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끝나고 아군의 반격이 얼추 끝나가던 5월 초, 교통의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일대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공산군 측 군수물자의 수송량이 눈에 띠게 증가되고 있음이 포착되었습니다. 더불어 포로를 심문한 결과, 지난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곧바로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는 첩보도 입수되었습니다. 이런 각종 정보를 분석한 결과 전선에는 중공군 54만, 북한군 20만이 배치되었고 더불어 만주에는 후속투입 될 75만의 예비 병력이 주둔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이 전선에 집결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은 또 다른 대규모 공세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습니다. 공산군은 지난 제5차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지만 신속한 보급과 증원으로 전력을 조속히 재편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중공군의 전술과 보급 능력을 고려한다면 6월초나 공세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앞당겨 질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도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느 규모의 공세보다 클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반면 당시 유엔군 27만, 국군 23만으로 구성된 아군은 수적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고, 다만 화력으로 병력의 부족을 만회해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정립된 이러한 패턴은 휴전 때까지 계속하여 이어지게 될 6·25전쟁의 패러다임이기도 하였습니다. 제5차 공세를 물리쳐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밴 플리트는 적의 재 공세가 있다면 현 전선에서 후퇴 없이 적을 저지하여 고착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적에게 밀려 다시 남으로 철수한다면 간신히 꺾어놓은 적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게 되고, 이것은 차후 예상되는 휴전협상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시소처럼 이제까지의 한차례 씩 공세와 방어가 오고가던 반복상황을 그는 끝내려 하였습니다. 이제 아군의 전략은 중공군이 공세를 하면 지연하면서 후퇴하다가 적이 약해지면 반격한다는 소극적 개념에서 현 전선에서 후퇴 없이 적을 막아낸다는 적극적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지난 중공군의 제4차, 제5차 공세를 통하여 일주일 정도만 방어선을 지켜내면 적을 반드시 물리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220여 킬로미터의 전 전선에 참호가 깊게 파여지기 시작하였고 배후에는 강력한 포병전력이 구축되었습니다. 더불어 진지를 고수하며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물자가 비축되었습니다.
[유엔군도 전력을 정비하여 공산군의 공세에 대비하였습니다.]
공산군의 대공세는 조만간 예상되어 있었고 아군도 이에 대한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처럼 초조와 긴장으로 고요해진 전선은 어느덧 폭발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기까지는 유엔군 측이나 공산군 측 모두가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군이 어느 방향으로 공세를 취하려 하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던 중공군의 의지에 딸려있는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대공세라 하더라도 전 전선을 일거에 밀어붙이기는 힘들었습니다. 대개 전선의 일각을 돌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전선 전체에 부담을 안겨 주면서 후퇴를 유도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중공군이든 아군이든 즐겨 사용하던 전술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번에 예정된 공세에서 중공군이 어디로 주력을 집중하여 공세를 개시하려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엔군은 이를 예측하는데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5월 중순에 공세가 감행될 것이라는 시점에 대해서는 미 제8군사령부는 정확히 예측하였지만 주공방향은 지난 제5차 공세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5월 초 항공정찰 결과와 포로 진술에 의하면 공산군의 새로운 공세는 중-동부의 산악지역에서 감행될 것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적의 페인트 모션으로 보아 묵과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부는 미 제3사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비전력을 서부전선으로 대거 이동시켰습니다.
[유엔군은 예비전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
이처럼 제8군이 오판하여 서부전선 강화에 주력하자 국군 6개 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중-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밴 플리트는 중-동부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의 전력도 약한데다 국군이 산악지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선다면, 설령 예상과 달리 적의 공세가 그쪽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엔군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이곳으로 주력을 지향하려는 데는 지난 수차례의 공세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령관 밴 플리트나 미 제8군사령부의 판단과 달리 중국 지원군사령관 펑떠화이는 국군이 담당하던 동부전선에 커다란 돌파구를 형성시킴으로써 서부전선의 후퇴를 유도하려 하였습니다. 펑은 전임 제8군사령관이자 현 유엔군 총사령관인 리지웨이처럼 서울이라는 상징적인 목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중-동부전선에서 한국군 사단들을 격멸하여 배후를 차단하면 자연히 서부전선을 고립시킬 수 있고, 그렇다면 지난 제1, 2, 3차 공세 당시처럼 미군을 일거에 섬멸하거나 적어도 멀리 밀어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펑떠화이는 동부전선을 노렸습니다.]
