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2)

구름위 2013. 6. 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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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외교의 힘’으로 왜구 막았지만…

 

19세기 초에 그려진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일부. 조선후기 조-일 교섭의 창구였던 동래에서 동래부사가 일본 사절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 조선은 15세기 초, 왜구들을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왕래하던 일본 사절들은 때때로 조선의 접대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왜인들이 우리 변경을 침탈했으니 그 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전하께서 아량과 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사신을 통하고 무역을 허락하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지성으로 복종해 와서 예물 바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익을 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물건을 요구하고, 지나는 고을에서 표독한 짓을 자행하여 칼로 백성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부도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인이 왕래하며 죄를 범하면 대명률(大明律)로 다스리소서. 살인한 자는 법에 따라 처단하고, 칼로써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곤장 80대와 유배 2년에 처하고(…) 재물을 빼앗은 자는 곤장 1백대와 유배 3년에 처하소서.”

 

1414년(태종 14) 9월, 형조에서 올린 보고의 내용이다. 조선이 일본인들의 왜구 행위를 막으려 국교를 열고 무역을 허용했던 사실, 일본인들도 그에 호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사실, 또 왕래하는 왜인들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사실 등이 생생하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조선왕조 또한 개국 직후부터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심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室町) 막부에 보내 왜구를 금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왜구들에 대한 통제와 잡혀온 조선 포로들의 송환을 약속하고 승려 수윤(壽允)을 조선에 회답사로 파견한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또한 이렇게 왜구 문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또한 큐슈의 실력자인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과도 활발히 접촉했다. 이마가와 료순은 1394년 7월, 조선인 포로 659명을 돌려보내며 왜구를 금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료순은 1395년에도 포로 570여명을 송환했다. 조선은 감사 사절을 보내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토산물과 대장경 등을 선물로 주었다.

 

왜구 금지를 약속하고 포로들을 돌려보내자 조선 조정이 대장경을 비롯한 선물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다른 지역의 유력자들도 자극을 받게 된다. 큐슈는 물론 잇끼(一岐)와 하까다(博多) 방면의 유력자들도 왜구 금압을 내세워 조선과의 통교 교섭에 나서게 된다. 큐슈의 또 다른 유력자였던 오우찌(大內義弘)는 1395년 이후 조선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토산물을 헌상하고 왜구를 금압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 조정이 반색하자 그 또한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했다. 왜구 금압과 포로 송환을 내세워 대장경을 비롯한 조선의 하사품을 맞바꾸는 형태로 교섭이 진전되었던 것이다.

1404년(태종 4) 7월,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승려 주당(周棠)을 조선에 보내 빙문(聘問)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국서에서 스스로를 ‘일본 국왕’으로 칭했던 점이다. 과거 천황을 의식하여 고려나 조선에 보내는 국서를, 외교를 담당하는 승려의 명의로 작성해 보냈던 것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다. 이것은 조선과 막부 사이에 정식으로 국교가 성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은 이후 막부 장군이 보낸 사신을 국왕사(國王使)로 대접했다. 16세기 중엽까지 모두 60여 차례 국왕사가 조선을 찾았고, 조선 또한 1473년까지 통신사(通信使)라는 명목으로 막부에 사절을 파견했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진남문(鎭南門)의 모습.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의 주요 연안 지역에 성을 쌓았다. 태종 연간에 축성된 해미읍성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소재. 문화재청 누리집 
 
왜구 회유책의 빛과 그림자 

 

조선왕조가 왜구를 제어하기 위해 주로 사용했던 대책은 회유책이었다. 조선은 막부 장군 이외에도 큐슈를 지배하는 탄다이(探題) 및 대내씨(大內氏), 소이씨(少貳氏) 등 여러 다이묘(大名)들과 통교했다. 또 쓰시마, 잇끼, 마쓰우라 등 변경의 유력자들과 하카다(博多)의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들과 교섭하면서 왜구를 통제하고 그들을 평화적인 교섭자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들 일본의 여러 세력들은 대장경이나 불전(佛典)의 획득, 사찰 건립 비용의 청구, 조선으로부터 하사품 수수, 무역 이익 확보 등을 목적으로 활발하게 조선을 왕래했다. 요컨대 하나의 조선 조정이 국왕사부터 상인에 이르는 다수의 일본 세력을 상대하는 ‘일 대(對) 다’의 모습이 조일관계의 특징이었다.

 

조선은 또한 왜구 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는 쓰시마 등 변경에 사는 왜인들의 귀순을 장려했다. 그들이 귀순할 경우 남해안 등지에 거주할 수 있는 토지와 가옥을 주고 결혼을 알선해 주었다. 또 식량을 제공하고, 조선인과 자유롭게 무역하거나 어로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하여 생활 대책도 마련해 주었다. 이 같은 우대책에 따라 귀순한 왜인들을 보통 투화왜(投化倭), 향화왜(向化倭)라고 한다. 조선은 또한 표류민을 송환하는 등 공을 세운 왜인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 이들을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부른다.

