년 1월 1일, 마침내 길주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이 성을 비워놓고 후퇴했다. 의병들이 포위가 계속되자 성 안의 일본군은 불을 피울 장작과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어 민가를 뜯어서 땔나무로 쓰는 등 그 형세가 점점 궁색해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수한 것이다.

 
  길주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이 두려워 밤중에 도주하였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아 조선 의병들이 쫓아오자 정신없이 패주하여 황급히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가면서 일본군은 단천과 이성(利城) 등 주변 고을들을 모두 불태웠고, 약탈하였다. 이로써 1592년 12월, 길주성을 접수한 정문부는 북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면서 반역자들을 찾아내 처형하고 여진족과 교섭하여 그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요새를 수복하여 장교들을 파견해 굳게 지키게 한 후, 해가 바뀐 1593년 1월 13일 길주로 돌아왔다.

   
  한편 안변에 머무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내가 다시 함경도를 평정하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 부대가 전진해 오자,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정문부에게 군사를 보내어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정문부는 그의 전언을 듣고 정예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누어, 1대장은 훈련 정(訓鍊正) 구황, 2대장은 훈련 첨정(訓鍊僉正) 박은주, 3대장은 훈련 판관(川鍊判官) 정원침, 4대장은 훈련 판관 고경민이 각기 50명씩을 거느리고 1593년 1월 20일에 산길로 단천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4대의 군사를 단천성 밖 20리쯤 되는 지점에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성 밖 4리 가량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여 도전케 하니 성안에 머물던 적들은 2백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바로 진격해왔다.


  단천 군사들이 패하는 체하면서 되돌아 달아날 즈음 피로한 말을 탄 두 병졸이 적에게 살해되자 적은 더욱 기세등등해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조선 의병들이 잠복한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4대의 복병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정면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화살을 비 오듯이 퍼붓자, 왜적은 갑자기 튀어 나온 기병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총을 마구 쏘아 댔으나 당황한 중에 쏘는 것이라 모두 빗나갔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조선 의병에게 덤비지 못했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자 일본군은 거의 사살되고 겨우 30여 명이 남았는데 그것도 태반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 때 죽인 적의 수효는 적어도 백여 명은 되며, 싸우면서 간 거리는 2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본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가토의 본대에 앞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척후대를 유경천이 만나 수십 명을 참살하자 가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으므로 유경천은 급히 후퇴했다. 소수의 기병으로 족히 수천이 넘는 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는 3천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동책(嶺東柵) 외곽에서 그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세 번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적에서 불리한 의병들이 일단 경성으로 후퇴하여 농성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군 쪽에서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혹독한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밤에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철수했다. 정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빠른 경기병 부대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安邊)으로 들어가 버려 잡을 수 없었다.

 
  안변성에 도착한 가토는 의병들의 공격보다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군량과 보급 물자들이 다 바닥이 났던 것이다. 남쪽의 후방에서는 의병들의 연이은 봉기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당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겨울을 보내야 했다. 결국 1593년 2월 1일, 가토는 안변에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이로써 함경도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것이 약 8개월에 걸친 “북관대첩”의 진상이었다.

 
  백성의 손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항일 의병은 그 후 병자호란과 구한말 일제의 국권 강탈에 맞선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이어진다. 국란을 맞아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외적과 싸워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 한 의병 전쟁은 민중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힘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