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자 미 제8군은 지체 없이 공격을 재개하여 공산군을 압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러프너(Clark L. Ruffner) 미 제2사단장은 펀치볼에 대한 공격과 병행하여 이를 감제할 수 있는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도 함께 공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일대를 선점하여 방어에 나선 북한군은 아군의 핵심방어선인 캔사스선과 후방지역을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이점을 살려 아군의 모든 군사 활동을 포격으로 손쉽게 제한할 수 있었지만, 반면 미 제2사단의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의 피해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장차 공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983고지 확보는 필수적인 과제였습니다. 이 고지는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의 중간에 위치한 약 8킬로미터에 이르는 횡격실 능선의 주봉이었는데 능선 전체가 남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북한군의 방어에 상당히 유리한 반면 공격에 나선 아군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곳은 처음부터 피를 부어대지 않고는 점령하기 힘든 위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위험한 임무가 제2사단장의 지휘를 받는 국군 제5사단 36연대가 공격부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983고지를 방어하던 북한군도 이곳의 전술적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어 무려 2개 사단을 이 일대에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들은 고지로 연결되는 능선서측에는 제12사단 1연대를, 동측에는 제27사단 14연대를 나누어 배치한 후, 후속배후에 각 사단의 본진이 대기하는 형태로 철통같이 방어에 돌입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모든 참호를 포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유개호(有蓋壺)화하였고 고지의 후방에는 신속한 보급이 가능하도록 깊숙한 교통호를, 반대로 아군이 진입할 전방에는 5,000여 발의 지뢰를 매설하여 놓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배경과 준비 하에서 983고지 일대의 능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처음부터 워낙 많은 인명피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였고 이를 취재하던 종군기자가 그 참혹함을“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라고 보도하면서 전사에 피의 능선전투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능선을 피로 붉게 적셔 이후 피의 능선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8월 15일부터 고지일대에 대대적인 항공폭격 및 포병사격이 무려 3일간 집중적으로 실시된 후, 황엽(黃燁)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36연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사전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은 북한군은 격렬한 저항을 나섰고 더불어 아군은 적이 매설한 지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습니다. 또다시 엄청난 포격을 가하여 지뢰지대를 개척한 후 야간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험준한 산악 지역에 구축된 요새진지는 화력과 정면공격만으로는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제36연대는 후방으로 우회하여 적을 급습하기로 작전을 변경하였습니다. 우선 능선 맨 우측의 773고지를 공격하는 제5중대에서 특공대를 선발하여 후방 침투를 시도하였는데, 예상대로 전방만 신경을 쓰던 적의 배후를 강타하는데 성공하여 773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같은 방법을 전 공격부대에 즉시 적용시켜 공격 4일째인 8월 21일, 940고지 일대의 능선을 제3대대가 확보하였고, 드디어 8월 22일 11시 30분경 난공불락처럼 버텨오던 983고지의 정상을 제11중대가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엽대령은 공격으로 인하여 손실이 컸던 제36연대를 대신하여 983고지의 방어임무를 미 제2사단이 인수인계 받아 줄 것을 건의하고 이를 타당하다고 판단한 러프너 사단장도 승인하였으나, 막상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공적을 미군이 가로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부대 교체를 반대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고지를 사수할 여력이 없던 제36연대는 8월 26일 02시경에 북한군 1개 연대 규모의 역습을 받고 983일대에 포위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북한군의 역습에 어렵게 점령한 고지를 포기하였습니다.]
