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전쟁의 불씨

구름위 2013. 6. 2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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뎃포 vs 무뎃포, 일본의 패권을 바꾸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모습을 그린 병풍도. 화면의 중앙 왼편에 조총 부대를 배치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장애물을 설치한 뒤 적을 응시하고 있다. 가운데 오른쪽의 다케다의 병력은 기마대가 돌격하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다.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전투를 계기로 오다는 일본의 패권 장악에 한발 다가섰다. 나아가 종래 기마대 중심의 전투 편제가 조총을 가진 보병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쿄 도쿠가와여명회 소장, <도설 오다 노부나가> 2002, 도쿄 가와데서방신사, 72쪽)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자 명 중심의 동아시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기존 질서란 “천명(天命)을 받은 명 황제가 ‘사방의 오랑캐’(四夷)를 다스리고 오랑캐들은 황제에게 조공(朝貢)을 바쳐 사대(事大)한다”는 이념 아래 유지되는 시스템이었다. 조선은 이 이념과 시스템을 충순하게 존중했고, 일본 또한 15세기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404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사신을 명에 보내 조공하자 명 황제는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冊封)했다.

 

요동치는 정치판…다이묘들의 내란 시대

 

일본이 조공을 통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자 명은 감합(勘合) 무역을 허락했다. 감합이란 조공하러 온 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신표를 가리킨다. 이렇게 하여 15세기에는 견명선(遣明船)이라 불리는 일본 상선들이 명의 닝보(寧波)로 입항했고 생사와 비단, 도자기 등 중국 물자들이 들어왔다. 문인과 승려들도 왕래했다. 교린(交隣)의 상대국 조선과의 무역도 짭짤했다. 조선은 미곡과 목면 등 생필품뿐 아니라 고급 문화 상품인 불전과 대장경도 일본에 넘겨주었다. 특히 조선에서 들어간 다량의 목면은 일본인들의 의생활에 혁신을 가져왔다. 목면이 없어 주로 마(麻)로 만든 옷을 입어야 했던 기존의 상황을 바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동아시아 해역에는 격변의 파고가 다시 넘실대기 시작했다. 관료제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 체제가 안정을 유지했던 조선이나 명과는 달리 15세기 후반 무렵 일본의 정치판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1467년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각 지역 군웅들의 할거와 쟁투가 뚜렷해지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열린 것이다. 천황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장군의 권위 또한 땅에 떨어졌다. 가신이 주군에게 대들고 백성은 영주에게 반항하여 자립을 도모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위세를 떨쳤다. “강도질은 무사의 본성”이라는 속담이 유행하는 가운데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라 불리는 유력 세력들 사이의 내란이 지속되었다.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아 군사력과 경제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다이묘들에게 과거 요시미쓰가 받아들인 명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과 존중 인식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일본의 내란은 조선이나 명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조선은 1475년(성종 6년) 이후, 그동안 일본 막부에 보내던 사신의 파견을 중단한다. 내란 때문에 훨씬 위험해진 일본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된 것이다. 이유가 어쨌든 그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일본의 동향이나 변화를 탐지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예(李藝), 송희경(宋希璟), 신숙주(申叔舟)처럼 일본을 잘 알던 외교 전문가들이 나타날 토양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랜 평화에 젖은 조선이 일본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한창 내란에 빠져 밖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서양 세력들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조총 기술을 흘리면 사형에 처하라”

 

15세기 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힘을 잃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왕권이 커지고 상인들의 발언권도 높아지면서 국부를 쌓으려는 기류가 퍼져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시까지 이슬람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중개했던 동남아와 인도산 향신료를 현지로 가서 직접 획득하려는 열망이 높아갔다. 육식을 즐기는 유럽인들에게 방부제로서 중요한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은 그 이익이 막대했다. 향신료를 리스본으로 가져오면 원산지보다 15배 이상의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천문학과 지리학, 조선 기술이 발달하고 항해 관련 지식이 축적된 것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모험을 부추겼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한다는 믿음 아래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선 것이 1492년이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1521년 포르투갈 사람 마젤란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통과하여 태평양을 횡단한 뒤 필리핀에 도착했다. 바야흐로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후 인도의 고아(Goa)에 총독부를 두고 아시아 지역에 대한 무역과 가톨릭 포교에 나섰다. 그들은 1511년 말라카(믈라카)를 점령하고 ‘향신료 제도’로 불리던 몰루카(말루쿠) 제도까지 세력을 뻗쳤다. 당시까지 중국 상인과 이슬람 상인들이 장악했던 바다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명과 일본을 향해 동진하게 된다.

