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국군 제3군단 최후의 날

구름위 2013. 3. 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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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목지점인 오마치고개를 중공군이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아군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미 제10군단 예하 인 국군 제7사단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중공군이 국군 제3군단 후방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9사단은 만일을 대비하여 사단이 보유한 차량과 중장비 200여대를 창촌 일대로 철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오마치고개의 피탈이 파악되었습니다. 이들 철수 차량제대가 후방의 창촌으로 가려면 오마치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동 중에 중공군으로부터 급습을 당하였고 이를 통해 고개가 차단당한 사실을 인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근 국군 제3사단과 군단본부에도 즉시 보고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오마치고개 점령 사실은 국군 붕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단본부는 이를 잘못된 보고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설령 적이 오마치고개를 장악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침투부대나 공비들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직 그곳을 관할하는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어떠한 사실도 통보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반나절 만에 중공군이 전선을 가르고 30킬로미터 후방까지 침투 할 수 있었겠냐하는 막연한 생각도 그런 오판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단본부가 이처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막상 중공군은 오마치고개는 물론 훨씬 남쪽 후방인 침교에서도 두 번째 포위망을 구축하던 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퇴로가 엄중히 차단당한 국군 제3, 9사단이 오마치고개를 거쳐 후방으로 후퇴가 5월 17일 오후에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설령 오마치고개를 넘었다하더라도 후방인 침교마저 적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여서 오마치고개의 중요성은 이미 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어볼 점은 오마치고개가 아니라 바로 국군 제3군단의 항전의지였습니다.


  국군 제3군단과 예하 사단들은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마자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후퇴를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퇴로의 차단은 포위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패배와 몰살을 뜻하는 단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마치고개의 피탈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3군단은 5월 17일 오전 중에 이미 항전을 포기하고 철수를 목적으로 대책 없이 현리일대로 전방부대들이 집결하는데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도 공산군은 아군을 부분적으로 포위만 하였지 압박을 가하던 상태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국군 제3군단은 후퇴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국군 제7사단의 붕괴로 말미암아 먼저 뚫려 버린 미 제10군단 지역은 미 제2사단의 선전으로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국군의 무능이 바로 펑떠화이가 이번 공세를 국군지역으로 하게 만든 이유였고 철저하게 불행히도 그런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갔습니다.


[능선을 기어오르며 인해전술을 펼치는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국군 제3, 9사단이 고심 끝에 시도한 작전은 결사항전이 아니라 한심하게도 오마치고개 돌파작전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오로지 후퇴를 염두에 두었던 작전이었습니다. 양 사단에서 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5월 17일 21시, 오마치고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한마디로 앞에서 밀려오는 적은 그대로 놔두고 퇴로를 뚫기 위해 뒤로 돌아 공격을 가하는 치욕적인 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 부대에 대한 통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대들은 북한군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개방되어 있던 방대산을 무질서하게 넘어 철수, 아니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 화기까지 버린 병사도 있었으며, 주요 간부들은 계급장마저 떼어버리고 철수하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으로 작전상 철수가 아닌 도망이었습니다. 적에게 패해 후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줄행랑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3군단은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부대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방대산의 철수로가 얼마나 혼잡하였던지 그냥 서 있으면 떠밀려서 앞으로 나아 갈 정도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대열 속에는 말단의 사병은 물론 국군 제3사단장 김종오준장, 제9사단장 최석(崔錫)준장, 군단 참모장 심언봉(沈彦俸)준장등 3명의 장성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군의 이러한 비참한 도주는 창촌-광원리-하진부리까지 70킬로미터를 내려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5월 27일까지 70퍼센트 정도의 병력과 30퍼센트 정도의 장비가 간신히 수습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이 정도의 병력이 수습된 것만 해도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측으로 남하한 북한군 3개 군단이 정상적으로 진출하여, 최초 계획대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였더라면, 방대산 및 계방산 일대에서 무방비 상태에서 무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기 때문입니다.