펑은 지난 제4, 5차 공세를 통해 단지 병력만으로 결코 화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음을 뼛속 깊이 통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미군의 화력은 현재의 중공군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미군이 담당하고 있던 서부전선으로의 정면 돌파는 중공군이 더 이상 고려하기 힘든 전략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그동안 너무 많은 피를 미군의 화력에 의해서 날려버린 상태였고 더 이상 그렇게 하기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과 기동력이 제한되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전력이 약한 국군 부대들을 공격함으로서 화력과 기동력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지난 여러 차례의 공세를 통해 중공군은 국군을 상당히 만만하게 보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지난 2월 제4차 공세 당시에 중공군은 횡성을 돌파하면서 국군 제8사단을 궤멸시킴과 동시에 국군 제3사단을 일거에 몰아내어 심각한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그리고 4월 제5차 공세에서 국군 제6사단을 사창리에서 붕괴시킴으로써 서부전선에서 선전하고 있던 아군을 곤혹스럽게 만든 경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선의 몰락을 막아낸 것은 지평리를 사수한 미 제2사단 23연대와 가평에서 피로써 중공군을 무참히 격퇴시킨 영연방 제27여단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결국 중공군은 방어선 전체를 국군이 담당하여 유엔군의 즉각 증원이 어려운 중-동부로 주공을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1차 목표로 삼은 아군 부대는 신남 지역에 배치된 미 제10군단 예하의 국군 제5, 7사단과 현리 지역에 배치된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3, 9사단 등 4개 사단이었으며, 2차 목표로 동해안지역에 배치된 수도사단과 제11사단도 포함시켰습니다. 당시 국군은 총 10개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중 6개 사단이 홍천 북방 자은리로부터 동해안까지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즉 중공군은 단 한 번의 공세로 국군의 6개 사단을 모조리 섬멸하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미군을 회피하고 국군을 상대로 하여 전쟁에 올인 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중공군은 국군이 전담하고 있던 동부전선을 노렸습니다.]
이러한 중공군의 전략은 국군에게 있어 굴욕이었지만 사실 그런 빌미를 우리가 제공하였습니다. 지난 수차례의 공세에서 국군은 중공군의 꽹과리, 피리 소리에 놀라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망 다니는 행태를 반복하였습니다. 미군은 군우리전투나 운산전투처럼 초기에는 망신을 당하였지만 이를 재빨리 극복하였던 반면 국군은 중공군 등장이후 지금까지 교전을 포기하는 행태를 반복하여 유엔군 사령부를 난감하게 만들고는 하였습니다. 개전 초부터 현재까지 북한군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국군은 이상하리만큼 중공군에게 무기력한 모습을 무한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싸우다가 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중공군 그림자에 놀라 총을 팽개치고 도망 다니는 국군의 모습을 미군은 대놓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만약 중공군의 계획대로 이번 공세에서 국군의 6개 사단이 일거에 붕괴된다면, 중-동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져 중-서부 전선의 유엔군의 안전을 결코 장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의도대로 휴전회담이 진행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당시에 공산군은 중공군 3개 병단과 북한군 4개 군단 등 총38개 사단을 보유하였는데, 이 가운데 신남-현리 일대의 국군부대를 포위섬멸하기 위해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3개 군단 등 총 18개 사단을 동원되었습니다.