 

1543년 시암(타이)을 떠나 명으로 향하던 중국선 1척이 규슈 바로 밑의 다네가시마(種子島·종자도)에 표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당시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에 최초로 조총(鳥銃)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사실 조총은 중국에서 주로 부르던 이름이고 일본에서는 뎃포(鐵砲)라고 불렀다.

 

이 새로운 무기는 한창 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던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미친다. 뎃포를 최초로 접했던 다네가시마의 영주가 가신을 시켜 모조품을 만들었던 것을 시작으로 각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뎃포의 도입과 제작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뎃포나 그 제작 기술을 다른 ‘국가’에 전달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정하여 독점을 꾀하기도 했다.


575년 나가시노 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발돋움했던 오다 노부나가. 1582년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배신을 당해 49살에 최후를 맞는다. (<도설 오다 노부나가> 2002, 도쿄 가와데서방신사, 5쪽)


전국시대의 다이묘 가운데 뎃포의 제작과 활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그는 일찍부터 뎃포 제작의 중심지였던 사카이(堺: 오늘날의 오사카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뎃포 부대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1575년 5월, 오다의 군과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군이 맞붙은 나가시노(長篠) 전투는 이후 일본 정국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싸움이었다. 오다는 이 전투에서 일찍부터 용맹하고 과감하게 돌격전을 구사했던 다케다 군 기마대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진지 전방에 목책을 설치했다. 이윽고 다케다 군이 목책에 막혀 허둥댈 때 뒤편에 배치했던 조총수 3000명이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제압했다. 철갑으로 중무장을 했던 전통의 기마대가 뎃포를 가진 보병들에게 무참하게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뎃포’와 ‘무뎃포’(無鐵砲) 사이에서 벌어진 이 싱거운 대결은 15년 뒤 조선의 전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스페인을 뛰어넘은 새로운 ‘은의 나라’

 

1503년(연산군 9년) 5월의 <연산군일기>에는 은의 제련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의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탄(炭)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고 했다.

 

당시 첨단의 은 제련술이었던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불린 이 기술은 정작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에 의해 곧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이다.

 

회취법이 도입되기 이전 일본의 은 제련 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한 뒤, 산화되고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제련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경제성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회취법 도입을 계기로 1530년대 이후 일본의 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곳곳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을 위한 재원 마련에 고심하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일본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개발한 남미 지역의 은 생산량에 버금가는 ‘은의 나라’로 등장한다. 그리고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의 은은 전세계 생산량의 4분의 1 이상을 점하게 된다.

 

은은 당시 국제교역의 결제대금이자 ‘세계의 화폐’였다. 넘쳐나던 일본의 은은 교역의 이익이 있는 곳을 향해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중국의 강남 지방이었다. 비단과 생사, 도자기 등 세계인 모두가 좋아하는 상품의 주산지였다. 하지만 교역은 여의치 않았다. 명이 만들어 놓은 해금(海禁)이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일찍이 명의 주원장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만 감합무역을 허용했을 뿐, 민간인들끼리의 사사로운 교역은 엄격히 금지했다. “판자 하나도 바다에 띄울 수 없다”는 말이 상징하듯이 민간인들은 해외 도항과 무역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교역의 이익을 권력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은이라는 화폐를 손에 넣은 일본 상인들은 강남 상인들과 밀무역을 벌이거나 무장선단을 이끌고 명의 동남 연해 지역을 약탈했다. 이들을 보통 ‘16세기 왜구’, ‘후기 왜구’라고 부른다. 이들 중에는 중국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절강(저장)과 복건(푸젠) 연해의 호족들은 공공연히 왜구와 거래를 벌였고, 왜구의 두목으로 이름을 날린 중국인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 조정은 왜구를 근절할 수 없었다. 실제 1547년 왜구 금압을 명 받고 절강 순무(巡撫)로 부임했던 주환(朱紈)은 왜구와 연결된 지방 호족들의 참소에 휘말려 자살하고 만다.

 

요컨대 16세기 초반 대항해시대가 동아시아, 특히 일본으로 몰고 온 파장은 컸다. 신무기 조총은, 이미 오랜 내전을 통해 단련된 일본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나아가 이 무렵 은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이런 상황 속에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되자 응축된 일본의 힘은 명과 조선을 겨누게 된다. 임진왜란은 바로 그 귀결이었다.

