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개시된 휴전회담

구름위 2013. 3. 1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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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참전이후 1951년 5월 말까지 총 6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감행하였지만 그들의 부족한 능력으로 화력의 우위를 점한 유엔군을 결코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중국은 감내하기 힘들었고 이를 뼈저리게 직시한 마오쩌둥은 38선 인근에서 현 상태 고수를 위한 소규모 작전만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6월 중순부터 공산군의 전술은 지구전(持久戰)으로 전환하였고 내심 유엔군 측으로부터 휴전제의를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은 더 이상 유엔군의 화력을 감당하기 힘들어 휴전을 생각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미국은“휴전을 통하여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고, 최종목표인 한반도에서의 통일국가 수립은 유엔을 통해 계속 추구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한 직후였는데, 이때부터 미국은 소련과 막후접촉을 통해 휴전회담 개최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1951년 6월 13일~14일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 부주석 까오강(高岡)을 모스크바로 불러 휴전문제를 협의했는데, 마오는 까오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스탈린과 의논에 임하라고 하였을 만큼 휴전에 적극적인 의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6월 27일, 당시 소련 외무차관이었던 그로미코(Andrei Gromyko)가 공산군 측을 대표로 휴전회담에 응하겠다는 공식적으로 답변을 함으로써 이제부터 전쟁은 휴전정국으로 급속히 바뀌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본국으로부터 예비교섭을 지시받자마자 전선을 책임지던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현 전선에서 공격을 정지하라”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전략변화와 거의 동시에 아군의 진격도 멈추었습니다.


  유엔군 측은 6월 30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군 측에게 최초 회담일시와 장소에 대해 제안하면서 당시 극동군 해군사령관이었던 조이(Turner C. Joy) 해군중장을 수석으로 하는 5명의 대표단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에 공산군 측은 7월 1일 북경방송을 통해 김일성과 펑떠화이 공동명의로“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고, 7월 10일~15일 사이에 회담을 개최하고 싶다”는 답변을 하였고 이에 따라 본 회담 성사를 위한 연락장교간의 역사적인 예비회담이 7월 8일, 개성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회담성사만을 염두에 두고 중립지역이 아닌 공산군 측 점령지역인 개성으로 장소를 동의하였던 점은 이후 두고두고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예비접촉 당시의 모습]


  키니 공군대령을 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 연락장교단은 개성에 도착하여 회담장에 입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신경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키니 일행은 전쟁 전에 여관이었던 회담장에 들어가자마자 공산군 측의 안내도 받지 않고 남쪽을 향하는 좌석에 먼저 착석하여 홈 코트의 공산군 측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회담장을 중립지역이 아닌 곳으로 동의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습니다. 왜냐하면 동양의 관습에 의하면 강화 회의장에는 승자가 자신의 세력권으로 패자를 불러 강화회담을 하면서 패자는 북쪽을 향하는 좌석에 않도록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연락장교단은 이를 선전에 이용하려던 공산군 측의 허를 찔렀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승자가 패자에게 베푸는 자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다과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완전히 실무적인 형태로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유엔군과 공산군의 회담에서는“국제관례에 따른 외교의례는 일체 불필요하다”라는 묵계가 성립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군사정전위원회회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신경전 끝에 사전 협의가 시작되어 대표명단을 교환하고 이어서 본 회담을 7월 10일 11시에 개성에서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공산군 측은 본 회담 시 유엔군 대표단의 통행을 위해 개성 동쪽 10킬로미터 지점인 판문점 전방에서 개성까지의 도로를 개방하기로 하였고 대표 5명을 제외한 기타 인원은 백색완장을 두르고 왕래한다는 내용을 합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길은 지금의 도라산에서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옛길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산군 측은 남일(南日) 북한군 총참모장겸 부수상을 수석으로 하는 5인의 대표단을 우리 측에게 통보하였습니다. 이로써 휴전협상을 위한 양측 대표단이 직접 대면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7월 10일 아침, 유엔군 측 대표단은 헬기와 차량 편으로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도착하여 북한군 측에서 제공한 교통편으로 갈아타고 회담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차량이 움직이는 동안 앞에서 안내하는 북한군 장교가 만세를 부르는 시늉을 하였는데, 북한 측은 이를 사진 찍어‘항복한 유엔군’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는 치졸한 방법을 썼습니다. 공산군 측의 작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 회담장의 공산군  측 좌석은 남향의 높은 의자로 유엔군 측 좌석은 북향의 낮은 의자로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항복하러 온 패전국 대표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연출하기 위한 술수였고 당연히 유엔군 측은 여기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산군 측은 휴전을 위한 회담과정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회담장소인 개성 여관에서 잠시 휴식중인 공산군 측 대표단 모습 ]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웃지 못 할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회담 탁자에 앉자마자 유엔군 측은 작은 유엔기를 탁자에 놓았는데 반면 공산측은 미처 국기를 준비하지 않아 무척 당황해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랴부랴 오후에 유엔군 측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높은 북한 국기를 탁자 위에 놓았고, 이후 양측이 깃대 높이기 경쟁에 돌입하여 마침내 깃대가 천장에 닿게 되자 합의를 통해 이러한 무의미한 자존심 경쟁을 끝내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그만큼 휴전회담은 하나부터 열까지 치열한 또 하나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첨예한 신경전을 보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회담장에 마주앉았지만 처음부터 회담이 잘 되었을리 없었습니다.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으나 협상에 임하는 양측의 자세부터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협상의제, 휴전감시방법, 전쟁포로 등 군사적인 문제만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라고 주장했지만, 공산군 측은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 외국군 철수 등을 우선적으로 토의하자며 정치적인 주장을 앞세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공통의제로 떠오른 군사분계선마저 우리는 현 전선보다 북쪽을, 북한 측은 전쟁 전의 남북 분계선인 38선을 주장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회담장 출발 직전 리지웨이의 환송을 받는 휴전협상 대표단]