[공산군은 공세준비를 완료하였습니다. ]
서쪽의 중공군 9개 사단이 국군 제3군단 좌측에 위치한 국군 제7, 5사단과 미 제5사단 지역을 돌파해 오마치, 계방산, 속사리 방향으로 진격함과 동시에 동측에서 북한군 9개 사단이 국군 제3, 9사단 지역을 돌파해 배후에서 중공군과 연결함으로써 3중의 엄중한 포위망을 구축하려 계획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산군은 주공이 3중 포위망으로 국군 제5, 7, 3, 9사단을 일거에 격멸시키는 동안 12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조공이 서부전선의 미군을 현 위치에 잡아놓고, 나머지 8개 사단이 중부전선에서 여주 방향으로 돌파하여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분리함으로써, 서부의 유엔군 부대가 주전장인 중-동부 지역으로 지원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피의 공세가 개시되다
1951년 5월 16일 16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고 엄청난 포탄이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 진지에 작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숨 막히던 긴장감을 깨고 피로 얼룩진 중공군 제6차 공세가 드디어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제7사단은 예하 제8연대를 서측 전방에, 제5연대를 동측 전방에, 제3연대를 예비로 운용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전방의 연대들이 엄청난 포연 속에 파묻혀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에 소속이었지만 소양강 남단을 방어선으로 하여 군단의 가장 우측을 담당하면서 우측으로 국군 제3군단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이 사용한 야포 * 사진출처-LIFE)
중공군의 포격으로 제7사단은 초전에 통신시설이 파괴됨과 동시에 후방의 포병대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어 화력지원 체계가 마비되었습니다. 2시간의 포격이 그치고 서서히 포연이 걷혀가자 엄청난 중공군이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해왔습니다. 무시무시한 사전 포격에서 살아남은 제7사단 장병들이 최초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으나 연이어 중공군의 제파공세가 이어지자 더 이상 방어진지를 사수하기 힘들었습니다.
중공군은 제20군 예하의 3개 사단과 제27군 예하의 3개 사단 등 무려 6개 사단을 집중하면서 순식간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제7사단 5연대는 진지 안으로 밀려들어온 중공군과 백병전을 펼치며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후방의 연대지휘소마저 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단장은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미 제5연대는 분산되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좌익을 담당하고 있던 제8연대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후퇴하는 아군과 진지를 돌파하여 앞으로 내달리는 중공군과 뒤섞일 정도로 전선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후방에서 예비로 있던 제3연대에게 철수하는 전방 연대를 엄호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해서 주요고지 위주로 병력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비워버린 계곡사이로 중공군이 진출하여 제3연대마저 적중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7사단을 가르며 쾌속의 진격을 계속한 중공군 제12군 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가 5월 17일 07시 30분경에 후방의 오마치(오미재) 고개를 점령했습니다. 불과 12시간 만에 최초 진격선에서 직선거리로 30킬로미터를 주파한 것인데,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그것도 심야에 시간당 평균 2.5킬로미터 속도로 진출한 경이적인 전과였습니다.
[중공군의 산악돌파 능력은 경이적이었습니다.]
오마치고개는 당시에 미 제10군단 관할 하에 있던 고개 길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우측에 있던 국군 제3군단의 유일 후방통로였습니다. 무주공산이던 오마치고개가 이처럼 아침에 한개 중대에 의해서 순식간 점령당하였지만 후속하여 산길을 뛰어온 중공군이 시간대별로 증강되기 시작하더니 그날 밤 중공군 제60사단 전체가 고개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 역사상 국군 최대의 참패를 불러오는 무서운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오마치고개가 점령당하던 그날 오후에 후방의 침교 일대를 중공군 제81사단이 거의 동시에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의 좌측은 적이 치기 시작한 2중의 포위망에 갇혀버렸습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전히 공고화하려는 중공군의 공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제12군이 가장 좌측의 국군 제5사단을 가르고 외곽지역을 크게 돌아 속사리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중공군 제12군은 자은리 일대로 진격하여 내려왔는데, 정보 분석을 오판하여 국군 제5사단 담당지역이 아닌 보다 좌측인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출몰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외곽으로 돌아 3번째 포위망을 구축할 예정이던 중공군 제12군은 미 제2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출이 저지되었습니다. 특히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미 제2사단 38연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지만 진내포격을 하는 초강수까지 두어가며 적의 진격을 물리치는 괴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것이 지평리전투와 더불어 미 제2사단사에 빛나는 승전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벙커힐전투입니다.
