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1)

구름위 2013. 6. 2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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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략질’ 왜구가 해외진출 개척자라고?

 

명의 수군과 왜구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 왜구의 침략과 약탈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봤던 한국과 중국에서는 왜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반면, 일본에서는 왜구를 ‘일찍부터 바다로 눈을 돌린 해외 진출의 선구자’로 긍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도설 중국문명사 9>(도쿄,소겐사)에서 전재 

 


건국 직후 명으로부터 밀려오는 외압을 극복하느라 부심했던 조선의 또 다른 고민은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조일관계 안정의 핵심 고리는 왜구 문제였다. 1397년 표전 문제 때문에 명에 갔던 권근(1352~1409)은 주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은 바 있다.


“동쪽으로 큰 파도 바깥에/ 왜노(倭奴)가 있는데 성품이 완악하다오/ 일찍이 성인의 교화를 받은 적 없어/ 언제나 흉악하고 간사하다오/ 도둑질과 노략질로 이웃나라 침범하여/ 바닷가 산기슭에서 삶을 훔치니/ 원컨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어/ 죄를 묻고 개선하여 돌아오소서.”

 

 

일본을 ‘왜노’라 부르고 ‘완악’, ‘흉악’, ‘간사’, ‘도둑질’, ‘노략질’ 등 부정적인 단어로 그들의 특성을 묘사한 뒤 주원장에게 일본을 토벌하라고 권하고 있다.


조선과 중국의 부정적인 왜구 인식

 

권근의 시에 보이는 부정적인 대일인식은 왜구(倭寇)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둑질, 노략질이 상징하듯이 우리가 아는 왜구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한반도 주변을 침략했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말한다. 근해에 쳐들어와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육지에 상륙하여 관아나 마을을 습격하여 물자를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했던 집단이 바로 왜구였다.

 

왜구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보면 ‘왜(일본인)가 구(쳐들어와 노략질)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223년(고려 고종 10) 5월22일의 고려사에 “갑자, 왜가 금주를 구하다(甲子 倭寇金州)”라고 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일본 해적들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왜구’라는 명사로 굳어져 간 것으로 여겨진다.

 

왜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지녔던 것은 중국인들도 비슷했다. 당대와 송대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의 일본 인식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원대 이후 왜구의 침략과 피해를 경험하면서 일본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원나라 문인 황진성(黃鎭成)은 ‘도이행’(島夷行)이란 시에서 왜구에 대한 공포심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도이의 출몰은 날아다니는 송골매와 같으니/ 오른손엔 칼을 잡고 왼손엔 방패를 들었다네/ 큰 배와 빠른 배가 바다 위를 내달리면/ 화인(華人)은 아직 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네.”


일본 해적에 대한 공포심은 격한 증오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원대의 문인 왕을(王乙)은 절동(浙東) 지방을 노략질했던 왜구를 ‘광노’(狂奴)라 지칭하고 ‘왜구의 해골이 담긴 술잔을 한입에 들이켜고 싶다’며 증오심을 드러낸 바 있다.

  

 

왜구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던 쓰시마의 모습.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던 쓰시마인들은 일찍부터 조선 연안에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 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건국 직후부터 조선은 왜구를 막기 위해 부심해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인들의 긍정적인 왜구 인식

 

조선인이나 중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이 왜구를 보는 시각은 독특하다. 우선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왜구를 ‘중세 시기 일본인의 해외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일 관계사의 권위자인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는 “일본인의 해외 진출은 국제관계의 틀을 넘어 왕성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해상(海商)으로, 때로는 해구(海寇)로서 활약하여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고 강조했다. 왜구 대신 ‘해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침략’ 대신 ‘해외 진출’, ‘제해권’ 등의 표현을 써서 왜구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려고 했다.

 

왜구를 이렇게 긍정하려는 시각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두드러진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해적이라 비웃지 말라. 파도의 건아, 만리의 대해를 개척한 자, 통상식민의 선구인 자. 보라. 오늘날 해상의 대왕인 영국인도 해적의 자손이 아닌가”라며 왜구의 행적을 영국의 해상 활동에 빗대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구에 대한 긍정과 미화는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케코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직후인 1938년 <왜구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상하이는 왜구 이전에는 저습한 지역의 가난한 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왜구가 자주 황푸강 부근에 상륙하자 성곽이 필요해져 1554년 성을 쌓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일본군이 다시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마주친 것은 여하튼 얄궂은 것이다. (…) 금일 전쟁터가 된 곳은 과거 모두 왜구들의 전쟁터였다. 일본인이 강남에서 활약하는 것은 거의 숙명적인 것이 아닐까.”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 등 강남 지방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왜구는 이제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운명적인 전범(典範)’으로까지 승화(?)되는 것이다.

