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6.25,,,피로 얻은 승리 그리고 교훈

구름위 2013. 3. 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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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은 지난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예하 지휘관들에게 이번 작전은 3개 연대가 동시에 공격하기 때문에 북한군은 병력과 화력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없고, 전차대대가 문등리 일대의 후방을 교란하면 적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시기를 이용하여 일제히 공격하면 터치다운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공격전에 철저한 사전준비를 지시하였습니다.


 

[단장의 능선 인근 전선으로 이동하는 미 제2사단 9연대]


  이에 따라 공병대대는 전차소대의 엄호 하에 진격로 정비를 시작하였고 각급 부대도 훈련에 돌입하였습니다. 미 제2사단은 항공사진을 통해 식별된 적 진지를 표시한 후, 각개 병사들의 개인행동까지도 미리 점검시키는 치밀한 대책을 마련하여 이에 맞게 반복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제2사단은 10월 5일, 미군으로는 보기 드물게 달도 없는 칠흑과 같이 어두운 심야시간인 22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초기의 공격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약간의 돌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병사들이 야간 공격에 미숙하다보니 길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적에게 위치를 노출시켜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정면을 압박함과 동시에 후방지역에서도 기습을 가하여 계획대로 적을 혼란시켜 버렸고 동이 틀 무렵에 원한에 가득 찬 단장의 능선의 929고지 정상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지난 제1차 공격에서 2주간의 공격에도 끄떡없던 고지위의 적의 요새가 단 한 번의 야간 공격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치다운작전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사전에 공병대가 개척한 진격로를 통하여 제72전차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기동부대가 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 전차가 지뢰지대를 돌파하고 진격해올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북한군은 당황하였고 순식간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산악능선에서 남쪽정면에 방어력을 집중하던 북한군들은 미군 전차부대가 후방에 나타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분산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점령된 고지위에 남겨진 적 시신]


  이처럼 배후를 차단한 제72전차대대는 적 후방을 완전히 돌파하여 10월 11일, 문등리 북방 4킬로미터 지점의 하심포까지 쾌속 진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심포 일대에는 연이은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전투력이 고갈된 북한군 제5군단을 교대하기 위해 중공군 제204사단이 남하하여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들을 발견한 제72전차대대는 중공군을 기습하였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중공군은 산악능선으로 분산하여 패주하여 버리면서 후방이 완전히 비워졌습니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은 일제히 돌격으로 전환하여 10월 15일, 서측의 백석산 북쪽 1220고지로부터 단장의 능선의 855고지와 펀치볼 지역의 가칠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을 완료하면서 작전을 대성공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결과 미 제10군단은 단전선의 요철부분을 완전히 정리하게 되었는데, 휴전 시까지 이 지역에서는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유엔군 못지않게 공산군의 피해도 컸는데 확인된 북한군 및 중공군 전사자만 해도 1,473명 이었을 정도였고 이를 환산한다면 약 10,000여명이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곳에 투입되었던 북한군 제5군단은 휴전 시까지 전선에 재투입되지 못하였을 만큼 회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참화를 당하였습니다. 공산군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부터는 산악지역의 재래식 전투에서도 막강한 화력을 지닌 유엔군을 당해 낼 수 없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리지웨이의 의도대로 10월 25일부터 그 동안 중단되었던 휴전회담의 본 회담이 재개 되었습니다.


 

[고지전투는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 후방으로 이송 대기 중인 부상병들 )


  반면 피의 능선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를 연이어 경험한 국군과 유엔군은 산악에 구축한 강력한 진지를 화력만으로는 격파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포로 심문결과 공산군은 아군의 포격이 있으면 후사면의 진지에 대피했다가 포격이 중지되고 아군이 돌격하면 다시 전사면의 진지로 이동하는 방법으로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빈 산위에 포탄을 가져다 버린 꼴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지공격작전은 정면공격과 더불어 후방을 우회기습하거나, 교란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파로호를 장악하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과 수입면에 걸쳐 있는 해발 1,124미터의 백석산 일대는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전형적인 강원도 두메산골로 서측에는 북한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남측에는 파로호(화천호)가 동에서 서로 북한강과 연결된 곳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전선이 남쪽으로 심한 만곡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미 제10군단은 좌측을 담당한 미 제9군단과의 연결을 단축시키고 동시에 우측에 있는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에서 고군분투하던 미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백석산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전선을 단축하고 파로호를 완벽하게 확보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켜야 했습니다.](1951년 5월 파로호와 화천댐의 모습)