 

구월산에선 임꺽정이, 삼포에선 왜인들이…


이이(1536~1584)의 영정. 선조대의 개혁 정치가 이이는 임진왜란 발생 직전의 시기를 중쇠기(中衰期)라고 규정했다. 건국한 지 200년이 지난데다 척신정치가 남긴 후유증까지 겹쳐 갖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터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장(更張)이 없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했거니와 임진왜란으로 그의 우려와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강릉 오죽헌 소장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1년 전인 1581년(선조 14) 10월, 이이(李珥)는 선조를 면대한 자리에서 조선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면 점점 법제의 폐단이 생기고 인심이 해이해지는 것인데,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타나 퇴폐하고 타락한 것을 말끔히 없애고 정치를 고쳐야만 국세가 떨치고 운명이 새로워지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퇴락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형상을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나 중쇠(中衰)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권간(權姦)이 어지럽혀 화를 많이 겪었고 오늘에 이르러는 노인이 원기가 소진되어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다행히 성상께서 나셨으니, 이것은 장차 다스려질 수도 있는 때입니다. 만일 분발하고 진작하시면 억만년 동안 동방의 복이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장차 무너지고 잦아들어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이는 자신이 살던 16세기 후반을 ‘중쇠기’로, 당시 조선의 상태를 ‘원기가 소진된 노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쌓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조선은 원기를 소진한 노인과 같다”

 

16세기 조선은 안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5세기 이래 정치판을 주도했던 훈구파(勳舊派)와 그들에게 도전했던 사림파(士林派) 사이의 갈등 속에서 심각한 내홍이 빚어졌다. 훈구파는 신생국 조선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기초를 닦아 수성(守成)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세조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각종 비리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던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후계자였던 사림파는, 기득권층으로 변신한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성종대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성리학이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내 몸을 닦은 뒤 남을 다스린다)의 이념을 무기로 국왕과 훈구파들에게 왕도정치를 펼치라고 촉구했다. 연산군, 중종, 인종대에 걸쳐 모두 4차례나 일어난 사화(士禍)는 삼자 사이에서 빚어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수많은 사림들은 목숨을 잃거나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와 함께 출범한 명종대(1545~1567)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외척(外戚),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신료들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서하자 이복동생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명종을 대신하여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정사를 처리하고, 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윤원형은 바로 이이가 지목한 권간(권력을 독점한 간신)의 상징적 존재였다. 외척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척신정치(戚臣政治)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강릉(康陵).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심씨(1532~1575)의 능이다. 명종대는 그의 모후 문정왕후와 외숙 윤원형을 중심으로 이른바 척신정치가 기승을 부려 조선의 원기를 크게 갉아먹은 시기였다. 서울 노원구 화랑로 소재. 문화재청 누리집


1553년(명종 8), 스무살이 된 명종은 친정(親政)에 나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명종이 취했던 방식 또한 다른 외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妃) 심씨 집안의 인척 심통원(沈通源)과 이량(李樑) 등을 중용하여 윤원형을 견제했다. 훗날 이량의 권력이 너무 커지자 이번에는 자신의 처남 심의겸(沈義謙) 등이 나서 이량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이래저래 척신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었다.


척신정치 아래서 갖가지 모순들이 터져 나왔다. 척신들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여 조정 안팎의 관직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심었다. 지방 수령이나 변방 방어를 책임지는 병사(兵使), 수사(水使)들은 척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청탁했던 인물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갯벌까지 파먹은 척신들의 부정 축재

 

“근래 백관(百官)이 직무에 태만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는커녕 백성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 하는 자가 아주 많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내려간 뒤로는 병사와 수사가 함부로 수탈을 자행하지 못하여 영중(營中)에 응대할 물건이 없으므로 자기를 천거해 준 사람이 요구하는 상수(喪需), 혼수(婚需) 등의 물건을 각 고을에 배정하여 공공연히 보내고 있습니다. 병사와 수사를 공천(公薦)으로 뽑지 않고 사청(私請)에 의해 썼기 때문에 그들이 부임한 뒤에 자기를 발탁해 준 사람의 은혜를 후하게 갚는다고 하니 듣는 사람마다 통분하고 있습니다.”(<명종실록> 1553년(명종 8) 3월)

 

척신들에게 청탁하여 관직을 얻은 자들이 척신들에게 바칠 뇌물을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이고 있다는 비판이다.

