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한·일·중의 시선

구름위 2013. 6. 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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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난동이냐, 조선정벌이냐, 항왜원조냐

 

이완용이 통감 이또 히로부미 앞에서 굴욕적으로 도장을 찍는 장면을 하늘에서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내려다보고 있다. 임진왜란이 조선 침략과 병탄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부활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상일·한정선 저, 『만화에 묘사된 일본제국』, 2010, 東京 明石書店)에서 전재.)

201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셈법으로 보자면 전쟁이 일어난 지 7주갑(周甲)이 되는 참으로 뜻깊은 해인 것이다.


7년 이상 이어진 임진왜란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참혹한 고난을 겪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조선 팔도를 유린했던 일본군의 총칼에 맞아 죽거나, 귀와 코를 잘리고, 굴비 두름 엮이듯이 묶여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돕겠다며 들어온 명군 또한 마냥 ‘구원군’은 아니었다. 전쟁이 자신들의 뜻대로 풀리지 않자 그들은 돌변했다. 폭행과 약탈, 겁탈이 다반사였다.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속언이 등장할 정도였다.


참빗과 얼레빗의 악몽으로부터 7주갑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는 비할 수 없지만, 전란 때문에 고통받은 것은 명과 일본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또한 병졸 등으로 징발되어 낯선 이국의 육지와 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명과 일본 본토의 주민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마련하거나 운반하는 과정에서 생활이 피폐해졌다. 명군의 군량을 압록강까지 날라야 했던 요동 백성들이 “군량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망쳐 버렸다”는 기록은 그러한 실상을 웅변한다.

 

한·중·일 삼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이었는가? 임진왜란은 한마디로 ‘조선의 원기를 갉아먹은 전쟁’이자 ‘동아시아의 형세를 바꾼 국제전’이었다. 조선은 당시 쇠락의 조짐이 확연해지고 있던 ‘패권국’ 명과 명에 도전했던 ‘신흥 강국’ 일본 사이에 끼여 전쟁의 참화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7년 전쟁이 겨우 끝나 전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몰두해야 할 17세기 초, 조선은 또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번에는 만주에서 누르하치의 후금이 굴기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던 노대국’ 명에 도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명과 후금의 대결 여파는 어김없이 ‘끼여 있는 나라’ 조선으로 밀려온다. ‘임진왜란 때문에 망해 가던 조선을 우리가 살렸다’고 자부했던 명은 조선에 ‘은혜’를 갚으라고 다그친다. 후금은 후금대로 자국의 배후에 있는 조선에 ‘중립’을 지키라고 채근한다. 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후금과 맞설 것인가, 후금이 떠오르는 현실을 고려하여 중립을 지킬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고뇌하던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에 다시 휘말린다. 1644년 명 또한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멸망되고 청이 중원을 차지하는 격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이 남긴 불씨는 30여년을 잠복해 있다가 병자호란과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또다른 동란으로 다시 타올랐던 셈이다.

 

7주갑의 시간이 흐른 오늘,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어떠한가.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주요 2개국(G2)으로까지 떠오른 중국, 쇠퇴의 조짐을 보이는 미국, 중국의 부상에 좌불안석인 일본 등등. 동아시아의 정세는 여전히 요동치고 격변하고 있다. 이 요동과 격변이 원만히 수습되어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것인가, 아니면 열강들이 힘의 대결을 다시 벌이고 한반도가 또다시 그에 휘말리는 비극의 시대가 재현될 것인가? 임진왜란이라는 거울을 통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이 근본적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한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혼마치’는 어떻게 ‘충무로’로 거듭났나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에 의해 조일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명군이 참전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이라는 동일한 전장에서 벌어진 이 전쟁을 기억하는 한·중·일 삼국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오늘날 세 나라에서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이 확연히 다른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 전쟁을 보통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부른다. 각각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동’, ‘정유년에 다시 일으킨 난동’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무고하게 쳐들어와 죽이고 잡아가고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사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왜구의 침략 때문에 일본에 대한 인식과 감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대일 감정은 결정적으로 악화되고 고정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라고 규정했다. 왜란이 끝나 국교 회복을 논의하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조차 ‘만세불공지수’라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임진왜란은 민족적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임진왜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태도에도 반영되었다. 4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과거 초중고 시절 국사를 배울 때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을 달달 외웠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이 그것이다. ‘대첩’으로 상징되는 임진왜란의 응축된 기억은 이순신이라는 영웅에 대한 숭앙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순신은 한국인들이 임진왜란을 언급할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자존심의 보루였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로 넘쳐나던 거리 ‘혼마치’(本町)의 이름을 해방 뒤 충무로(忠武路)로 바꾼 것은 그것과 관련하여 흥미롭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을 바다에 쓸어 넣었던 충무공의 원력이 작용하여 다시는 일본인들이 설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놓고 일본과 맞붙었을 때 한국 축구 대표팀은 2-1로 역전승을 거둔다. 그 사실을 보도했던 한 스포츠신문은 스스럼없이 ‘도쿄 대첩’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원한과 적개심, 자존심이 뒤섞인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10년 강제합병 뒤부터 ‘문록경장의 역’