 

왜구를 금압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된 조선의 회유책은 분명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 같으면 왜구가 되어 조선을 노략질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인들이 사송왜인(使送倭人), 흥리왜인(興利倭人) 등으로 불리는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이 감당해야 할 부담 또한 커질수밖에 없었다. 태종 초년에 이르면 경상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향화인들의 수가 2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빈번하게 왕래하는 다양한 사절들을 접대하는 데서 비롯된 폐단과 부담 또한 대단히 컸다. 국왕사를 비롯하여 유력자들이 보낸 사절들은 올 때마다 거의 매번 대장경을 비롯한 불구(佛具)의 증여를 요구했다. 뿐 만 아니라 유력자들이 보내는 무역선들을 일일이 접대하고 교역 요구에 응해주는 것도 큰일이었다. 1414년 8월에는 울산에 모여 있던 일본인 사절 105명이 칼을 뽑아 들고 난동을 벌였다. 자신들이 요구한 범종(梵鐘)을 제 때 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같은 달 김해에서는 대내씨가 보낸 사절 30여 명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접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객사에 들이닥쳐 김해부사의 인신을 짓밟고 옷을 벗겨 칼로 찌르려고 시도했다.

 

접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잇따르자 조선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1414년 태종은 쓰시마의 실력자 소오 사다시게(宗貞茂)에게 조선에 왕래할 수 있는 유력자들의 범위를 제한하겠다고 통보했다. 국왕사와 대내씨, 쓰시마를 비롯하여 10곳의 사절들만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조판서 황희(黃喜)는 “왜인들은 귀순과 기만을 반복하여 신뢰할 수 없다”며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태종은 해도찰방(海道察訪)을 각지에 보내 지방의 군사력과 무기 등의 실태를 점검했다. 병선, 성곽 등의 관리와 수리 상황을 감찰하고 군무를 소홀히 한 수령들을 엄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요컨대 조선은 태종대 무렵에 오면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수많은 통교자들을 ‘평화적으로’ 접대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이에 조선이 꺼내든 ‘카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쓰시마를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대일외교의 창구로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자의 카드가 실패했을 때 조선은 쓰시마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하게 된다.

 

쓰시마 정벌이 명나라 때문이었다고?

 

1419년 정벌 당시 조선군이 공격해 들어갔던 쓰시마의 아소만. 조선은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과 황해도 연평곶을 침략했던 것을 응징하기 위해 그 소굴인 쓰시마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조선의 쓰시마 정벌은 또한 조선이 일본의 여러 세력과 통교하는 것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던 명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조처이기도 했다.

 

“쓰시마는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으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다만 그 땅이 아주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하기 어려워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쫓겨나거나 갈 곳 없는 왜인들이 들어와 소굴로 삼았다. 때로는 도적질로 백성들을 노략하고 학살하며 집을 불태우는 흉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장수들에게 명해 병선을 이끌고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 항복하기를 기다렸으나 지금까지도 이럴까 저럴까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절실히 잘못을 깨닫고 항복한다면 도주(島主)에게는 좋은 벼슬과 후한 녹을 줄 것이요, 나머지 무리들에게도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고 비옥한 땅에 살게 하며 우리 백성과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도적질할 마음을 품는다면 용사 10만을 뽑아 쳐들어가 아이와 부녀자까지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조선군이 쓰시마 정벌에서 돌아온 직후인 1419년(세종 1) 7월, 세종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이다. 원정 이후에도 쓰시마를 다시 회유하려 했던 조선의 태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쓰시마 정벌의 직접 배경

 

개국 이래 일본인들을 받아들이고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는 등 유화책을 통해 왜구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조선이 쓰시마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주목되는 것은 세종 즉위 직후 조선이 쓰시마에 대해 느꼈던 배신감이다. 조선이 배신감을 갖게 된 직접적 계기는 1419년 5월 충청도 비인현(庇仁縣)과 황해도 연평곶(延平串) 등지에 왜구가 침입했던 사건이었다. 왜구는 5월5일 비인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조선 병선 7척을 소각한 뒤 상륙하여 현성(縣城)을 포위하고 노략질을 벌였다. 이어 북상하여 5월11일에는 연평곶에 나타나 조선 병선을 포위하고 미곡을 약탈했다.