 

인사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윤원형 등은 권력을 배경으로 부정 축재를 자행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러 엄청난 재물을 쌓았다. 먼저 토지를 확보하려고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매입이나 개간 등 합법적인 수단 말고도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지방 백성들을 마구 동원하여 갯벌에 둑을 쌓고 거기서 생겨나는 광대한 토지를 차지했다. 갯벌에 둑을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몇 년이 지나면 소금기가 빠져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생겨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지를 보통 해택지(海澤地), 언전(堰田)이라 부른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의 공물(貢物)을 징수하는 과정에도 개입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른바 방납(防納-백성들이 바칠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나중에 백성들에게 비싼 값을 받아들이는 행위)을 직접 벌이거나 그것을 담당하는 브로커나 상인들과 결탁하여 뒤를 봐주었다.

 

이렇게 얻어진 부는 또다른 부를 낳았다. 해택지 등에서 수확한 막대한 양의 곡물은 부상(富商) 등을 통해 면포나 은, 구리 등과 교환되었다. 또한 은광 개발을 위한 밑천으로 투자되기도 했다. 면포는 당시 일본에 다량으로 수출되고 있었고, 은은 명나라와의 무역에 투입되어 비단이나 생사 등을 수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비단 등은 다시 일본 상인들에게 전매하거나 국내의 부유층에게 판매했다. 이렇게 경작과 방납, 교역, 광산 개발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윤원형 등 척신 출신 권세가들은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양민들이 동원되어 척신 권세가들에게 사역되었다. 청탁 등을 통해 지방관에 임명된 인물들은 척신들의 앞잡이가 되어 이러한 불법 행위를 방조했다. 조정에서는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를 제어하고 백성들을 다독이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연히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고 동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의 반란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위력을 떨쳤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쓰시마 출신들의 삼포왜란을 진압하다


15세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때엔 중국 옆에 놓인 조선을 실제보다 크게 그릴 정도로 대국 의식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조선의 국력은 위축되는 추세였다.


1419년 쓰시마 정벌 이후 조선은 일본인들을 포용하여 왜구 행위를 억제하는 회유책을 대일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경상도의 삼포(三浦) 지역에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하고 그들이 경작과 어로,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15세기 중반부터 문제가 속출했다. 조선이 애초 거주를 허용했던 일본인의 수는 60호 정도였는데 그 수가 계속 늘어났다. 16세기 초가 되면 제포(薺浦)에 거주하는 인원만 400호를 넘어서고 삼포 전체로 치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일본인들 가운데는 거주 지역을 벗어나 내륙을 횡행하거나 밀무역, 인신매매 등 일탈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은 자연히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시도했고, 쓰시마 출신이 중심이 된 일본인들은 그에 반발하여 사달이 일어났다. 1510년(중종 5) 발생한 삼포왜란이 그것이다.

 

조선은 폭동을 진압한 뒤 쓰시마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윽고 쓰시마의 간청을 받아들여 1512년 제포를, 1522년(중종 17)에는 부산포를 다시 열어주었다. 하지만 일본의 도발은 그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에는 왜선 20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돌입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1555년(명종 10)에는 왕직(王直)이 이끄는 왜구 선단이 전라도에 침입하여 영암(靈巖)의 달량진(達梁鎭)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까지 일어났다. 조선에서는 왜구가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으로 북상하여 도성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15세기 조선이 삼포를 열고 일본인들의 거주와 교역을 허용한 것은 그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1419년 쓰시마를 정벌했던 것에서 드러나듯이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성종대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군사력을 비롯한 조선의 전반적인 국력은 하강 추세였다. 당연히 일본인들을 접대하고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16세기 거듭되는 왜변을 겪으면서 조선의 대일 인식은 경직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 왜적(倭賊), 적왜(賊倭) 등 부정적인 것으로 고정되었다. 더욱이 일본에서 전국시대의 혼란이 이어졌던 것을 계기로 공식적인 사신 왕래마저 중단되면서 일본 내정에 대한 탐지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1567년 조선에서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바야흐로 척신들의 집권이 끝나고 사림들의 시대가 열렸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분열이 끝나가고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급변하는 일본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절실한 시기였다. 하지만 과거 척신정치가 남긴 폐단과 후유증을 치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침략을 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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