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공세의 서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한 중공군은 2월 12일 곡수리를 점령하여 지평리를 완전히 고립시켰습니다. 중공군은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은 진지를 버리고철수할 것으로 판단하여, 예전에 자주 써 먹던 수법대로 요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유엔군이 이동할 때 치명적인 타격을 감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 제23연대는 참호를 깊게 파놓고 중공군을 맞을 준비를 한 상태였습니다.
미군이 움직이지 않자 중공군은 계획을 바꿔 지평리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2월 13일 어둠이 찾아오자, 중공군들은 횃불을 밝혀들고 꽹과리와 피리 소리를 드높이며 사방에서 포위망을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전에 동요 되지 않고 제23연대는 그들이 보유한 모든 포병화력(155mm 6문, 105mm 18문)을 총 동원하여 중공군을 강타하였는데, 1문 당 평균 250발의 포탄을 발사한 가공할만한 포격이었습니다.
[미 제23연대는 결사항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중공군도 4개 연대의 병력으로 진지를 포위하고 연대 지휘소가 있는 지평리역 주변에 30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연대장이 부상을 입고, 군수과장이 전사했으나 연대장 프리먼은 후송을 거부하며 지휘를 계속하였습니다. 더불어 중공군 보병이 탄막을 뚫고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등 집요한 공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제23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프랑스대대의 분전은 놀라왔습니다. 그들은 4배나 되는 중공군 병력이 접근하는 것을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20미터 전방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착검돌격으로 격퇴하는 용맹함을 발휘하였습니다.
2월 14일 밤, 다시 중공군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그들은 전날 돌파에 실패하였던 제 2대대와 프랑스대대를 다시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적의 공격은 집요하게 계속되고 그럴수록 진지 앞에 쌓인 중공군의 시체는 점차 산을 이루어갔습니다. 2월 15일 02시경에는 제 2대대 G중대의 진지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나 미 제23연대는 예비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돌파구를 확대하여 프랑스대대 배후로 들어오면 방어선 전체는 붕괴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대대는 인접부대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날이 밝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여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평리에 위기가 고조되던 포위된 2월 13일, 리지웨이는 미 제9군단 소속 국군 제6사단과 영국군 제27여단을 문막-지평리 선으로 진출시켜 지평리의 측방을 방호하고, 제10군단 38연대를 지평리에 증원하도록 조치하였으나 모두 중공군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이같이 구원 작전이 모두 실패하였음에도 리지웨이는 미 제9군단장에게 지평리의 제23연대와 즉시 연결을 재차 지시하였고, 명령을 받은 군단장은 군단예비인 미 제5기병연대에게 제23연대에게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크롬베즈(Marcel B. Crombez) 대령이 지휘하는 제5기병연대는 2개 야포대대, 2개 전차중대, 1개 공병중대로 증강하여 적진돌파에 나섰습니다.
[제5기병연대가 지평리를 구하기 위해 출동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량이 파괴되고 도로 좌우측에 배치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초전부터 돌파에 난항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롬베즈는 연대 전체의 기동이 힘들다고 판단되어 보병을 전차에 탑승시켜 전차가 전진이 지체되면 보병이 하차하여 통로를 개척하는 형태로 1개 중대규모의 선도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돌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상황이 급박하여 보병이 다시 탑승할 여유도 없이 전차가 출발하여 남겨진 보병이 적진에 고립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적의 반격이 워낙 거세 전차의 전진이 멈추기를 반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용맹스러운 크롬베즈는 어떠한 경우라도 정지하면 안 되고 달리면서 사격하라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연대장의 불같은 독려에 특수임무부대는 마침내 15일 17시 30분,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전차가 협로를 통과하여 지평리에 도달하자 완강히 저항하던 중공군의 전의는 땅에 떨어져 버려지면서 순식간 전황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곡수리에서 출발당시 보병 165명의 완편중대였던 크롬베즈의 선발대는 지평리에 도착하였을 때 불과 26명에 불과했고 탄약도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마치 구원부대가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 지평리로 뛰어든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날을 어두워져갔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자 진지주변에서 중공군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밤사이에 중공군은 진지 주변의 시체들을 수거하여 철수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은 4,946명으로 추산되었고, 79명을 생포했습니다. 또한 크롬베즈 부대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무려 500여명의 중공군이 사상자를 냈다는 사실이 추후 확인되어, 전투력을 거의 소진할 정도로 피해를 당하였지만 무서운 투혼을 발휘하며 지평리까지 진격한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중공군 후퇴 직후의 모습]
반면 방어에 성공한 제23연대 전투단은 2월 13~15일의 전투에서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그리고 4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대승이었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으로 격파하고 승리한 유엔군 최초의 방어전투였습니다. 이러한 승리로 유엔군은 지난 12월과 1월초의 곤혹스러웠던 악몽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반면 중공군은 제4차 공세가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엔군이 지평리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공군의 제4차 공세는 아군의 역전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유엔군이 다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은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적에게 새로운 공세를 재개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즉각적인 후속 반격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때 전선은 서(西)로부터 동(東)으로 한강-양평(지평리)-원주-제천-영월-대관령을 연하는 선이었는데, 원주로부터 제천-영월을 연하는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남쪽으로 축 쳐진 상태였습니다. 리지웨이는 제천-영월지역으로 남하한 적을 포위섬멸 함과 동시에 동부전선을 북으로 밀어 붙일 생각을 하였습니다.
