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휴전회담이 재개될 때면 묵시적인 관행에 따라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져들고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예상보다 휴전회담이 장기화되자 1952년 이후로 전선은 피아모두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거쳐 확보한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 형태로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결국 언제인지는 전쟁의 종결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인식되었고 다만 전쟁이 멈추었을 때 상대보다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이 모색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대미를 장식할 대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특히 회담지연 전술을 적절히 활용한 공산군측은 이 시기에 전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53년 봄이 되었을 때 공산군은 중공군 135만 명, 북한군 45만 명 등 총 180만 명의 대병력과 각종 장비를 전선에 배치시켰는데, 이것은 6·25전쟁 발발 이래 최대의 병력 수준이었습니다. 결심만 한다면 지난 1951년 초여름의 제6차 공세이후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있던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종전에만 급급하였던 유엔군으로서는 이에 맞선 전력증강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이 건의한‘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 계획’의 조속한 추진에 나섰는데, 이것 또한 엄밀히 말해 국군이 북한의 도발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력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을 염두에 둔 조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953년 5월 1일에는 현리전투로 해체되었던 제3군단이 재창설되었고, 6월 18일까지 제26, 27사단이 신편 됨으로써, 국군은 휴전발효 직전에 총 3개 군단 18개 사단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이던 6월 8일, 포로송환협상이 타결되면서 휴전이 현실화 되자 공산군측은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고 선전하고 한국정부의 북진주장과 휴전반대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유엔군의 반격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인 공세를 감행하고자 했습니다.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국군이 전담하고 있는 전선을 노렸고 이때 공세지점으로 결정된 곳이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던 화천북방의 금성돌출부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국군 담당지역 중에서 지형이 특히 험하여 기갑 및 화력지원이 취약하다고 판단된 곳이었습니다.
[금성돌출부에서 중공군의 제7차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밤, 1개 군의 중공군이 국군 제5, 8사단 일대를 집중 공격하였으나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국군의 효과적인 지연에 막혀 9일간 13킬로미터 정면에서 4킬로미터를 남진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유엔군도 현 전선을 그냥 인정 할 것이라 판단한 공산군측은 작전이 성공한 것이라 만족해하며 6월 18일 전후로 예상 되는 휴전협정의 조인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변수가 생겼습니다. 6월 18일 자정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27,000여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되면서 조인 직전에 있던 휴전회담은 중단된 것이었습니다.
선전효과를 노렸던 공산군측의 의도는 일거에 좌절되었고 상황은 급속히 냉각되었지만 공산군측은 휴전회담 자체를 깨려하지 않았습니다. 작전 자체가 휴전을 염두에 두었을 만큼 공산군측고 휴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자존심 문제라 생각한 중공군은 지난 51년 5월, 제6차 공세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화천저수지의 재점령을 목표로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중공군의 대병력이 이 일대로 집결되면서 긴장이 높아지자 클라크는 휴전을 염두에 두고 일본으로 빼놓았던 미 제24사단과 제187공수연대를 한국으로 황급히 재배치했습니다.
7월 13일 밤, 지난 6월의 제한적인 공세와는 비교가 안 되는 5개 군의 대병력이 국군 제2군단의 금성 돌출부지역을 강타하면서 6·25전사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중공군의 제7차 대공세가 게시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하여 금성을 양익포위 하여 전면에 배치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테일러(Maxwell D. Taylor) 제8군사령관은 포위를 거부하고자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조정하여 아군의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과 미 제9군단이 적근산과 백암산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7월 16일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이 중공군의 공세 여력이 바닥이 나자 아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7월 19일에 다시 금성천과 북한강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마지막 공세로 전선을 남하시켰으나 엄청난 피해를 겪었습니다. ]
중공군이 패주하자 국군은 금성천 북방으로 재진출하려 하였으나 휴전을 염두에 둔 유엔군사령부의 제지로 마지막 혈전은 거기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국군 제2군단은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에서 피탈당한 지역의 절반정도만을 회복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지만 중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무려 6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의 마지막 혈전이자 국군의 마지막 전과로 전사에 기록되었습니다.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쟁의 제1당사자인 한국정부가 휴전을 반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이동풍 같은 공산군 측과 2년간 밀고 당기며 어렵게 협상을 마무리 짖게 되었지만 막상 같은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이 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호헌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많은 희생을 보았음에도 막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완전한 분단이 계속 이어지는 휴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대의명분상으로 타당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표면적으로 휴전을 반대하였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음은 한국정부가 오히려 잘 알고 있었고 더불어 휴전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결사반대를 외친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재발 방지와 관련한 문제였습니다. 1953년 7월 초순까지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는 이에 대해 심각한 이견(異見)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949년 미군 철군 후 곧바로 북한의 침략을 받아 패망의 위기에 까지 몰렸던 한국 정부의 뼈아픈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휴전 후 미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한다 하더라도 중공군은 압록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북한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그런 우려를 충족시켰습니다.
