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의 설정이 타결된 후, 다음 의제인 제4항‘포로 송환’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제네바 협정’이라는 국제적인 룰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따르면“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해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고 여기에만 충실히 따르면 포로와 관련된 제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정부의 최초 원칙은 “제네바 정신에 입각하여 공산군측의 포로들을 즉각 송환해주고, 유엔군 포로를 조기에 송환 받는다”로 정해졌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많은 포로가 발생하였고 이것은 휴전협상의 난제가 됩니다.]
그런데 북한군 포로를 신문한 결과 많은 이들이 “원래 자신은 한국군이었는데, 포로가 된 후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되었으므로 북한으로 갈 이유가 없다”는 진술이 계속하여 나오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더불어 전쟁 초기의 서울 점령 3개월 동안 강제 징집된 많은 장정들도 포로가 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쟁 전에 민간인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많은 중공군 포로들이 자신들은 원래 국민당(國民黨)군이었는데 국공 내전 시 포로가 되면서 강제로 6·25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타이완(臺灣)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보낸다는 것이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도저히 용납 될 수 없는 사항이었으므로 제네바 협정에 따른 송환만 생각하던 미국정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엔군의 포로들의 안전한 귀환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유엔군측은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가 13만 정도인 반면, 공산군측에 포로가 된 유엔군이 약10만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었으므로 1:1 동수교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엔군 포로 전원을 송환 받는 대신 귀환을 원치 않는 공산군측의 포로는 남겨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유엔군도 공산군측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 관한‘소위원회’협상 개시 후 일주일이 지난 1951년 12월 18일, 포로 명부를 교환한 유엔군측은 경악하였습니다. 당시까지 유엔군측이 파악하고 있던 행방불명된 아군인원은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총 10만 여명에 가까웠으나, 공산군측이 넘겨준 포로명부에는 11,559명밖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이 제출한 132,474명의 명단이 자신들이 추산하던 188,000여명에 비해 작다고 하면서 불만을 제시하는 적반하장을 연출하였습니다.
포로의 숫자에 대하여 쌍방 모두 만족하지 못하였지만 당연히 우리측의 불만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대한 북한측은 국군 포로 중에서 북한군에 자원입대하겠다는 이들이 많아 이들을 모두 북한군에 편입했기 때문에 포로가 적은 것이라는 옹색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공산측은“포로는 거주지 기준이 아닌 체포당시의 부대를 기준으로 하여야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이것은 남한 지역주민 46만 여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병력과 노무자로 활용한 사실을 스스로 시인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단 자유송환을 추진하지만 협상이 결렬되면 강제송환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처럼 포로의 숫자가 차이가 많이 나자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협상에 임하는 유엔군측 대표들은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라는 두 개 요소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도 여기에 대해 적당한 훈령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줄다리기가 계속된 휴전협상 광경 ( 1951년 11월 1일의 모습 ) ]
3개월이 지난 1952년 2월이 되었을 때 서방측 언론에서 서서히 여론을 환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지는 유엔군의 파병목적을 고려하고, 또한 자유민의 인권 수호를 위하여 유엔의 명예를 걸고 포로들의 완전한 자유송환을 관철하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워싱턴도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산군측의 비현실적인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고 나설 수 없었던 것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공산군측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공산군 포로는 아군이 반격을 개시한 1950년 9월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통일이 목전에 보여 획득된 포로를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평양, 인천 등지에 임시적으로 분산수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의 양태가 바뀌고 장기화 조짐이 보이자 획득된 포로들을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방의 부산으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에 집결된 포로는 14만 여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것은 10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이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하지만 부산은 유엔군의 물류 거점이자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곳에 잠재적인 위험이 큰 대규모의 포로들을 집결시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부는 거제도에 새로운 포로수용시설을 세워 순차적으로 포로들을 이곳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전쟁 전에 거제도는 12만 여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10만의 피난민과 14만의 포로가 몰려들면서 식수가 모자랄 정도로 섬 전체가 북새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신현리 독봉산 기슭의 계곡에 밀집된 형태의 수용소가 마련되었는데, 이처럼 좁은 구역에 시설이 집중되다보니 경비가 용이하였던 반면 포로들의 집단행동이 가능하게 되어 버렸고 이것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국군 경비병과 북한군 포로사이의 벌어지는 사소한 충돌 외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협정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미군의 관리방침 때문에 국군 경비병들의 근무환경보다 오히려 포로들의 급식과 주거여건이 더 좋은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것은 결국 포로들의 조직적인 집단행동이 벌어지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어느덧 포로들은 단지 총기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지휘체계와 조직체계를 갖춘 무력조직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휴전회담이 진척되자, 수용소는 조속한 송환을 요구하는 친공(親共)집단과 송환거부를 주장하는 반공(反共)집단으로 크게 나뉘어 충돌이 일상화되는 단계까지 비화되었고, 1951년 9월 초순에는 인민재판이 열어 반공포로 15명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특수요원들을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게 하여 수용소에 잠입시켰고 이들의 주도로 공산포로들을 조직화하여 반공포로들을 살상하는 등 후방지역의 분란을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제도 수용소는 대한민국 영토 최후방에 조성된 북한군의 해방구처럼 변모되어 갔습니다.