[5월 27일 전투상황도]


  하지만 이러한 예측도 엄밀히 말하면 사상 최대 패전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다녔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라는 가정이 나오는 것이었지, 결코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국군 제3군단을 공산군이 양익에서 완전히 포위하였어도 공중으로 보급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저항은 애초부터 생각도 못했고 도망만 다니다 국군은 역사상 최악의 패전을 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운두령에서의 역전타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서울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던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그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의 주력이 중-동부에 집중되어 속사리까지 종심 70여 킬로미터의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되자, 군 예비로 후방에 배치하고 있던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수연대를 급거 이동 전개시켰습니다. 다행히도 이들 부대가 이동이 들어가던 5월 19일을 전후하여 보급에 고질적으로 문제가 많던 중공군의 공세는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하였고 이틈을 타서 미 제3사단은 장평리 일대에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미 제3사단이 돌파구를 막으러 긴급 이동 전개에 들어갑니다.]


  미 제3사단이 정찰에 돌입한 결과 속사리-하진부리 일대까지 남하한 중공군이 그 동안의 공세로 몹시 지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 제3사단은 즉시 반격을 펼치기로 하고 운두령 일대를 공격하였습니다. 깊숙이 남하한 중공군 주력의 배후에 위치한 운두령은 속사리 북방 10킬로미터 지점인 해발 1,326미터의 회령봉과 해발 1,577미터의 계방산사이에 놓인 고개인데, 현리로부터 속사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31번 도로가 지나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이곳은 마치 국군 제3군단의 붕괴를 가져온 오마치고개처럼 아군이 점령할 경우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고립시킬 수 있는 목지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중공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하여 운두령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화력은 지쳐있는 중공군을 서서히 압도하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반격 3일 만인 5월 22일 18시경 미 제3사단은 마침내 운두령 정상을 점령했습니다. 불과 5일전 중공군의 공세초기에 오마치가 피탈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이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참담한 상황이 완벽하게 재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주연과 조연이 뒤바뀐 상태였습니다. 더불어 국군 제1군단이 대관령을 선점함으로써 깊숙이 남하하였던 중공군은 순식간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공군주력은 국군 제3군단을 추격하다가 너무 멀리 내려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퇴로가 차단당하자마자 이어진 엄청난 포화와 공습에 대책 없이 녹아내려 갔습니다. 미 제3사단의 운두령전투는 적의 5월 공세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공격 기세를 완전히 차단하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군 제3군단을 붕괴시키는 등 전술적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그로 인하여 얻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전략적으로 대실패한 공세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아군에게도 이번 공세는 너무나 많은 교훈을 안겨주었습니다.


[운두령 점령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우선 적의 차기 작전 예측에 완전히 실패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중공군 제6차 공세를 앞두고 미 제8군사령부 역시 5월 중순에 중공군의 새로운 공세가 있을 것으로 시기는 정확히 예측하였으나 주력의 지향방향에 대해서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중-서부의 주력을 불과 일주일 만에 중-동부로 이동시켜 공격준비를 완료하리라고는 판단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공중정찰을 통해 중공군의 이동 징후를 탐지하였으나 이를 중공군의 기만책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공세 초기인 5월 17일에 신남 일대의 국군 제5, 7사단이 붕괴된 점만으로도 중공군의 지향방향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서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제8군의 예비였던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수연대의 이동이 늦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비록 이 때문에 중공군의 과도한 남진을 촉진시켰고 그것이 침략자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반대급부로 국군 제3군단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3군단의 패배를 제8군의 전략부재에서 찾을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국군 제3군단 스스로에게 더욱 많은 문제가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리 일대에서 전면방어 또는 인제-홍천 축선에서의 공격 등처럼 중공군이 예상치 못하였던 방책을 강구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반격이나 저항은 고사하고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후퇴를 선택한 것은 결코 올바른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후퇴가 아닌 붕괴였고 이점에 대한 국군 제3군단의 어떤 변명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밴 플리트가 현리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5월 26일부로 제3군단을 해체시켜 국군 제9사단을 미 제10군단에, 국군 제3사단을 국군 제1군단에 각각 배속 전환한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국군의 위상이 변화된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변화보다 국군에게 더 한 굴욕은 미 제8군이 직접 모든 국군부대를 지휘하는 체계로 바뀐 점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미군은 국군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뜻에서 육군본부를 통해 국군부대를 지휘해왔으나 이런 절차를 파기하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국군 제1군단마저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형식이 바뀌었습니다. 사실 이런 굴욕은 내 나라를 내가 지키지 못한데서 온 당연한 귀책사유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 제3사단이 운두령 일대를 차단하자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돌출 고립된 중공군을 소탕하라고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 지시하였고 이 명령은 예하 군단장에게 즉시 하달되었습니다. 당시 명령을 받은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홍천 북방의 한계(철정)로부터 양구 방향으로, 미 제2사단은 한계-인제 방향으로 공격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고, 운두령을 점령했던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포위망에 갇힌 중공군을 격멸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3군단의 몰락으로 동부전선을 모두 책임지게 된 미 제10군단의 작전 반경이 너무 컸고 더불어 험악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진출이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하였습니다.