[벙커힐전투는 공산군 전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은 처음에 계획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는데, 만일 미 제2사단 38연대의 놀라운 분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현리전투결과를 추정하여 보았을 때 만일 공산군의 완전한 3중 포위망이 완성되었다면 6.25전쟁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전을 넘어 강원도 인제의 골짜기는 대학살극의 현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만큼 벙커힐전투의 의의는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중공군 공세의 일부를 막아내었을 뿐이었습니다.
좌측에서 남하한 중공군의 공세와 더불어 동시에 우측으로 내려와 포위망을 연결할 부대는 북한군 제5군단 예하의 4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해발 1,519미터의 가리봉일대를 통과하려다가 국군 제3군단의 우익인 제3사단의 집요한 저항에 방어선을 뚫지는 못하였습니다. 제3사단은 험준한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5월 17일까지 4배나 많은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모두 격퇴시킴으로써 정상적인 방어 편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가 제3사단이 현리전투에서 보여준 모든 것이었습니다.
[제3사단이 북한군을 막아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김종오 제3사단장은 좌측에 인접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으로부터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차단당하였다는 비보를 통보받았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한마디에 퇴로의 차단을 우려한 사단장은 현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선전하고 있던 전방연대에게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일거에 국군 제3군단의 몰락을 불러오게 되었는데, 사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벙커힐전투의 미 제2사단처럼 철저히 현 진지를 사수하는 것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김종오는 지난 북진 시에 그가 지휘하던 국군 제6사단을 아군부대 중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착시키는 영광을 얻었지만, 부지불식간 출현한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초산에서 부대가 무참하게 붕괴 당하였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포위에 대해서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유일 후방 통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산 당시에는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으니 알아서 탈출하라는 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설령 포위되었어도 결사적으로 방어에 임한다면 적을 물리칠 가능성은 충분하였습니다. 물론 고립방어 전술이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많은 위험을 감수하여야 하지만, 공세 능력에 제한이 많다는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나서는 상당히 효과를 많이 보았던 전술이기도 합니다. 화력과 공군력을 발판으로 하여 유엔군은 지난 지평리전투, 가평전투에서는 물론 바로 같은 시기에 좌측에서 벌어진 벙커힐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었습니다.
[지난 북진 당시에 당한 악몽이 너무 커서 퇴로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제3사단이 고립방어를 포기하자 이제부터 상황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아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제3사단이 철수하자 뒤 쫓아 내려온 북한군 제5군단이 가리봉일대까지 진출하였으면서도 정작 험준한 산악지역을 넘지 못하여 오마치의 중공군 제20군과 연결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더불어 북한군 제5군단의 동쪽 외곽에서 남진하던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도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방대산 일대의 산악통로가 차단되지 않았고 이것은 이후 각개 분산되어 도망치던 국군 제3군단 패잔병들의 유일 탈출로가 되었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북한군의 무능은 계속되었습니다. 태백산맥 일대와 동해안을 담당하던 3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 제2군단이 한계령과 설악산의 중간지점으로 공세를 펼쳤는데, 이 지역은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이 강력히 방어하던 곳이었습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처음부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면서 좌절되었습니다. 결국 국군 제3군단의 동측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속사리 일대에서 거대한 포위망의 한축을 구축하려던 북한군 제5군단과 제2군단의 진출이 이처럼 연속으로 좌절되었고 더불어 후속하려던 북한군 제3군단의 후방진출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북한군의 선전사진과 달리 그들은 현리전투에서 무능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중공군 제6차 공세 당시의 현리전투만큼 남과 북이 공통적으로 한심한 모습을 보인 전투는 6·25전쟁사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입장에서는 기억 속에서 조차 지우고 싶을 만큼 아팠던 사상 최악의 패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북한군도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려 9개 사단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단 2개 사단이 담당하던 아군의 우측방어망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군 제3사단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이를 추격한 북한군은 산속을 헤매고 다니기에만 바빴습니다. 결론적으로 아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킨 것은 좌측으로 쇄도한 중공군이었고 이후 이를 극적으로 틀어막은 것은 미 제3사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남북한군의 총체적 무능의 결정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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