(전후 촬영된 북한의 선전사진)
결국 제36연대는 983고지에서 능선 아래쪽인 940고지일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추격해온 적에게 8월 27일 밤에 이마저 내줌으로써 허무하게도 공격 이전은 상태로 회귀하고 말았습니다. 과잉 친절이 불러온 어이없는 결과였고 그동안 흘린 피가 무효가 되어버린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피의 능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 제36연대는 8월 28일 10시부로 제2사단 배속이 해제된 후 후방으로 철수하여 재편성에 착수했고 피의 능선을 재점령하는 임무는 미 제2사단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국군 제36연대가 어렵게 차지한 983고지를 다시 피탈 당하며 피의 능선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나자, 바이어스(Clovis E. Byers) 미 제10군단장은 작전을 처음부터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군이 피의 능선 지역에만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군단 전체가 동시에 정면의 적을 강하게 압박하여 피의 능선 후방에 집중되어 있던 적의 화력과 예비대를 좌우로 분신시킴과 동시에 피의 능선을 재장악한다는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미 제10군단은 새로운 방법으로 반격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8월 31일 06시부터 가용한 전 부대를 전진배치 시켜 일제히 공세에 돌입하였습니다. 미 제2사단 9연대가 국군 제36연대를 대신하여 피의 능선을 공략하였으나, 초전의 모습은 국군 제36연대가 공격당시와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남쪽으로 흘러내린 급경사인 피의 능선은 북에서 남으로 방어전을 펼치기에 너무나 적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예기치 못한 한 가지 문제가 미군의 전투력을 저하시켰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인종갈등을 고려하여 인종별로 단위 부대를 구성하였는데 미 제9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로 940고지 공격에 나선 제9연대 3대대는 흑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투 경험이 부족하였던 데다가 대대장의 돌격명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만큼 군기가 문란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돌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분노한 미 제2사단장은 제3대대장을 해임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미 육군에서 흑인만으로 구성된 대대를 해체하고 흑인 병사들을 각 부대에 균등하게 재배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부대 내에서 보이지 않던 인종 간 의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9월 초순에 접어들어서도 피의 능선에서의 공격은 지지부진했고 함락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인내를 가지고 공격을 계속 가하여 능선 배후 공략에 성공하자 바이어스의 예상대로 서서히 적의 저항도 둔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피의 능선 좌측에서 국군 제7사단과 우측의 미 제38연대가 협공을 가하자 자연스럽게 983고지의 북한군은 후방이 차단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9월 3일, 은밀히 철수 해 버렸고 미 제9연대는 9월 5일 14시경 983고지를 무혈점령하였습니다.
[미군은 피로 얼룩진 983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피의 능선전투에서 국군은 전사 및 실종 154명, 부상 816명이, 후속한 미군이 전사 및 실종 587명, 부상 1,216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더불어 밴 플리트가 전쟁 발발 이래 가장 많은 포격을 실시했다고 하였을 만큼 무려 41만여 발의 어마어마한 포탄을 소모하였습니다. 결국 능선하나를 탈취하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인명과 물자가 투입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고지쟁탈전의 소모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지표이고 결코 효과적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휴전회담이후 6·25전쟁은 좁은 곳에서 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제8군은 1951년도 8월 중순부터 펀치볼 및 피의 능선지역에서 실시한 하계공세를 펼쳤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상당히 고전을 했습니다. 특히나 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예상을 뛰어넘는 피해가 동반된다는 사실은 이후 작전을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는 휴전을 염두에 둔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 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킬 목적으로 맹조의 발톱(Talon's)이로 명명된 작전계획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건의했습니다.
개요는 원산부근에 대규모 상륙 및 공수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의 배후를 절단시킴과 동시에, 지상군이 전선을 김화-금강산-장전선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으로 지난 1950년 10월의 감격스러웠던 북진이후 처음으로 입안된 야심만만한 공세작전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인명과 물자의 손실이 심각한 고지 쟁탈전을 회피하면서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어 전선을 대폭 북상시켜 일직선으로 정리하면 다급해진 공산군이 휴전 회담장으로 이끌려 나올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중하였던 리지웨이는“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안길 경우, 오히려 휴전회담에 장애가 될 것이라”라고 판단하여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지상 작전만 승인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계속하여 고지쟁탈전을 몰입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밴 플리트는 적극적인 공세를 제안하였으나 아쉽게도 기각 됩니다]
( 1950년 10월 원산에 상륙하였던 미 제1해병사단 이것은 6·25전쟁 중의 마지막 공세기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
하지만 밴 플리트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고지전투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워낙 많은 전투다 보니 맹조의 발톱 계획이 기각 당하자마자‘추계작전계획’으로 단지 이름만 바꾼 공세계획을 유엔군 사령부에 재차 건의했습니다. 일주일도 안 되어 대규모의 공세작전계획을 보고 받는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의 집요함에 놀랐으나, 또다시 상륙 및 공수작전을 거부하면서 야심만만하게 수립하였던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전황을 고려한다면 밴 플리트의 생각은 성공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 합리적인 계획으로 설령 통일은 힘들더라도 전선을 거의 39도선까지 걷어 올릴 수 있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로 인하여 내키지 않는 고지 쟁탈전에 계속 매달리게 된 제8군은 소극적인 지상작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피의 능선일대를 무혈점령한 미 제2사단 23연대에게 아군에게 밀려나 5~10킬로미터 북방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929고지 일대를 공격하라는 후속 명령이 9월 12일부로 하달되었습니다. 공격에 나선 미 제2사단은 북한군이 피의 능선에서 철수한지 불과 1주일밖에 되지 않아 제23연대가 929고지 일대를 손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929고지의 조기 점령을 낙관하였으나 이곳은 다시 피로 얼룩집니다.]