결국 미국이 특사를 파견하여 상호방위조약처럼 전후 안전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 주고 더불어 대부분의 현안이 합의되자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나름대로 실리를 취하면서도 명분상으로 마지못해 이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겉으로 보여준 우리정부의 단호한 모습이 공산군측을 상당히 불안하게 만들었고 특히 휴전 조인직전에 보여준 반공포로 석방은 그런 의구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따라서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에‘한국정부로 하여금 정전협정을 이행하도록 하는 대책’을 집중적으로 요구하였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측이 이슈화하고 있는 서해의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은 막상 군사분계선 설정 시 해군력이 압도적이었던 유엔군이 스스로 이 이상 북으로 올라가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오히려 공산군측을 안심시켰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 만큼 유엔군은 휴전성립을 위해 한국 정부를 안심시킴과 동시에 공산군측을 달랬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공산군측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국으로부터 차후 안전보장 책을 얻어낸 한국정부의 당시 행태는 전략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해리슨과 남일]
이처럼 공산군측은 내면적으로 미국보다 휴전에 더욱 매달리던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동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비극적인 전쟁을 벌인 대가로 얻게 된 소득이라는 것은 어느덧 감내하기 힘든 선까지 다 달은 엄청난 피해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선에서 실질적인 군사행동은 거의 중단되었고 포로의 인도 장소와 정전협정의 조인 장소 문제만 남아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거듭한 양측은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정전협정의 조인 일자를 7월 27일로 조정하여 당일 22시를 기해 전면 발효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10시 양측을 대표한 유엔군측의 해리슨 장군과 공산군측의 남일은 조인 장소에 착석했습니다. 그리고 인사도 교환하지 않은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된 협정서에 10시 12분 조인을 마치자마자 해리슨은 헬기를 타고 문산리로 향했으며, 남일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 회담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까지 상대 진지를 향한 마지막 포격과 폭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의 전폭기들은 북한의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더 감소시킬 목적으로 북한의 비행장, 철로 등을 강타하였으며 해상에서 해군의 군함들이 함포사격을 실시했습니다. 그 만큼 상대가 너무나 미웠던 것이었습니다.
[휴전직후 비무장지대 설정 전 군사분계선에서 대치 모습 ]
그리고 정각 22시가 되자 한반도 전역에서는 포성이 멎었고 마침내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던 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종전이 아닌 말 그대로 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쟁의 끝이 아닌 엄연히 전쟁 중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어느 일방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곧바로 확전이 될 수 있는 불안전하고 어정쩡한 미완의 평화였습니다.