  당시에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는 국군 제7사단이었는데, 장마가 끝난 8월 18일부터 피의 능선을 공격중인 미 제2사단과 보조를 맞추어 서서히 북상을 개시하였습니다. 제7사단은 9월 16일에 백석산 남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772고지(일명 마가터)를 점령하고, 이어서 9월 18일에선 백석산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883고지(선의대)를 점령하는 등 계획대로 주변 고지들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7사단은 그 동안 장기간에 걸쳐서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부대재편이 요구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석산 점령은 진지를 인계받을 제8사단이 담당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단장의 능선을 공격 중이던 미 제2사단이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곳에 집중되어 있던 적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이어스 미 제10군단장은 백석산의 탈환 없이는 단장의 능선지역에 몰려있는 적을 분산시키기 어렵다고 결론내리고, 9월 22일 진지교대를 앞두고 있던 국군 제7사단에게 즉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로써 후방으로 빠질 준비를 하던 제7사단은 황급히 공격준비를 갖추어 9월 24일부터 백석산 공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지원 포격과 함께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예하 제8연대가 서측능선으로, 제3연대가 동측능선을 따라 9월 25일부터 양면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간에 걸친 공세 끝에 백석산의 정상부근까지 도달하였지만 제7사단은 그동안 너무 지쳐있던 상태여서 점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9월 28일부로 임무를 노전평 지역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한 국군 제8사단에게 인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때 백석산을 담당하던 북한군 제5군단 32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어 같은 날 북한군 제12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습니다. 이로써 백석산은 피아 양측 모두 새롭게 충전된 부대들이 정면에서 격돌하는 결전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아군의 폭격과 포격에 북한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었지만 만일 백석산을 아군에게 피탈당하면 10킬로미터 후방인 해발 1,277미터의 어은산까지 후퇴하여야 하기 때문에 백석산을 지켜야 한다는 북한군의 의지만은 상당히 컸습니다. 최영희(崔榮喜) 제8사단장은 좁은 능선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면 적들도 전투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고 서측에 제26연대, 중앙에 제16연대, 동측에 제10연대를 배치하여 3개연대가 9월 30일 06시 동시에 공격에 나섰습니다.


  대대적인 포격이 백석산 정상과 후사면을 강타하였고 뒤이어 공격제대가 정상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공격제대가 적진지에 접근해 갈수록 적의 저항은 강렬해 져서 목표를 불과 200미터를 남기고 공격이 돈좌되었습니다. 최영희 사단장은 서두르지 않고 일단 정상 인근에 급편진지를 편성하여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다음날 아침, 항공기가 적의 진지를 강타한 틈을 타서 2개 대대가 좌측 봉우리와 우측 봉우리를 동시에 공격하여 마침내 10월 1일 12시경 백석산을 점령하였습니다.


 

[백석산을 점령하면서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되었습니다.]


  제8사단은 백석산 점령을 공고히 하기 위해 10월 6일부터 백석산 북방으로 내려와 어은산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10월 28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인 북한강변 동측의 삼막골-슬구내미-1090고지(어은산 남쪽 2킬로미터 부근)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공격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후 제8사단은 어은산을 지척에 두고 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진지강화에 힘쓰게 되면서 이때 확보한 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화천댐과 파로호는 확실하게 아군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1951년 11월 27일 열린 휴전협상에서 현재 양측이 접촉하고 있던 임진강어구-판문점-철원북방-금성남방-문등리-가칠봉-고성남방의 전장 237킬로미터의 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고 1개월간 한시적인 정전을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 양측의 생각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엔군은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했던 군사분계선 문제가 타결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방심하였지만 반면 공산군은 이때를 전력의 열세를 최대한 만회하는 절호의 시기로 삼았습니다.


 

[완벽하게 구축된 진지에 엄폐된 중공군 전차]


  결국 1개월의 잠정휴전기간은 공산군 측에게 유엔군의 공습을 걱정하지 않고 벌건 대 낯에도 마음 놓고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하였습니다. 공산군의 진지는 참호와 교통호가 완벽하게 구축되면서 그동안 유엔군의 우위를 보장하였던 공군력과 화력의 효과가 급속도로 반감되었습니다. 비록 공산군 측도 협상이 파국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인 휴전시도보다는 시간 지연에 몰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협상과 고지전이 계속 병행되었습니다.


  특히, 1952년 들어 포로에 관련한 협상에서 이견이 커지면서 휴전이 난망한 상태로 보이자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에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위한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습니다. 이때 전선 중앙인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395고지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그저 그런 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395고지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에 자연스럽게 놓이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만일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橄制) 하에 놓이면서 중부지역의 많은 통로를 아군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395고지의 모습]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는 1951년 10월 17일 미 제3사단과 교대한 국군 제9사단이었고 395고지 북쪽 후방의 효성산에 위치한 중공군 제42군은 이곳을 되찾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1951년 11월 3일, 1개 대대의 규모의 중공군이 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이를 쉽게 격퇴하였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1월 5일 21시를 기하여 증강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군 제29연대 1대대가 진지를 사수하지 못하고 후퇴함으로써 395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군의 반격도 즉시 이루어져 제28연대가 하루 만에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전초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이 일대는 소강상태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약 1년이 지난 1952년 중반기에 중공군이 최정예로 평가되던 제38군으로 교체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군은 북쪽 전방에 있는 봉래호 수문을 폭파하여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킴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0월 1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중공군 제38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에서 벌어졌던 고지전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395고지를 놓고 무려 10일간 쉬지 않고 벌어진 전투는 12차례의 쟁탈전을 통해 고지의 주인이 7회나 바뀌었습니다. 이곳을 반드시 지켜내어야 할 당위성을 잘 알고 있던 아군의 불같은 인내력은 3배나 많았던 중공군은 무참히 녹여버렸습니다. 국군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적 사살 8,234, 추정살상 6,098명, 포로 57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공군 제38군은 완전히 소멸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국군은 계속하여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전략적인 작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우의 시신 옆에서 고지를 사수하고 있는 국군' 이런 모습으로 백마고지를 지켜내었습니다.]


  작전기간 중 중공군은 총 55,000발, 아군은 총 219,954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격을 이 작은 고지에 집중시켰는데 이것은 단기간의 지역전투로써는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예입니다. 전투 결과 395고지 정상은 풀 한 포기 남아있을 수 없는 민둥산으로 변하였고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여 이 후부터 395고지일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이끈 제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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