하지만 그곳은 도망간 북한군이 허겁지겁 급조하여 구축한 방어선이 아니라 지난 8월 이후 피의 능선일대에서 국군 제36연대와 미 제2사단의 연이은 공격으로 전투가 격화되자 이미 그때부터 후퇴를 고려하여 배후에 종심 깊게 구축해 놓았던 강력한 방어진지였습니다. 그리고 9월 3일 은밀하게 피의 능선을 포기하고 병력을 후퇴시켜 새로운 후방방어선으로 이동 전개하여 놓았고, 추격한 아군이 이를 공격하기로 하자 이곳은 피의 능선 못지않게 피로 물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929고지 일대는 남에서 북으로 해발 800~9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진 험준한 종격실 능선이었습니다. 이 일대의 전투를 취재하던 종군기자 카터(Stan Carter)가 전방대대에 설치된 부상병 후송 대기소를 방문하였을 때, 한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Heart Break)같다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도하여 이를 보도하였는데, 이와 같은 연유로 이 능선은 단장의 능선(Heart Break Ridge Line)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횡으로 연결된 피의 능선과 달리 미 제23연대는 칼날처럼 남에서 북으로 연결된 좁은 능선을 따라 공격할 경우, 북한군의 종심진지를 하나하나 점령하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예상되므로 동쪽에서 능선의 중앙을 단절시키는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먼저 단장의 능선 동측에 있는 엄호진지를 확보한 후, 능선 중앙에 있는 855고지를 동측방에서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능선을 절단한 후 분리된 북한군의 진지를 각개격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12일 사태리 계곡 동측의 엄호진지를 점령하자 계획대로 작전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지전투 중 부상을 당한 모습]
9월 13일, 제23연대는 예정대로 능선 중앙의 855고지를 향해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저지되었습니다. 피의 능선전투에서 있었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이었고 결국 같은 방법으로 피를 쏟아 부어야 이곳을 점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전차까지 동원한 맹렬한 공격을 펼친 끝에 공격 7일 만인 9월 18일 야간에 고지를 겨우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지를 점령하여 능선의 북한군 진지를 2개로 분리시켰지만 북한군이 문등리 계곡을 통하여 계속 증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능선을 완전히 점령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인명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고 점점 피의 능선전투와 같은 모습으로 상황이 바뀌어 갔습니다. 이처럼 전황이 악화된 가운데 9월 20일 새로 미 제2사단장으로 부임한 영(Robert N. Young) 소장은 협소한 능선에서의 정면공격을 포기하고 서측에 전개되어 있던 미 제2사단 9연대를 단장의 능선 서측으로 투입하여 전투지역을 확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29고지를 점령하지 못하였고 지난 2주간의 작전에서 제23연대를 포함한 미 제2사단은 1,670여 명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당하였습니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제2사단장은 작전을 중지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받은 제8군은 엄청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래 고지하나를 두고 2주 동안이나 공격을 거듭하고도 점령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을 중지시킨 영 사단장은 원인분석에 나서 전투력을 축차투입 했고, 포병화력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절치부심한 그는 항공정찰을 통해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험준한 문등리 계곡일대에 전차의 운용 가능성을 발견하고, 공병대로 하여금 고방산~이목정~문등리간의 도로 보수를 검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명령을 받은 공병대대장은 현지를 세밀히 정찰한 결과 충분한 시간과 엄호가 보장된다면 도로를 보수할 수 있다고 사단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미 제2사단은 회심의 반격작전을 준비합니다.]
공병대대장의 보고에 고무된 사단장은 전차운용을 포함하는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터치다운(Touch Down) 작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지난 공격에서 얻지 못한 점수를 2차전에서 만회하자는 사단장의 의지가 담긴 작전명칭 이었는데, 작전의 내용은 10월 5일, 사단 전체가 정면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동안 제23연대가 929고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전차대대를 적이 생각하지 못했을 문등리로 진출시켜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각 연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전선을 북상시킨다는 필승의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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