6·25전쟁은 이 땅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쟁 전에 남북을 가르던 희미한 38선은 오히려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파인 굵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의 폐허만을 거머쥐고 남북한의 감정과 이념대결이 더욱 격화됨으로써 평화통일의 기대는 더욱 멀어져 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3년 동안 파괴와 희생만 부르고 결국 원위치로 되돌아 온 것뿐이었는데 그로인한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쪽도 명확하게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남겨진 피해는 너무 컸습니다. ]
그렇지만 지난 3년간 피를 바치면서 혈전을 벌여왔던 양측 모두는 전쟁이 멈추자 자신들이 이겼다고 맹렬히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전쟁을 계속하기는 곤란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까지 함부로 내팽겨 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세계최강의 미국에게 역사상 첫 패배를 안겨주며 남한의 북침을 저지하여 북한이 승리한 전쟁’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고, 남한정부의 전복을 막아 자유를 수호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의 대가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작은 한반도에서 3년을 넘게 계속된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는 참혹한 전화(戰禍)를 경험하였습니다. 전선이 남으로는 낙동강까지, 북으로는 청천강 및 함경도 일대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였기 때문에 국토의 대부분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봐야했을 정도였고, 특히 주인이 수차례 바뀐 서울에서 38선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참혹한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국토는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전사상 당한 국군과 유엔군의 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화력의 열세를 인해전술로 메우는 전술을 사용하던 북한 및 중공군은 약 2백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후방의 민간 또한 이에 못지않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은 100만여 명, 북한 150만여 명 등 250만여 명의 인원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전 남북한을 합친 총인구인 2,500만여 명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더불어 320만 명의 피난민과 3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등은 그야말로 사회적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수준이어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간인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더불어 소중한 개인의 재산은 물론 해방직후 미미하나마 존재하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마저도 송두리째 파괴되었는데, 이로 인한 재산적 손실만도 당시 가치로 32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습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외침에 의해 국가가 멸망당한 최악의 경우도 있었지만, 6·25전쟁은 피해를 단순히 수치로만 계량화한다면 한민족 5천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고 참혹했던 재난으로 인정하는데 결코 이의가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남북 서로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 주장을 떠나 전쟁의 결과는 남북한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남북한 모두가 전쟁을 전후하여 인구의 재배치가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한은 전쟁 중 대규모의 북한인구가 자진 월남함으로써 인적자원 면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이동은 해방 및 분단 직후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별개의 상이한 체제를 택하였던 남북간의 경쟁에서 어느 체제가 인간을 존중하였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명확한 바로미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체제에 반대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진 월남함에 따라 공산정권으로서는 전쟁 전 보다 쉽게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반사 이익도 누렸습니다.
외적으로 북한은 제2차 대전 후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과 전쟁을 치름으로써 제3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서방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화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어 1958년에 이르러 모든 생산수단이 완전히 국유화되어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외적으로 드러난 성과는 오늘날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 이르게 될 만큼 급전직하 추락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피난민의 이동은 한반도의 인구분포를 바꿀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대폭 들어난 인구의 대부분이 중부권에 집중됨으로써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시기의 인구 집중과 달리 단지 전란으로 인한 피난민의 증가는 의식주 해결에도 벅찰 만큼 힘든 환경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960년대까지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민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은근히 이어져 내려오던 봉건주의적 마지막 잔재가 무너지고 시장경제 질서에 급격히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초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한 반공이념을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우리 현대사 최악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대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당시 세계의 변방이었던 극동의 한반도를 넘어 무한정 커져 갔습니다. 우선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5대륙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파견하였고,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은 최대 130여만의 대군을 한반도에 진주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외견상 직접 무력개입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조종사를 은밀히 참전시켰던 소련이나 미국의 명령에 의해 소해정을 파견하였던 일본 그리고 의무대처럼 비전투 부대를 파견한 여러 나라를 합하면 6·25전쟁은 무려 30여 개국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거대한 국제전이었습니다.
[6·25전쟁은 거대한 국제전이었습니다(에티오피아 병사들)]
이처럼 6·25전쟁이 순식간 국제적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국제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곧바로 시작된 숨 막히는 냉정이 처음으로 열전으로 비화된 곳이 바로 한반도였습니다. 때문에 전 세계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그들과 전혀 상관이 없던 한반도의 국지전에 뛰어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정치적으로 세계 질서를 휘 젖는 유엔의 5대 상임이사국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 의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냉전체제의 구축과 군비경쟁의 신호탄이 6·25전쟁은 참전 및 관련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려 500억 달러가 넘는 전비를 투입하고 연인원 180만여 명의 병력을 참전시켜 14만여 명에 이르는 인원피해를 입었던 미국의 참전이유는‘아시아에서 미국을 시험해보기 위한 공산주의의 도전’을 처음부터 물리쳐야 된다는 전략적 시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참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미국이 승패를 확실하게 결정짓지 못한 최초의 전쟁이 되었고 이 때문에 미국국민과 군인, 모두에게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도적으로 유엔군을 이끌고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유세계의 리더의 자리에 올랐고 이를 기화로 이후 베트남전쟁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분쟁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결정책은 한때 소련과의 무한경쟁을 벌여왔지만 1991년 소련 붕괴 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위치를 점하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냉전체제가 더욱 공고화 되었습니다.](베를린에서 군사대치 중인 미군과 소련군)
