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혀 새로운 난제 군사분계선의 설정이 타결된 후, 다음 의제인 제4항‘포로 송환’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제네바 협정’이라는 국제적인 룰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따르면“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해.. 전쟁...../한국전 2013.03.19
6.25,,,피로 얻은 승리 그리고 교훈 사단장은 지난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예하 지휘관들에게 이번 작전은 3개 연대가 동시에 공격하기 때문에 북한군은 병력과 화력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없고, 전차대대가 문등리 일대의 후방을 교란하면 적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시기를 이.. 전쟁...../한국전 2013.03.19
6.25,,,피로 얼룩져간 능선 1951년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자 미 제8군은 지체 없이 공격을 재개하여 공산군을 압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러프너(Clark L. Ruffner) 미 제2사단장은 펀치볼에 대한 공격과 병행하여 이를 감제할 수 있는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도 함께 공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일대.. 전쟁...../한국전 2013.03.19
고지 쟁탈전의 시작 휴전협상이 진척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쌍방 모두는 휴전협상 자체를 파국에 빠뜨릴 수 있는 거대한 전면공세는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휴전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한 제한적인 공격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은 .. 전쟁...../한국전 2013.03.19
개시된 휴전회담 중공군은 참전이후 1951년 5월 말까지 총 6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감행하였지만 그들의 부족한 능력으로 화력의 우위를 점한 유엔군을 결코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중국은 감내하기 힘들었고 이를 .. 전쟁...../한국전 2013.03.19
국군 제6사단의 와신상담 결론적으로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중공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 중에 국군 제3군단 해체라는 국군 역사상 최악의 기록도 남겼습니다. 밴 플리트가 분노하여 즉시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고 이후 형식적이나마 존재하던 국군의 지휘권을 박탈하.. 전쟁...../한국전 2013.03.19
국군 제3군단 최후의 날 중요한 목지점인 오마치고개를 중공군이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아군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미 제10군단 예하 인 국군 제7사단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중공군이 국군 제3군단 후방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9사단은 만일을 대비하여 사단이 보유.. 전쟁...../한국전 2013.03.19
예견된 대전투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끝나고 아군의 반격이 얼추 끝나가던 5월 초, 교통의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일대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공산군 측 군수물자의 수송량이 눈에 띠게 증가되고 있음이 포착되었습니다. 더불어 포로를 심문한 결과, 지난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 전쟁...../한국전 2013.03.19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암울했던 1.4후퇴의 기억을 멀리하고 1951년 4월 중순, 봄이 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부대들은 38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양양을 연하는 캔사스(Kansas)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전으로 상황이 다시 돌아간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난 6개월간의 경험을 통.. 전쟁...../한국전 2013.03.19
다시 38선으로 서울의 군사적 의의가 반감되었다 하더라도 탈환한 이상 또다시 적에게 순순히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서울을 한 번 더 적에게 내어준다면 그때는 전선이 한강일대에서 완전히 고착화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38선 일대인 임진강을 연하는 선까지는 .. 전쟁...../한국전 2013.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