 

당시 쓰시마에서는 도주 소 사다시게가 죽은 뒤 내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마침 기근까지 극심하여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태조와 태종대에 이어졌던 조선의 왜인 포용과 생필품 공급 등 회유책을 계기로 잦아들었던 ‘왜구 근성’이 다시 꿈틀거릴 조짐을 보였다. 실제 쓰시마 왜구들은 명에 대한 침략에 나서면서 ‘군량 확보’라는 명목을 내세워 비인현과 연평곶에 침입하여 사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격앙했다. 연평곶이 침략받았다는 보고가 올라온 직후 세종과 상왕(上王) 태종은 중신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군신을 막론하고 “왜인들을 그토록 후대했는데 다시 침략해 왔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성토와 응징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태종은 왜구 침입을 계기로 쓰시마를 정벌하고 명에서 귀환하는 왜구 선단을 요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세종은 정벌과 응징에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는 조선의 병선 숫자가 적다는 것, 육지 방어 태세가 미흡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정벌을 벌이는 대신 육지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세종은 부왕 태종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비록 ‘상왕’으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태종은 여전히 병권(兵權)을 틀어쥐고 있었다. 태종은 “마땅히 소제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매번 침략을 받기만 한다면 옛날 한(漢)이 흉노에게 당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세종과 신료들을 다그쳤다.

주도면밀한 준비와 정벌의 결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의 능인 헌릉. 조선왕조 창업의 주역이었던 3대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한 뒤에도 상왕으로서 군사와 병무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시 세종이 쓰시마 정벌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데 비해 태종은 정벌의 전 과정을 시종일관 주도했다. 문화재청


태종은 정벌을 기정사실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원정을 지휘할 총사령관 격인 삼군도통사에 유정현(柳廷顯)을 임명하여 병력과 전함을 정비하게 하는 한편, 원정 관련 정보가 쓰시마나 일본으로 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심하게 조처했다. 먼저 당시 쓰시마가 보낸 사절 8명을 오지인 함경도로 보내 억류했다. 또 원정군이 출발하기 전에 경상도 일원의 포소(浦所)에 있던 왜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각지에 유배했다. 삼남에 유배했던 인원이 591명이었고,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도주하다가 죽은 왜인만 136명에 이르렀다. 세종은 재류 왜인들에 대한 이 같은 강경책에 소극적이었지만 태종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과거 정몽주를 제거하고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감행하면서 집권했던 태종의 ‘무골 기질’과 과단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주목되는 것은 응징의 목표를 쓰시마에 집중하면서도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점이다. 태종은 쓰시마와 관련된 왜인들은 억류하거나 제거했음에도 규슈 단다이를 비롯한 본토 세력들이 보낸 사절들은 여전히 우대했다. 그들에게 “왜구 짓을 자행한 것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쓰시마를 정벌하는 것일 뿐 본토와는 원한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419년 6월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이끄는 조선군은 거제도를 떠나 원정에 나선다. 모두 1만7285명의 병력이 65일분의 군량을 준비하여 227척의 병선에 분승하고 있었다. 이윽고 6월20일 정오 무렵, 선발대를 실은 조선 전함 10여척이 쓰시마에 상륙한다. 상륙을 목도한 쓰시마의 왜인들은 애초 왜구 선단이 커다란 성과를 안고 귀환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환영하러 나왔다가 조선군임을 알고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난다. 조선군은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이란 자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유시문을 들려 도주에게 보냈으나 회답이 없었다. 조선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섬 안팎을 수색하여 크고 작은 선박 109척과 가옥 1939호를 소각했다. 또 왜인 114명을 처치하고, 잡혀 있던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했다. 나아가 경작하던 작물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하지만 쓰시마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6월26일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이끌던 조선군은 복병을 만나 100여명이 전사하는 패전을 맛보았다. 이윽고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조선군의 철수를 간청한데다 곧 다가올 태풍 철에 대한 우려가 맞물리면서 조선군은 선단을 이끌고 철수 길에 오르게 된다.

 

끼여 있는 나라의 고뇌

 

조선이 쓰시마를 정벌했던 배경에는 명에 대한 고려도 작용하고 있었다. 15세기 초, 역시 왜구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명에서는 일본에 대한 정벌설이 여러 차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벌 관련 풍문은 조선을 긴장시켰다. 특히 조선은 팽창론자인 영락제가 일본 정벌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길잡이를 요구하거나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또한 조선이 막부뿐 아니라 왜구 집단과도 통교하고 무역하는 사실을 명에게 숨기려고 시도했다.

 

 

1419년의 쓰시마 정벌은 왜구와 관련된 명의 조선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씻기 위한 작전이기도 했다. 정벌 전후 왜구 관련 정보를 명에 알려주고, 왜구에게 납치된 중국인 포로들을 송환했던 것도 명의 의심을 풀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당시 명은 조선이 일본과 밀착하는 상황, 혹은 여진을 끌어들여 만주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품는 상황 등을 경계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조선은 쓰시마를 쳐서 왜구 응징에 대한 결의를 과시하는 한편, 명의 조선에 대한 의혹의 시선도 돌리려고 시도했다. 15세기 초, 쓰시마 정벌은 ‘끼여 있는 나라’ 조선의 고뇌가 반영된 군사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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