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고지 쟁탈전의 시작

구름위 2013. 3. 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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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이 진척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쌍방 모두는 휴전협상 자체를 파국에 빠뜨릴 수 있는 거대한 전면공세는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휴전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한 제한적인 공격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은 공산군 측이 회담을 결렬시키려 할 때 강력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1951년 휴전회담의 시작과 동시에 군사적인 대응 전략이나 전술은 이전과는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대지공격을 펼치는 유엔군 전투기]

  공산군에게 유엔군의 화력은 넘을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임진강 하구-화천 저수지-간성을 연하는 캔사스선(Kansas Line)북방 10~20킬로미터에 와이오밍 선(Wyoming Line)으로 명명된 느슨한 방어선을 설정하여 놓고 있었는데, 이는 내심 휴전선으로 생각하던 캔사스선의 확고한 점령을 위한 전초진지(前哨陣地)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2중의 방어개념은 적이 대규모 공세를 취해올 경우에는 상당히 유효하였지만, 전력을 분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종심 1~2킬로미터 내외에서 단일 고지군(高地群)을 목표로 벌어지는 제한전에서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뒤에 든든하게 설정 된 완충지대를 믿고 적이 공격해 올 때마다 제한적으로 후퇴한다는 것은 이제는 고려하기 힘든 전술이 되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는 와이오밍선의 방어진지를 캔사스선과 동일한 강도로 축성하도록 지시하여 후퇴 없이 와이오밍 선에서 적을 격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그 덕분에 오늘날 휴전선이 애초 계획하였던 화천호-속초선보다 대략 10킬로미터 이상씩 북으로 북상한 현재의 위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저돌적인 밴 플리트의 적극적인 대응전략으로 임시방어선으로 설정된 와이오밍선은 영구진지화 되면서 차후 작전은 이 일대의 고지군 확보를 위한 고지쟁탈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공산군 측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고의로 휴전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동안 대규모 공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아서 적에게 전력 정비의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을 계속 확보하기 위하여 과감한 공세를 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휴전회담장이 포함된 서부지역에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회담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된 제한적인 공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피로 얼룩진 고지쟁탈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고지쟁탈전의 소모전 상황을 알려주는 탄피]


  사실 휴전하였을 경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려는 고지쟁탈전은 이미 전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전처럼 주로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국군의 출혈을 강요시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운동을 약화시키려는 부차적인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국군이 담당한 지역이 지리적인 여건 상 미군지역보다 화력이 약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에 비하여 병력에서는 여전히 열세였으나 화력과 기동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국군이 담당하던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중동부 산악지역에서는 이런 이점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힘들었습니다.


  공격과 방어가 반복되면서 고지쟁탈전은 쌍방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강요하였습니다. 공격하는 병력은 아무래도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노출되고 체력소모가 심하여 상당히 불리한 형국이었지만, 물 한 모금조차 산 아래서 조달하여야 할 만큼 보급의 제한을 극심히 받는 고지를 계속하여 방어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1951년 9월 펀치볼을 공격하던 미 제1해병사단에서 사상최초로 헬기를 이용하여 병력을 기동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헬리콥터는 지상군의 필수장비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헬리콥터는 새로운 전쟁 수단으로 급속히 부각하였습니다.]


  사실 6·25전쟁에서 이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고지전투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 오래가서 이후 오래 동안 고지확보를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작전으로 여기는 시류가 있기도 하였지만, 고지 쟁탈전과 고지위주의 병력배치는 단지 상대에게 휴전을 강요하고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한 상황 하에서 적용되는 특이한 전술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보급이 제한되어 스스로 고립될 수 있는 고지의 점령과 확보는 일반적인 전쟁양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1951년 6월초, 중동부의 산악지역에서 천신만고 끝에 중공군의 제6차 공세를 저지한 국군과 유엔군은 캔사스선 확보를 더욱 공고히 하려 와이오밍선으로의 진출을 개시하였습니다. 지난 공세에서 참혹한 실패를 맛본 공산군은 필사적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은 공산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여 화천과 양구 일대에 커다란 돌파구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당황한 펑떠화이는 계획을 수정하여 소극적 방어대신 국군과 유엔군을 역습하여 붕괴위기에 처한 전선을 신속히 안정시키도록 긴급 지시했습니다.


[바다가 아닌 산악지대에서 해병대의 신화가 써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돌파구 정면에 있는 북한군 제12사단이 펑의 지시로 병력과 장비를 우선 보충 받아, 광치령-대암산-도솔산-대우산을 연하는 산악능선에 배치되었고 이들에게 전선을 사수하도록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북한군은 고지마다 교통호와 엄체호를 구축하고 진지 전방에 지뢰와 부비트랩을 설치해 난공불락의 방어태세를 구축했는데, 그중에서도 요충지는 양구군 동면 팔랑리와 만대리의 경계에 있는 해발 1,148미터의 고지였습니다.


  이곳은 남쪽의 해안분지(亥安盆地 이른바 펀치볼)를 감제할 수 있는 위치로 그 배후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보급 기지가 있는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마치 서울을 해안분지라고 한다면 이들이 점령한 지역은 북한산 같은 위치였는데, 이곳을 확보한자가 당연히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봉우리의 이름이 도솔산인데 일부자료에는 두솔산으로도 표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적막한 이곳에서 하나의 신화가 써집니다.


  당시 이곳으로 진격하던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이었고 가장 전방에 서있던 미 제5해병연대에게 도솔산 점령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 제12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미 제5해병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대신하여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예비로 후방에 빠져있던 국군 제1해병연대가 광치령-대암산-도솔산-대우산 축선을 담당하기로 하면서 국군 해병대가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되었습니다.