왜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별반 좁혀지지 않았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왜구 집단을 ‘일본인뿐 아니라 고려·조선인과 중국인들도 포함된 다국적 해적 집단 혹은 해적 활동’으로 정의한다. 특히 금년에 문제가 된 지유사판 중학교 역사 교과서는 “왜구란 일찍이 원의 습격을 받았던 쓰시마(對馬島)·이키(一岐)·마쓰우라(松浦) 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해적집단으로 일본인 이외에 조선인 피차별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구의 구성원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또 주목되는 것은 ‘원의 습격’을 거론하고 있는 점이다. 1274년과 1281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했던 것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왜구 활동을 벌였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왜구의 침략과 고려의 고뇌

 

침략해 왔던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 왜구는 크게 13세기의 왜구, 1350년 이후의 왜구, 조선시대의 왜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223년 처음으로 나타나 1265년까지 이어졌던 ‘13세기 왜구’의 침략은 다른 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100여명 정도의 인원이 2~3척의 배를 타고 경상도 연안을 노략질하다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1350년(충정왕 2) 이후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시기의 왜구는 많을 때에는 수천 명의 병력이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한반도의 거의 전 지역을 침략했다. 연안과 내륙에 상륙한 뒤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왜구가 지나간 지역에는 닭과 개도 남지 않고 연해 수천 리에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는 것이 당시의 참상이었다. 왜구의 침략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고, 남해와 서해 연안의 고을 가운데는 치소(治所)를 내륙 지역으로 옮기거나 치소 자체가 아예 없어지는 곳이 나타났다.

 

왜구 선단의 위협 때문에 조운선의 운행이 어려워지면서 관리들의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났는가 하면, 심지어 조정에서는 왜구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할 때 이성계가 ‘왜가 요동 원정을 틈타 쳐들어올 수 있으니 원정이 불가하다’(倭乘其虛 不可)라고 설파했던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왜구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고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고려-일, 오랫동안 끊긴 외교를 왜구 탓에 재개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인왕산 국사당 벽에 걸려 있는 최영의 모습. 우왕 때 고려의 동량이었던 최영은 왜구 토벌에서도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1376년(우왕 2) 홍산대첩을 통해 왜구 섬멸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에게 밀려나 죽은 뒤로 무속인들의 숭배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문화재청 
 
고려에 대한 왜구의 침략은 끔찍하면서도 집요했다. 왜구는 주로 서남해를 중심으로 미곡이 집결되는 조운 창고가 있는 곳이나 조운선 등을 공략했다. 조운의 집결지인 강화도와 교동,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창이 있는 마산, 사천, 순천 등지는 왜구의 침입이 가장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1360년(공민왕 9) 왜구는 강화를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살해하고 미곡 4만석을 탈취했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350척의 왜구 선단이 마산 일대에 몰려와 고려군 5천여 명이 죽는 처참한 피해가 발생했다. 1376년(우왕 2) 고려는 전라도, 경상도, 양광도의 조운을 폐지하고 미곡을 육로를 통해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왜구는 내륙 지역으로 공략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륙에 있는 육로와 수로의 거점, 내륙으로 통하는 연해 지역의 피해가 커졌다. 고려가 정책을 바꾸자 왜구도 침략 형태를 바꾸었던 것이다. 
   

왜구 발호의 배경

 

왜구가 진드기처럼 고려로 밀려들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멸망한 14세기 초반 이래 일본은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무가(武家) 실력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가 권력을 장악한 1338년 이후에도 두 명의 천황이 존재하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어 다카우지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다시 그 내분에 편승하여 남조와 북조의 대립, 무사 계급의 반목과 이합집산이 지속되었다. 1355년 북조를 장악한 다카우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 대립과 갈등의 여파는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영주와 무사들과 연결된 악당들이 세금을 약탈하거나 산적과 해적으로 변신하는 등 혼란이 퍼져가고 있었다.

 

왜구의 발호는 이 같은 정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남북조 내란의 여파는 큐슈(九州) 지역에도 밀려왔다. 큐슈와 이곳의 정세 변화에 민감했던 쓰시마 등지의 무력 집단들은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고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는 1350년 무렵부터 쓰시마 등지의 악당들은 고려에서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군량미나 노동력으로 충당하려 했다.