[국군 경비병이 압수한 사제 무기들]
휴전회담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군사분계선 확정 문제보다 자유 송환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오히려 포로문제가 휴전의 걸림돌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유 송환을 막기 위해서 송환심사를 거부하라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공산포로들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이 과정에서 55명의 포로가 사망하고, 162명이 부상했으며, 소요를 진압하던 미군도 1명이 사망에 38명이 부상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의 폭동은 1952년 5월 6일 포로수용소장 돗드(Francis T. Dodd)가 인질이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불러왔습니다.
결국 미군은 포로들과 협상을 벌여 합의각서로 만들어 주는 굴욕을 겪은 끝에 돗드의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신임 소장 콜슨(Charies F. Colson)이 서명한 각서에는 ①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하였음을 시인한다. ② 포로의 송환문제는 판문점 결정에 따른다. ③ 포로들의 강제심사는 없다. ④ 포로의 대표단 조직을 승인 한다 등의 내용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 각서는 순식간 판문점 북한측 대표에게 전해져 포로문제 협상에서 유엔군 대표단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신임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은 책임을 물어 부임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콜슨을 5월 12일부로 해임하여 전임 수용소장인 돗드와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같이 엄청난 일들이 반복되면서 1951년 1월에 수용소 개설 후 그해 9월까지 모두 8명의 수용소장이 교체되었는데, 사실 이처럼 포로수용소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너무 인권을 내세웠던 잘못된 운영정책에 기인한바 큽니다.
[폭동 주도혐의로 연행되는 이학구]
결국 신임 수용소장 보트너(Hayden L. Boatner) 준장은 실력행사에 들어가 6월 1일~10일 사이에 무장 병력을 수용소 내부로 진주시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강제로 분리시킴과 동시에 밀반입하여 숨겨놓은 수많은 무기들을 수거했습니다. 이로써 지난 1년간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준비하였던 포로들의 폭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포로의 관리체계는 새롭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휴전반대로 얻고자 한 것
1952년 12월 13일, 국제적십자사가 전쟁 종결과 상해포로의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을 만큼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열망은 커져 갔고 더불어 환경변화가 이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말에 있었던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공약이행 의지를 보이고자 취임 전인 1952년 12월 2일~5일, 한국을 전격적으로 방문함과 동시에 소련과의 물밑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 당시 국군 수도사단을 방문한 모습)
그리고 1953년 3월 5일, 스탈린(Joseph V. Stalin)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소련의 정권도 교체되는 공산권측의 격변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정권을 인수한 말렌코프(Georigi M. Malenkov) 주도의 소련 신정부는 3월 19일, 북한과 중국에 전문을 보내 전쟁 중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1953년 2월 22일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을 제의하였을 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공산군 측은 이처럼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자 3월 28일 김일성과 펑떠화이 공동명의로 부상포로를 교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통보하면서 태도를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4월 20일~5월 3일까지 판문점을 통해 부상포로들의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유엔군은 6,670명을 공산군측에 인계하고, 684명을 송환 받았습니다.
유엔군측의 일관되고 강력한 자유송환원칙 주장에 공산군측도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6월 4일,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송환거부포로 관리위원회’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심사와 기타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난제였던 포로송환의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휴전은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한국정부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는데, 그 이유는 포로송환협상 안이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의 즉각 석방을 주장한 한국정부의 의견이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한국은 휴전회담 대표를 소환시키고 휴전회담 불참을 선언하였습니다.
[석방된 반공포로의 모습]
비록 이승만 대통령은 일관되게 분단을 고착화 시킬 수 있는 휴전을 반대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었지만 포로 송환문제가 타결되자 휴전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포로송환 협정 조인 이틀 전인 6월 6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청와대로 불러, 반공포로를 석방을 지시하였습니다. 밀명에 따라 작전을 입안한 원용덕은 6월 18일 24시, 미군들을 따돌리고 광주, 마산, 부산, 영천, 논산 등의 각 지구 수용소를 경비하던 육군 헌병대로 하여금 수용된 반공포로 석방 작전을 펼치도록 조치하여 성공시켰습니다.
수용소 주변에서 사전에 통지를 받았던 국민들과 행정기관들은 탈출한 포로들을 보호하여 미군 당국의 검거와 재수용이 실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 석방된 반공포로는 수용된 35,698명중 27,000여명이었는데 19일 06시에는 중앙방송을 통하여‘반공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여 공식화하였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에 미국은 경악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한국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즉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도 성명을 통하여 유감을 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격한 반응을 보인 곳은 공산군측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정되어 있던 휴전회담 실무협상 등 모든 회의를 취소하였으며, 6월 20일 본 회담에서 김일성과 펑떠화이 명의의 서한으로 비난하였을 만큼 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회담이 결렬되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휴전협상을 거의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고 있을 때 한국정부가 휴전을 격렬히 반대하고 나서자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지만 전쟁 당사자인 한국정부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하기도 곤란하였습니다.
한국정부의 반응이 워낙 완고하자 미국정부는 대통령 특사로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한국에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한국 측에 제시하여 묵시적인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① 휴전 성립 후‘상호방위조약’체결, ② 장기간의 경제원조 제공, ③ 20개 사단으로 한국군을 20개 증편 등을 약속하였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우리의 안보를 지켜 준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정부는 휴전 자체보다 그 이후를 염려하였습니다.]
( 휴전반대 집회 모습 )
사실 이승만대통령이나 한국 정부도 휴전이라는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정부가 걱정하였던 것은 휴전 이후의 문제였습니다. 어떠한 후속 안전보장 조치 없이 분단만 계속 이어진 상태로 단지 총을 쏘지 않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이 확고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휴전반대를 적극 이용하였던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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