[도솔산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대식 연대장, 이후 제3대 해병대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김대식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1해병연대는 6월 4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강력한 방어선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에게 막혀 6월 10일까지도 도솔산을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김대식 연대장은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에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하고 토마스(Gerald C. Thomas) 사단장에게 의견을 건의하였으나, 사단장은 경험부족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연대장의 건의가 집요하리만큼 계속되자 사단장은 반신반의하면서 결국 국군 제1해병연대의 단독 야간작전을 승인하였습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야간에는 공산군이, 주간에는 유엔군이 번갈아가면서 공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였습니다.


  김대식 연대장의 판단은 적중하였습니다. 6월 11일 02시, 방심하고 있던 적을 화력과 조명의 지원도 없이 공격을 가하자,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난공불락의 전진지가 불과 3시간 만에 돌파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차 점령 목표였던 대암산을 신속히 확보하였고 이러한 전과에 고무된 토마스 사단장은 쉬지 않고 도솔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김대식 연대장은 대암산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통로가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1개 대대 단위로 단계별 작전을 계획하고, 6월 15일 아침 제2대대를 선봉으로 하여 3개 대대가 교대하면서 집요하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아직까지 위치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적은 완강히 저항하였지만 욱일승천하던 국군 제1해병연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적은 6월 19일 도솔산을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역사적인 전투가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공격에 실패한 미 제5해병연대를 대신하여 전면에 나선 국군 해병대는 도솔산전투에서 미록 123명이 전사하고, 4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반면 북한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산술적인 성과보다 그보다 더 큰 의의는 요충지인 해안분지남측을 통제하여 추후 공세가 있을 경우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직접 방문하여 해병대를 격려하는 이승만대통령]


  해병대의 5대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 도솔산전투는 바다를 통해 적진에 상륙하는 위험한 작전을 고지에서 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는데, 이것은 이후 한국 해병대의 무한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국군 제1해병연대의 쾌거를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해병대에게‘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휘호를 하사했는데 이것은 이후 해병을 상징하는 구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공산군 측의 지연전술로 말미암아 휴전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협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극동해군 사령관 죠이(Charles T. Joy) 중장과 극동공군 사령관 웨이랜드(Otto P. Weyland) 중장에게 북한의 후방지역 기간시설과 공산군의 집결지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을 감행하라고 지시함과 동시에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는 적에게 적극적인 압력을 가하여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협상을 강요하기 위한 공격을 명령합니다.]


  저돌적이었던 밴 플리트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군 방어선 중 가장 취약지역으로 있던 해안분지(亥安盆地)를 7월 21일 공격하였습니다.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이곳은 사방이 해발 1,200미터 내외의 고지에 둘러싸인 해발 450미터 내외의 분지로 운석의 충돌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지형인데, 남북으로 7.5킬로미터 동서로 5.5킬로미터의 커다란 규모로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화채그릇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른바 펀치볼(Punch Bowl) 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원래 방어에 취약한 이곳을 유엔군은 선점하려 했지만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공격을 유보한 상태였습니다.


  공격이 개시되자 미 제2사단 38연대가 국군 제1해병연대가 탈취한 도솔산에서 펀치볼의 서측방을 공격하여 주요 거점인 해발 1,179미터의 대우산을 7월 27일 탈취하였습니다. 하지만 장마시기와 맞물려 때마침 쏟아진 30년만의 폭우로 인하여 추가 공격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의 고지전에서의 악천후는 아군의 공격도 저지하였지만, 사실 적도 엄청난 곤란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고지전투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지에서 펀치볼을 감시하는 미군 병사]


  한편 미 제2사단의 진격과 더불어 펀치볼 서측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고지인 가칠봉(加七峰)을 향하여 국군 제5사단이 1951년 9월 4일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초전에 제5사단은 북한군 제27사단을 격퇴하고 가칠봉을 탈취하였으나, 즉시 북한군의 역습을 받게 되면서 무려 40여 일 간의 공방전이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벌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 1,000여명을 사살하고 250여명이 포로로 생포하면서  아군이 승리하였으나 반면 692명이 전사하고 4,000여명이 부상당하는 커다란 피해도 함께 입었습니다.


  양구일대의 혈전과 더불어 우측 인제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었습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수동면 사이의 백두대간 서쪽 깊숙한 험준한 산악 지대인 노전평(蘆田坪)은 현재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여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전쟁 전에는 서화계곡을 통하여 남북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이어서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펀치볼 지역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분지 서측의 대우산-가칠봉과 함께 동측의 노전평 지역을 장악해야만 했고 당연히 이곳의 요충지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두고서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국군 제8사단이 노전평 지구에 투입되어 8월 18일 적의 주저항선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공격하였습니다. 당연히 적의 저항도 격렬하였고 수시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를 반복한 치열한 1주일간의 공방전 끝에 북한군 2개 연대를 괴멸시키고 제8사단은 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노전평전투에서 제8사단은 북한군 938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지만 반면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이나 되는 막대한 피해도 입었습니다.


[고지쟁탈전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 북한군 전사자를 바라보는 미군 )


  이 같은 피의 대가를 지불한 노전평전투는 가칠봉전투와 함께 펀치볼의 요충지를 확실하게 아군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으며, 시화계곡의 기동로를 아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 북한군은 서화계곡에서 저항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한 채 북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그 상태로 휴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전투들은 피아 모두에게 극히 제한적인 지역전투에서 발생한 인명손실 치고는 너무도 큰 희생을 안겨주었습니다. 고지를 매개로 한 고지쟁탈전에서의 승리는 오로지 피의 대가를 전제로 한다는 뼈아픈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점은 앞으로 전선에서 계속 반복 될 고지쟁탈전의 특징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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