  처음부터 이렇게 난항을 겪은 것은 휴전회담을 철저하게 정치적인 대결의 장으로 만들고자하는 공산군 측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대표단만 해도 유엔군 측은 정치에 관여해 본 일이 없는 순수한 야전 군인들로 구성하였지만, 반면 공산측은 군복을 입었지만 정치경험이 있는 자들로 선발했을 정도였고 더구나 회담을 실질적으로 막후에서 지휘하던 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형식상 마오쩌둥에게 회담의 전권을 위임한 것처럼 하였지만 회담장소를 최초에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공해상의 덴마크 병원선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공산군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회담을 벌이도록 전문으로 통해 지시하였을 만큼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이러한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제1차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유엔군은 1개월간의 전투중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로 몇 주일이면 회담이 완전히 끝나고 휴전에 이를 것으로 낙관적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설전 끝에 7월 26일에야 총 5개항으로 구성된 토의의제를 겨우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의제선정은 이제부터 말로써 싸울 범위를 선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렇게 겨우 합의를 도출한 제1차 휴전회담은 이후 2년간 계속되는 지루한 마라톤의 출발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토의의제 중 제 2항에 규정한 군사분계선 설정이었습니다. 전쟁이전 남북 간 분계선이었던 38도선을 주장하는 공산군 측과 해-공군의 우세를 반영해 오히려 현 접촉선 보다 아군의 전략적인 공격 범위에 노출 된 북쪽에 분계선을 설정해야한다는 유엔군 측과 주장이 팽팽히 맞섰고 결국 8월 23일, 공산군 측이 일방적으로 회담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첨예한 회담 이면에는 이런 모습도 간혹 있었습니다.

회담장 밖에서 단소를 나누는 유엔군 헬기 조종사와 북한여군]


  이에 유엔군은 군사적 압박을 가하여 공산군을 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낸다는 방침을 수립하고, 또한 차후 예상되는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려기 위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양구 지역의 해안분지(이른바 펀치볼),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백석산 등지를 점령했고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월비산을, 중부지역에서는 국군 제2사단이 금성의 서남쪽 후방까지 진출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금성천과 교암산을 점령했습니다. 결국 아군의 행동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공산군 측은 결국 회담 재개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엔군은 회담장소의 불리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당시 접촉선인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어룡리의 널문리 마을로 장소변경을 주장하였고 회담 재개가 다급해진 공산군 측이 개성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회담성사가 어려워 질것으로 예측하여 여기에 전격 동의함으로써 이곳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만큼 1951년 초가을에 있었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아군의 압박은 전사에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공산군 측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군사작전이었습니다.