 

오늘날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이다. 1910년부터 공식화된 이 용어에서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게이초’는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다. 따라서 ‘문록경장의 역’이란 번역하자면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일견 중립적인 뜻을 갖는다.

 

임진왜란 이후 19세기까지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용어는 ‘조선 정벌’이었다. 이미 17세기 후반, 유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이른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이어 18세기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히데요시 사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국교를 다시 열어 조선을 재생시키는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변했다. 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황국의 광휘를 조선과 명나라에 드날렸다’고 찬양했다.

 

‘신공황후 이래의 속국을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는 이들의 인식에는 조선에 대한 멸시와 우월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대외 침략에 나서면서 한층 고양된다. 청일전쟁을 도발했던 1894년, 마쓰모토 아이시게(松本愛重)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공황후의 뒤를 이어 조선 정벌에 그치지 않고 명과 유럽까지 병탄하여 무위(武威)를 드날리려 했다”고 찬양했다. 이러한 추세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무렵에도 이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과 함께 조선 침략과 병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부활했던 것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제 합병한 뒤 고민이 생겼다. 이미 ‘일본 영토’가 된 한반도를 ‘정벌’했다고 하기가 곤란해졌다. 그래서 만든 용어가 바로 ‘문록경장의 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략 전쟁’임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후소사판을 계승하여 문제가 되었던 지난해의 중학교 교과서는 ‘문록경장의 역’이란 대목에서 ‘조선 출병’을 운운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등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침략의 본질을 여전히 감추려 하고 있다.


‘항왜’와 ‘항미’…350년 거리의 한 글자 차이

 

중국과 대만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항왜원조’(抗倭援朝)이다. ‘왜구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을 지닌다. 애초 명군이 참전할 무렵 명의 관인들은 이 전쟁을 ‘동사’(東事), ‘왜범조선’(倭犯朝鮮), ‘왜구조선’(倭寇朝鮮), ‘왜사’(倭事) 등 다양하게 불렀다. 그런데 17세기 초에 이르러 ‘조선을 도운 전쟁’(東援一役) 등의 표현이 나타나더니 언제부터인가 ‘항왜원조’로 굳어졌다.

 

‘항왜원조’ 가운데 한국인의 입장에서 가장 주목되는 글자는 단연 ‘원’자이다.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 할수록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실제 임진왜란 이후 명청교체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명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에 줄곧 고민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항왜원조’라는 용어의 위력은 대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2010년 중국의 시진핑 부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하여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바 있다. 중국은 6·25 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조선을 도운 전쟁’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항왜원조’와 ‘항미원조’는 각각 350년 이상의 시간을 격한 사건임에도 그 차이는 글자 한 자에 불과한 셈이다. 두 용어에는 모두 중국의 대국 의식과 한반도에 대한 개입 의지가 담겨 있다. ‘일본 오랑캐’와 ‘미국 오랑캐’에 맞서 한반도를 자신의 권역으로 묶어두어야 한다는 중국의 집요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문록경장의 역’, ‘항왜원조’의 간극을 넘어 한·중·일 삼국이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과거 역사를 대면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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