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중공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 중에 국군 제3군단 해체라는 국군 역사상 최악의 기록도 남겼습니다. 밴 플리트가 분노하여 즉시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고 이후 형식적이나마 존재하던 국군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유엔군 단일 지휘체계 안에 포함시키는 강수를 두게 하였을 만큼 참담하였습니다. 평창-횡성전투, 사창리전투의 연속된 패전으로 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벌어진 현리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국군을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바로 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51년 5월 16일, 제6차 공세를 감행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중동부 전선에 주공을 투입함과 동시에 조공이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국군 제3군단지역으로 증원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북한강 계곡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이곳에 나타난 공산군은 중공군은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9병단예하의 제63군이었고 이들은 지난 4월에 있었던 제5차 공세당시에 사창리에서 혼쭐이 난 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중공군은 미군을 피해서 집요하게 국군이 담당하던 섹터로 돌파구를 확장하려 시도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용문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적이 이곳을 점령하면 아군의 전선은 서부와 동부로 양분되어 각개 격파될 수도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해발 1,157미터의 용문산일대를 점령하여 방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사창리패전의 경험과 이후 위기를 대신 막아낸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전투를 직접 목도한 장도영 사단장은 무엇보다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이 중요하다가 판단하여 병사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면서 훈련에 열중하였습니다. 사창리전투 후 구사일생으로 부대가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기는 넘겼지만 주변의 미군들로부터 겁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수모를 겪던 국군 제6사단은 이처럼 묵묵히 내실을 다지며 치욕을 극복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결사라는 글자를 새긴 머리띠를 둘러맨 제19연대 2대대병사들]
제6사단은 용문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제19연대를, 동쪽에는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는데,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어 적이 전면으로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예비로 후방에 빠져있던 제2연대를 홍천강 남단에 추진 배치하는 역발상적인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후방에서 최전선으로 전개 된 제2연대의 제1대대가 미사리의 559고지에, 제2대대가 해발 381미터의 울업산에, 제3대대가 연대의 예비로 울업산의 후방인 353고지에 각각 전면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더불어 장병의 각오를 다지기 위하여‘결사’라고 쓴 머리띠를 착용하였습니다.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하고 결전을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규모 중공군이 남하하며 북한강 일대에서 전운이 감돌자, 제2연대의 서측에 배치된 국군 제2사단 31연대와 동측에 배치된 미 제7사단 17연대가 후방에 마련된 주저항선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제2연대만이 적진에 홀로 돌출 되어 포위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사창리의 실패를 여기에서 만회하겠다’는 굳은 결의에 불타있던 제2연대의 장병들은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대비하여 전면방어 태세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었습니다. 청성부대는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고립방어에 들어가 원주에서, 지평리에서, 설마리에서, 가평에서, 펀치볼에서 압도적인 중공군을 막아내거나 지연시켰던 유엔군의 교훈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지 구축 완료 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강 북쪽에서 중공군의 활동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연대 정찰대가 5월 17일 적의 예상도하지점을 정찰하던 중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이미 홍천강을 도하하여 계곡에 집결중인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교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중공은 도처에서 북한강과 홍천강을 도하해오자 정찰대는 방어선 안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도하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5월 18일 아침이 밝아오자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나뉘어 도처에서 홍천강 도하를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온 제2연대는 과감한 저항으로 이들의 도하를 저지시켰습니다. 주간 공격에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돌파가 실패한 중공군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아군의 전면 방어진지를 우회하여 제2연대를 완전히 포위하고자 대구모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제2대대가 방어하는 울업산과 제1대대가 담당하는 장락산맥에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나타나 도하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제2연대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사단 및 군단에서 지원된 5개 포병대대의 조명 및 화력지원 하에 중공군의 공격을 맨 앞에서부터 저지하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압도적이었던 중공군 일부가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1, 2대대의 진지까지 접근하여 위기가 고조되기도 하였으나 제2연대 용사들은 진지 안으로 들어온 중공군과 백병전을 펼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분명히 이런 상황이면 국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 맞았는데, 예측을 벗어난 제2연대의 이러한 용전분투는 중공군이 참전한 후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동쪽의 국군 제3군단은 현리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제 2연대의 용전분투는 중공군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제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저항을 계속하자, 중공군은 이곳을 국군 제6사단의 주저항선인 것으로 오판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제6사단을 제거하기 위해 5월 19일 새벽부터는 제63군 주력 모두를 이곳에 투입하면서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장도영 사단장이 원하던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최대한 많은 적들을 끌어 모은 후 화력을 집중하여 일거에 궤멸시키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선전을 펼친 제2연대가 좀 더 버텨주어야 했습니다.