 

 

 

 

고려는 조운을 통해 세수(稅收) 대부분을 운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습격하여 약탈하기에 알맞은 존재였다. 더욱이 당시 고려의 지방에는 대규모의 왜구를 막아낼 만한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따라서 불시에 나타나 조창이나 조운선을 습격하는 왜구들을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남원황산대첩비지(南原荒山大捷碑址).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서 아키바쓰가 이끄는 왜구의 대부대를 무찌른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가 있던 자리. 당시 아키바쓰 일당은 삼남의 내륙을 횡행하면서 고려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당시 이성계는 이들을 섬멸해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조선은 그를 기념해 1577년(선조 10) 승전비를 세웠는데 일제가 1945년 폭파했고, 1973년 비석이 있던 자리를 다시 정비했다. 문화재청 
 

왜구 금압을 위한 고려와 일본의 외교 교섭 

 

고려 조정은 왜구 금압을 위해 고심했다. 1367년(공민왕 16) 고려는 사신 김룡(金龍) 등을 교토로 보내 아시카가 막부에 왜구의 침략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막부가 북조(北朝)에 고려 사신의 도착 사실을 알렸을 때 그들 조정이 보였던 반응이 흥미롭다. 북조는 “고려는 신공왕후(神功王后)가 삼한을 정벌한 뒤 우리 조정에 귀속되고 서번(西蕃)이 되어 신하가 되었던 나라인데 국서의 형식이 무례하다”며 사신들을 퇴짜 놓았다. 고려를 ‘무례한 신하국’으로 비하하면서 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막부의 대응은 달랐다. 그들은 김룡 등을 교토 천룡사(天龍寺)에 머물게 하고 승려 묘하를 시켜 고려에 보낼 답서를 쓰게 했다. 답서는 ‘왜구는 큐슈 등지의 해적들이 벌이는 행위이며 장차 금지할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막부는 김룡 등이 귀국할 때 승려 범탕(梵盪) 등을 동행시켜 고려에 답서를 전달했다. 왜구 문제를 계기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고려와 일본의 관계가 재개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된 1374년을 전후하여 왜구는 다시 기승을 부린다. 고려는 1375년(우왕 1)에는 나흥유(羅興儒)를 교토에, 1377년에는 정몽주(鄭夢周)를 큐슈로 보내 왜구의 금압을 요청했다. 나흥유는 막부로부터 “큐슈 평정 이후 왜구를 금압하겠다”는 답서를 받아내는데 그쳤지만 정몽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큐슈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했던 큐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카와 료순(今川了俊)은 쓰시마, 잇키 출신들의 해적 행위를 금지시킬 것을 약속하고 왜구에 잡혀왔던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송환했다.

 

료순과의 교섭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고려는 이후 대일외교의 방향을 바꾼다. 중앙의 막부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큐슈 등 변경 지역의 실력자들과 교섭하여 왜구에 대한 실질적인 금압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는 1378년 료순에게 사절을 다시 보내 왜구 통제를 요청하면서 그에게 금은, 인삼, 호표피 등을 선물로 주었다. 료순은 그에 호응하여 왜구 금압을 거듭 약속하고 또 다른 포로들을 송환했다. 고려의 경제적 증여와 왜구 금압, 포로 송환을 서로 맞바꾸는 거래가 자리를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왜구에 대한 군사적 대책

 

외교 교섭만으로 왜구를 온전히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는 군사적 대책도 강구했다. 왜구의 주요 침입지인 연해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각지에 성을 쌓고 진수군(鎭戍軍)이라 불리는 지방군을 증설했다. 또 수군에 해당하는 기선군(騎船軍)을 다시 정비했다. 바닷가와 섬 출신으로서 배를 조종하는데 뛰어난 자들을 뽑아 수군에 배속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해상에서 왜구 선단을 요격하기 위해 화약과 화기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최무선이 화약 제조에 성공했고, 각종 화포를 생산하고 화통방사군이라는 화기 전문부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최영, 이성계, 정지 등 걸출한 무장들이 왜구와의 결전에 직접 나서면서 왜구에 대한 억지력은 증강되었다. 1376년(우왕 2) 최영은 부여 홍산에 상륙한 왜구를 격파했다. 당시 61세의 노령이었던 최영은 화살을 입술에 맞았음에도 끝까지 분전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1380년(우왕 6)에는 나세(羅世)와 최무선 등이 금강 하구 진포(鎭浦)에서, 1383년에는 정지(鄭地)가 진도(珍島)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선단을 물리쳤다. 화약 병기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포의 수전에서 패했던 왜구는 상륙한 뒤, 영남과 호남, 호서 내륙을 횡행하며 살략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윽고 그들은 1380년 9월, 남원 운봉의 황산 일대로 몰려들었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쓰(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의 대부대를 섬멸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황산대첩의 실상이 이성계의 무공을 드러내기 위해 조작, 과장되었다고 폄하하는데 비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승전을 계기로 왜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본다. 실제로 1389년 고려는 병선 100여척을 동원하여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직접 공격하는 공세에 돌입한다. 바야흐로 고려의 고질이었던 왜구의 위세도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