반면 미국의 맞상대였던 소련은 전쟁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을 만큼 전쟁 시작의 실제 당사자이면서도 얻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국과 북한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공산권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는데, 중국을 전쟁에 끌어 들여 미국과 동시에 약화시키려는 책략을 꾸몄다는 의심까지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휴전 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중국과는 적대적 관계로 서서히 변하여 1960년대 들어서 중소이념분쟁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후 건국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참전하여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본 중국은 국력을 급속히 소모하여 경제 재건이 늦어졌고 많은 서방국가와 적대관계가 되어 20년 동안 유엔에 가입할 수 없었을 만큼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반면 1958년 중공군을 북한에서 모두 철수시켰지만 어느덧 북한에서 소련이 위치를 대신할 만큼 영향력을 넓힘과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제3세계의 리더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분단국이었던 대만의 장개석은 6·25전쟁으로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습니다. 사실 6·25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분쟁을 벌일 곳은 타이완이었고 만일 그랬다면 미국이 굳이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에 관여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하는 전략적 조치를 취하였고 이 덕분에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6·25전쟁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나라입니다(1951년 폐허 속에서 속속 재건되는 도쿄)]
하지만 타이완이 입은 혜택은 일본에 비한다면 세발의 피였습니다. 6·25전쟁으로 가장 큰 수혜국이 된 나라는 이의가 없는 일본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일본의 재건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일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분단을 면하였던 것부터가 일본에게는 행운이었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의 후방기지와 병참기지로 변모하면서 급속히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수상이던 요시다는‘천우신조’라고 기뻐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 거대했던 규모에 걸맞게 6·25전쟁의 성격은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해석됩니다. 대표적으로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한 집단안보 수호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한반도 내에서 해방이후 지속되어온 이념적 갈등의 연장이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반면, “내전에 대한 강대국의 개입이다”이라는 전혀 상반된 의견 또한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6·25전쟁은 원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반도 내부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발생한 국제전적 내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이론과 달리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쟁을 벌이겠다고 마음먹은 자들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엄연하고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쟁 개시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할 대상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전쟁의 종결이나 휴전은 상당히 힘든 과정이지만 개시는 순간의 선택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전쟁을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는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북한이 남침할 수밖에 없게끔 당시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일부 수정주의시각이 회자될 정도로 6·25전쟁과 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개시되었다는 점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결국은 전쟁은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자가 일으키는 것이므로 전쟁을 시작하였던 북한과 이를 비호하였던 소련 그리고 직접 참전하여 비극을 만들어낸 중국의 책임은 역사에서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습니다.
또한 3년 1개월 2일간의 짧지 않은 전쟁을 결과 면에서 본다면‘국내적으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란’이었다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의 도움도 되지 않고 오로지 피해만 안겨준 참사였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수많은 피와 재물을 받쳐가며 조금이라도 얻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막판에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외치던 당시 한국정부의 입장이 명분상으로 맞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 만큼 감내하기 어려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면 적어도 통일을 이루거나 그에 준하는 위치까지는 달성하여야 하는 것이 심정적으로 맞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얻은 것은 없고 오로지 잃은 것 뿐 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처럼 희생당한 반대급부로 불안정했던 세계질서가 6·25전쟁을 통해 공고한 냉전체제를 구축하면서 역설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제2차 대전 후 들불처럼 세계 각지에서 타올라갔던 공산주의의 팽창을 꺾어 버리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과 달리 북한의 제 1후견인인 소련이 직접 개입을 꺼렸던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했지만 무려 2,000만 명이 희생당하고 유럽 러시아일대가 초토화되는 끔직한 악몽을 겪었고 아직 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최대한 회피하려 들었습니다. 따라서 6·25전쟁이후 보다 확고하게 대립하며 벌어진 냉전기간 동안 비록 첨예한 체제경쟁을 수반하였고 핵의 위협에 세계는 숨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직전에 있었던 제2차 대전 같은 초유의 사태는 막아내었습니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국제적으로 비화되었지만 세계대전을 예방한 전쟁이 되어버린 셈이었습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산이 여섯 번 이상 바뀔 만큼 어느덧 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되었고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의 제 1관계자였던 소련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고 가장 많은 피를 흘리며 대적하였던 중국과는 수교를 맺어 첫 번째 교역 상대국이 되었을 만큼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냉전으로 통칭되던 국제 사회의 갈등 또한 과거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허리는 휴전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6·25전쟁 당시 보다 더 많은 군대와 무기가 서로를 향하여 대치하고 있습니다. 휴전은 결코 전쟁의 끝이 아니므로 6·25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잊고 있었지만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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