[험악한 지형으로 미 제10군단의 반격은 지지부진하였습니다.]


  반면 5월 25일경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까지, 중부전선에서는 춘천까지 전선을 걷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10군단의 이런 부진에 대해 밴 플리트는 군단장을 독촉하였고 고심하던 알몬드는 미 제2사단이 한계-인제를 신속히 돌파하여야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으로 결론내리고 공격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은 선두에 나설 선봉부대로 사단에 임시 증원된 제187공수연대 2대대에 2개 전차 중대를 배속하여 게르하트(Gerhardt)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가피한 사전으로 부대편성이 지연되자 전차 1개 소대(4대)와 수색분대(인원11명, 지프 3대), 공병 1개 소대(트럭 2대)로 부대를 축소 편성한 후 이를 제72전차대대의 부대대장인 뉴먼(Charles A. Newman)소령으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조치한 후 급히 출발시켰습니다.


  그런데 뉴먼의 부대는 중공군이 철수하며 설치하였을지도 모를 대전차 장애물을 공병이 탐지한 후 전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진격이 상당히 지체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런 진격 모습을 헬기에서 알몬드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도한 알몬드는 현장에 즉시 착륙하여“지금은 지뢰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귀관은 지뢰에 부딪칠 때까지 최고속도로 진격하라”고 단호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군단장의 명령을 받은 뉴먼은 모든 것을 운에 맞기고 적이 혼비백산할 정도의 신속한 속도로 부대를 쾌속 진격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몬드의 판단대로 불과 3시간 만에 적진을 무려 30킬로미터나 돌파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뉴먼의 부대는 쾌속 진격하였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뉴먼의 부대가 적진을 뚫고 신속한 속도로 진출하자, 철수 중에 있던 중공군은 지뢰를 매설할 틈도 없을 만큼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바빴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항복한 포로들을 너무 많아 불과 4명의 공병대원이 80명의 포로를 감시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뉴먼부대에 후속하여 진출한 미 제10군단에 의해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던 중공군의 주력 2개 군의 후방은 완전히 차단되면서 일거에 궤멸되었으며, 단 1개 군만이 뉴먼 부대가 소양강 도하지점을 차단하기 전에 겨우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전사에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으로 기록된 이번 작전으로 유엔군이 지난 3월경에 휴전선으로 구상하던 캔사스선(Kansas Line 임진강-연천-화천호-양양)을 다시 확보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를 10~20킬로미터 넘어선 북방인 와이오밍선(Wyoming Line)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것은 휴전을 희망하던 유엔군이 내심 북으로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정책적 목표선이었고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목표를 이룬 유엔군은 여유를 가지고 중공군의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최대의 패배를 기록하였습니다.]


  반면 펑떠화이가 아군의 허점을 노려 야심만만하게 개시하였던 중공군 제6차 공세는 이렇게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초기에는 그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목표가 달성되는 듯 했으나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던 부대들이 공격 기세를 상실한 상태에서 유엔군에게 후방이 차단되자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격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펑은 아군의 방어선에서 국군이 취약하다는 나름대로의 정확한 분석을 하였지만 스스로의 약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공군의 능력을 벗어난 과도한 전략을 구사하였던 것이고 그 결과 중공군은 이번 공세에서 6·25전쟁 참전이후 가장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였습니다. 펑은 지피(知彼)는 하였지만 지기(知己)를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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