총공세를 감행한 중공군은 08시경 제1대대가 방어중인 559고지를 연대규모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제1대대는 근접항공지원 하에 고지를 고수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공중폭격이 종료되자 중공군 증원부대가 장락산맥 계곡으로 투입되어 제1대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일순간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굴복할 제1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3시간동안 혈전을 펼치면서 5월 19일 15시경, 적의 포위망을 뚫고 연대본진이 있는 나산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동시에 울업산을 방어하던 제2대대는 중공군 제189사단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10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받은 제2대대는 19시경 근접항공지원의 엄호 하에 427고지로 철수를 단행했습니다. 이로써 제2연대의 방어정면은 353고지-나산을 연하는 선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처럼 무질서한 후퇴가 아니라 최선을 다한 방어 후 예정된 후방 방어진지로 이동한 성공적인 철수였습니다. 제2연대는 이곳에서 방어전을 계속 펼쳐내었고 더 큰 전투가 제2연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문사전투 상황도]
국군 제6사단을 밀어붙였다고 오판한 중공군 제63군은 20시경 예하 3개 사단 모두를 투입하여 총공세에 나섰습니다.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조명탄을 밝힌 가운데 진내로 접근한 중공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했습니다. 제2연대는 지금까지 어떠한 유엔군 부대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10배나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고립방어전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의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는 등 방어진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제2연대는 강력한 정신력으로 방어진지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장도영 사단장은 현리의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미 제8군의 반격명령이 하달되자 용문산 일대의 주 저항선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제19연대와 제7연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들 연대들은 5월 20일 05시에 진지를 박차고 나와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제2연대에 매몰되어 있던 중공군 제63군의 배후를 제19연대와 제7연대가 차단하자 순식간 중공군은 역 포위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유하거나 지원 가능한 모든 화력이 포위망 안에 갇혀 있는 중공군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으로써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이었습니다.
5월 21일 03시경 중공군은 서둘러 북한강 이북으로 철수를, 아니 도망치기 시작했고 국군 제6사단의 무서운 추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북으로 도망가던 중공군 제63군은 화천저수지에 퇴로가 막히게 되었고 이곳에서 국군 제6사단의 맹공을 받으면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국군 제6사단은 불과 한 달 전에 사창리에서 당한 수모를 몇 배 이상 중공군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용문산에서 화천호로 이어진 일련의 전투 결과 3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25,000여 중공군 제63군은 완전히 격멸되었고 이것은 6·25전쟁에서 국군 유엔군을 통틀어 사단급 부대가 단일 전투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공군은 화천호에서 녹아내렸고 이후 파로호로 명칭이 바뀝니다.]
이 놀라운 승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화천호를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의미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국군 제3군단이 해체될 만큼 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가 무너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터져 나온 극적인 역전타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국군을 쫓아다니던 중공군에 대한 콤플렉스를 날려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중공군도 더 이상 국군을 얕잡아 보고 국군 방어지역으로 돌파를 시도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6·25전쟁 발발이전 이전부터 한국정부의 통일정책은 변함이 없었고 그것은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1.4후퇴 이후 간간히 터져 나오는 휴전에 대해 반대하는 소리는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하지만 1951년 전반기부터 미 행정부 내의 대(對) 한반도 정책은“휴전장치 하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수행 정책결정을 두고 한-미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정점이 4월 11일 행정부의 휴전정책에 반대해온 맥아더 원수의 해임이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컸기에 정부와 국민들은 휴전을 반대하였습니다.]