[널문리의 임시 회담장, 이후 이곳이 판문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곳은 널문리 마을 초입에 있던 주막 앞은 사방이 탁 특인 평범한 콩밭이었는데 여기에 텐트를 치고 회담이 재개 되었습니다. 이곳은 단지 남북 간 군사 접촉선에서 평평하게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는 중간지점으로 어느 일방도 사전에 매복하고 있다가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기는 힘들다는 지리적인 이유만으로 선정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널문리의‘널’자를 교전당사국중의 하나였던 중국어로 표기할 수 없어 이를 의역하여‘널문리 주막’의 한자어 표기인 ‘판문점(板門店)’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바뀌었고 세계적으로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지명이 되었고 아쉽게도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결렬 2개월만인 1951년 10월 25일, 판문점에 급조된 천막에서 휴전회담은 재개되어 두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해 다시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어차피 의제 제1항은 회담을 위한 의제선정이었기 때문에 군사분계선 설정이 실질적인 협상의 시작인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있었던 회의를 통해서 상대방의 주장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두 달간의 정회기간 동안 쌍방은 각각의 양보 안(案)을 내심 마련하여 두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양측 모두는 어차피 자신들의 주장대로만 군사분계선이 획정되기는 힘들 것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고 당연히 휴전 성사를 위해 차선책을 준비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휴전회담을 취재하는 양측 종군기자들의 모습]

 
  해-공군 전력의 절대적인 우세를 반영하여 현재의 접촉선보다 북쪽에 경계선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유엔군 측의 주장은 물론 공산군 측의 38선 주장은 각각 철회되었고,‘현 접촉선을 기준으로 하여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것으로 사전에 양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고도(古都) 개성이 쌍방 모두에게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지역으로 대두되었습니다. 고려왕조의 500년 도읍지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성이 우리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개성은 전쟁 이전부터 38선 남쪽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최고 산업이었던 인삼의 집산지라는 점도 이곳을 포기하기 힘들도록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이곳을 차지하면 군사적으로 서울의 방어종심(防禦縱深)을 보다 깊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개성이라는 도시 하나만을 놓고 보면, 그 지리적 위치가 남으로 임진강을 배후에 두고 북으로 송악산을 비롯한 거대 고지군이 도시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막상 도시를 차지를 하여도 방어는 상당히 불리한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개성을 탈환할 수 있었지만 이후 대치상황을 고려하여 이곳까지의 진격을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해석한다면 공산군 측에게도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지역인 개성은 전선이 서서히 고착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계속 눌러앉아 차지하기 쉬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휴전이 이루어졌을 때 북한주민들에게“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개성만큼은 점령 하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1930년대 개성의 모습, 도시 뒤의 북쪽에 거대한 고지가 도시를 감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되 개성을 남쪽에 포함시키는 대신 중부의 금성과 동부의 고성지역을 약간 후퇴시키는 안을 북측에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북에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오히려 서부의 옹진과 연안반도를 양보하는 대신에 개성은 물론 중동부의 요충지인 피의 능선 및 펀치볼 일대의 지역과 동해안의 돌출부를 공산군 측에 반환하라는 역 제의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성은 휴전이 되었을 때 양측 모두가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지역이었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유엔군의 지휘부는 개성을 양보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개성을 고집하다가 회담 자체가 결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너무 명분만 강조하여 방어에 불리한 개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반대급부로 더 많은 것을 북한 측에 양보하여야 한다는 냉정한 계산도 깔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당연히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거듭한 군사분계선의 설치안은 “현재의 접촉선을 변경함 없이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라는 내용에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재의 접촉선을 언제 시점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협상 당시의 접촉선을, 반면 유엔군 측은 휴전을 조인하는 바로 그 시점의 접촉선을 주장하였습니다. 양측이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역시 개성이었습니다. 공산군 측은 유엔군이 편리한 시기에 군사력을 이용하여 개성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경우 공산군이 지연전술을 사용하여 회담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적 압력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도“군사력의 사용을 묶어 둔다면, 결코 공산군과 협상이 이루어 질 수 없다”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지도위에 표시하는 모습]


  하지만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공산군 측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채근하였고 그 결과 유엔군이 개성을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어 회담의 성사를 유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11월 23일 격론 끝에  군사분계선 문제는 일단 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로문제 등 앞으로도 산적한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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