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외교사 곱씹어야 하는 까닭은

구름위 2013. 6. 2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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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전환기마다 한반도 ‘핏빛’…임진·정묘·병자, 그다음은?

 

“이날 홍건적이 개성을 함락시킨 뒤 여러 달 동안 주둔하면서 소와 말을 잡아 그 가죽을 펼쳐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사람들이 기어오를 수 없었다. 적은 또한 남녀를 태워 죽이며 혹은 임부의 젖가슴을 구워 먹으며 잔학행위를 자행했다.” (<고려사> 1361년 11월24일)

 

“부모형제와 처자를 배에 싣고 적병을 피해 서해를 따라 올라가려 했으나 사공이 길을 잃고 바람 또한 불순하여 영광 칠산 바다에 표류했습니다. 27일 홀연 적선을 만나 노모와 누이, 아내는 모두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노부와 자식은 늙고 어리다며 해변에 내려놓았습니다. (…) 적진 앞바다 해안에는 우리나라 남자와 여자가 왜놈과 거의 반반인데 배마다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와 산에 진동했습니다.” (정희득, <월봉해상록> 1597년)


 

16세기 중엽 일본의 세력이 급격히 커져 패권국인 명나라에 도전하게 되면서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만났고, 17세기 초 만주의 세력이 명나라에 도전하면서 여기에 휘말린 조선은 또다시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을 겪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성을 포위한 일본군의 모습(<부산진순절도>, 육군박물관 소장). 
 
비극으로 점철된 국제정세 변동기의 기억들

 

참혹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중국 대륙의 패권이 몽골족의 원에서 한족의 명으로 넘어가고 있던 14세기 후반, 고려왕조는 홍건적의 침입을 받는다. 개경은 함락되어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신했고 위에서 보듯 백성들은 처참한 지경으로 내몰린다. 홍건적의 침략에 왜구의 발호까지 이어지면서 고려는 결국 망하고 만다.

 

새로 건국된 조선의 지배층은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슈퍼 파워’였던 명에 사대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5세기의 치세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질서는 다시 요동친다. 패권국 명의 쇠퇴 조짐이 뚜렷해지는 와중에 신흥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이 명에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으로 들어간다”는 명분 아래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명은 자국의 안보를 지키려면 ‘울타리 국가’ 조선이 극히 절실하다는 인식 아래 참전한다. 1597년 일본군이 재침했을 때, 정희득 일가가 마주해야 했던 뼈아픈 체험은 임진왜란이 남긴 무수한 비극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7년의 전쟁은 끝났지만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더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이번에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후금-청)이 명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6세기 이래 누적된 쇠망의 조짐이 임진왜란 참전을 계기로 더 확연해진 상황에서 노대국 명은 수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명은 위기를 맞아 조선을 활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책을 구상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했다”는 ‘은혜’를 내세워 조선을 후금과의 싸움으로 내몰려고 획책했다.

명을 위해 후금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후금의 굴기를 현실로 받아들여 ‘중립’을 지킬 것인가? 양단의 선택을 앞에 두고 조선은 분열되었다.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은 전자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망해가던 명’을 선택했던 결과는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이어졌다. 군사적으로 후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은 임시로 ‘형제관계’를 맺어 위기를 봉합했다.


정묘호란 이후 10년은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끼여 있는’ 조선은 명과 후금 모두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명과 후금이 서로 계속 싸우는 한, 조선은 필연적으로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게 된다. 정묘호란 이후 명에 연전연승하고 힘이 더욱 커진 후금은 조선으로부터 명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1636년 그들은 마침내 ‘제국’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조선이 기존의 제국 명을 의식하여 자신을 ‘제국’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자 청은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병자호란).

 

병자호란의 결과는 정묘호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수십만의 생령이 포로로 끌려가고, 도망쳐 온 포로들은 다시 잡혀가 발뒤꿈치를 잘렸으며, 청군의 첩으로 전락한 조선 여인들 가운데는 만주족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를 받았던 사람도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250여년. 서세동점의 대세에 편승하여 힘을 축적한 일본이 다시 청에 도전한다(1894년 청일전쟁). 이번에도 전쟁의 비극은 어김없이 한반도를 할퀴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에 저항하다 학살당하는 조선 여인의 모습(<동국신속삼강행실도>).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

 

지금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다시 격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격변의 핵심은 단연 중국의 부상이다. 중국의 부상을 웅변하는 용어가 바로 ‘G2’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정치·군사적으로도 이미 미국에 버금가는 존재로 올라선 중국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태풍의 눈이다. 일본의 미래학자이자 전략가인 오마에 겐이치는 이미 한참 전에 “중국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일본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정치·경제적으로 중국과 사활적인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우리는 중국의 행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은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유지해 온 나라는 단연 미국이었다. 우리는 지난 60여년 동안 ‘한-미 동맹’을 통해 사실상 미국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자 세계의 일극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는 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G2 시대’는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모습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이 미국에 맞짱을 뜰 만큼 초강대국이 된다면? 또 그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친다면? ‘끼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우리는 작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빚어졌던 험악한 관계와 그 사이에서 처해야 했던 곤혹스러운 처지를 기억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덕분에 먹고살면서 왜 미국만 바라보며 우리에게 모욕감을 주는가?” 작년 천안함 사태 이후 중국의 <환구시보>에 실린 칼럼의 내용이다. 다가오는 거대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피곤해진다. ‘기존의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제국’이 떠오르는 전환기에 한반도가 늘 위기를 맞았던 전철을 고려하면 ‘G2 시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난 수년간 무수한 필자들이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누구도 시원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필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하여 우회로를 모색해 보려 한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밟았던 전철을 다시 살피려는 것이다. 14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국제질서의 틀이 바뀌던 시기, 그들이 보였던 대응의 득실과 공과를 찬찬히 읽어보려 한다.

 

 

 

 

 

조선사, 그 가운데서도 외교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끼여 있는’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상대적 약소국’으로서 강대국들을 요리할 만한 적절한 지렛대가 마땅치 않은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의 외교사는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