맥아더와 달리 미 정부 당국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였던 신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은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중장에게 캔사스선과 와이오밍선을 넘어가는 모든 부대의 작전은 유엔군 사령관의 승인 하에 실시하도록 조치하면서 모든 군사작전의 목적은 협상으로 휴전이 되도록 이끄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이지만 1951년 후반기가 되면서부터 유엔군이 한반도에 통일한국을 건설할 의지가 있었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6차 공세를 끝으로 중공군의 전력은 더 이상 회복하기 힘들만큼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유엔군의 해-공군, 기갑전력, 포병전력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국 국민과 정부의 간절한 북진의지를 애써 무시하면서 결코 캔사스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을 회복한 유엔군이 전세를 1950년 10월 수준으로 다시 돌려 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군사적 호기를 버리면서까지 북진에 소극적인 일차적인 이유는 또다시 북진을 감행할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할 막대한 희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유엔군의 입장에서 볼 때 설령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중국과 교전 상태였으므로 압록강은 종전의 상징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강을 사이에 놓고 중공군과 장기전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컸습니다. 만일 완승을 위해 만주로 진출하고 나아가 북경까지 진격해도 중국은 거대한 영토를 배경으로 항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중일전쟁을 되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였습니다.
[중일전쟁 당시에도 일본은 중국을 압도하였지만 완전점령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서방세계 입장에서 중공군은 두 번째 적에 불과하며 진짜 적은 소련이라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확대될 경우 소련의 직접 개입 가능성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확전은 6·25전쟁에 미군을 비롯한 서방이 유엔의 이름을 빌려 개입한 최초의 목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북한의 도발로 전쟁이 개시되었지만 이번 기회에 통일을 원하는 한국국민과 한국정부의 바람과 달리 이미 6·25전쟁은 우리의 의사대로 진행되기에는 너무 져버린 전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느덧 이 전쟁에서 완승을 바란다는 것은 전쟁의 성격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KO승이 아닌 판정승으로 명예로운 휴전을 이끌어 내야하고 이를 위해 적이 휴전회담에 응해 올 수 있도록 적당한 수준의 압력만 가하면 될 것으로 미국은 판단하였습니다. 이것은 현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가정하였을 때, 차후 방어에 용이한 감제고지를 확보하여 진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적이 재차 공세를 감행해 오더라도 더 이상 후퇴함 없이 적을 물리칠 능력을 구비해야 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이 대폭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방침은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겠다는 불승불패(不勝不敗)였습니다.
한편 중공군도 1951년 5월, 제6차 공세가 대 참패로 끝나버리면서 현재와 같은 재래식 장비와 군수지원 체제하에서는 결코 유엔군에게 치명타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고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중국도 한반도의 전쟁에 무한정 자신들의 피를 가져다 바치기에 곤란한 상황이 이르렀을 만큼 지난 제4차부터 제6차 공세에서 당한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따라서 제6차 공세 이후 중공군의 작전은 대규모 공세를 지양하고, 자신들이 장기인 야간전투, 근접전투 등을 통해 현상을 유지하는 소규모 작전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중공군도 이런 방식으로 미군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 휴전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중공군이 택할 수 있는 방책 또한 유엔군이 원하고 것처럼 적당한 선에서 체면의 손상을 받지 않고 전쟁을 중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휴전회담에 응하는 것이었고 묘하게도 양자의 이해가 맞아 들어갔습니다. 결국 전쟁의 가장 중요한 세력인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합치됨으로써 휴전은 가시화되면서 협상이라는 정치적인 전쟁으로 6·25전쟁의 성격이 확연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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