[도살작전도]
이것은 중공군개입 이후 2번째로 실시되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이었는데,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도살작전(Killer Operation)으로 명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 방향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제천-평창 방향으로 공격을 준비하였고 1951년 2월 21일 10시, 드디어 대대적인 아군의 반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지난공세에서 돌파당한 횡성을 회복하려는 미 제9군단의 주공은 미 제1해병사단이었고 나머지 3개 사단이 제1해병사단의 좌측과 우측에서 함께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 무렵 공산군은 제4차 공세에 실패한 후 철수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따라잡아 일거에 섬멸하려면 공격을 더욱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그동안 단단하게 얼어있던 땅이 녹아내리면서 도로는 순식간 진창길로 바뀌었습니다. 때때로 비까지 내려 항공정찰 및 지원이 불가능하였고, 하천은 떠내려 오는 얼음 덩어리로 도하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더불어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터널과 도로 및 철로가 두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2월 24일, 헬기가 한강에 추락하여 전선을 정찰하던 제9군단장 무어(Bryan E. Moore)소장이 사망하는 불상사였습니다. 당연히 사령관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제9군단의 작전이 원활히 돌아갈리 없었고 이러한 와중에 미 제1해병사단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3월 4일 횡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횡성을 탈환하였습니다.]
한편 주로 험준한 산악지대 우측에서 병행하여 공세에 나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정면의 적과 더불어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북한군 유격대와 교전을 펼치고는 하였습니다. 더구나 적들은 산악의 애로지역을 선점한 상태였던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때마침 내린 폭설로 인하여 극도로 기동이 제한받던 상태여서 공세는 계획보다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악전고투 끝에 3월 6일, 아군의 모든 부대가 예정된 목표선에 도달함으로써 도살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횡성-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부터의 관심사는 언제 서울을 탈환할 것인가로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는 현전투력으로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위험요소가 많으므로 전선의 중앙인 횡성으로부터 홍천-가평 및 춘천 방향으로 대규모의 돌파구를 형성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을 분리시킨 후, 서울을 남쪽(한강)과 동쪽(가평․춘천)에서 양익 포위하며 압박하는 전략을 수립했고 이를 절단작전(Ripper Operation)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번에도 주공은 미 제9군단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도살작전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3월 7일, 제9군단 예하의 4개 사단은 어깨를 맞대고 용문산-홍천을 향하여 공격을 재개하면서 절단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번 작전의 최대의 목적도 중공군의 섬멸이었습니다. 계속된 국군과 유엔군부대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중공군이 급격히 붕괴되는 징후가 역력했고 아군은 순조롭게 3월 14일에 이르러 홍천 외곽까지 진출했습니다.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홍천의 지리적 중요성 잘 알고 있는 중공군은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미 제1해병사단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홍천을 놓고 미 제1해병사단과 중공군의 격전이 연일 벌어졌으나 제공권을 앞세운 미군의 맹렬한 폭격과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이 홍천의 양측을 동시에 파고들자 3월 20일부터 중공군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빠르게 철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내달려 미 제1기병사단이 3월 21일 13시 30분에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고 춘천시가지로 진입했습니다.
[반격을 완수하였으나 적을 섬멸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양평-춘천을 연하는 선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면서 절단작전은 종료되었고, 서울을 제외한 지난 1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내주었던 38선 일대의 동부전선 대부분을 탈환하였습니다. 석 달 전에 아군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단절하기 위해 일사천리 후퇴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중공군이 유엔군에 의한 포위를 우려하여 신속한 철수를 거듭함으로써 이룬 결과였습니다. 한마디로 장군멍군식의 모습이었습니다. 때문에 연이은 두 차례의 공세로 전선을 밀어 올리는 성과를 보였지만 중공군의 신속한 후퇴 때문에 애초에 목표로 내세운 중공군의 주력의 포위 섬멸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지난 2월 10월 썬더볼트 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 한강남단까지 전진한 이후, 바로 강 건너편에 있는 서울은 유엔군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서울을 조기에 탈환하는 것이 지난 패배의 악몽을 떨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지난 11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 실패 이후 이어진 후퇴 그리고 서울의 포기를 한마디로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러한 악몽을 서울을 빨리 재탈환함으로써 하루 빨리 떨쳐 버리고자 했습니다.
[서울 탈환에 대한 맥아더와 리지웨이(左)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정치적 효과보다 군사적인 목표에 충실하여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차근차근 적을 격멸하고 밀어붙이면 서울은 저절로 탈환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서울 측방의 확보 없이 무턱대고 도심만 차지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바른 선택이 아니었고, 이미 서울 도심은 지난 1.4후퇴 당시에 완전 소개된 데다가 공습과 포격으로 폐허만 남아있는 텅 빈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전략상 반드시 확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지난번 북진의 실패로 말미암아 입김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던 성태여서 결국 리지웨이는 소신 것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중부전선에서 격전이 펼쳐졌지만 서부전선은 한강을 경계로 하여 대치상태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아군이 도하할 의도를 하지 않아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기회를 엿보던 결과 리지웨이의 예측대로 중부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홍천을 공격 중이던 3월 12일부터 서울의 중공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항공정찰결과 서울에 주둔하던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관측되었고 또한 이날 한강을 도하한 미 제3사단의 정찰대도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3월 14일, 국군 제1사단에서 파견된 5개의 정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시가지를 후속 정찰하였으나 적 부대를 발견하지 못 했고 이때 1개 정찰대가 중앙청으로 진출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내거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중부전선이 심각하게 무너지는 와중에 폐허가 된 텅 빈 서울을 중공군이 잡고 있을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습니다. 한 달여의 지루한 대치와 맥아더의 닦달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회를 엿보던 리지웨이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로 진입하여 적정을 살피는 국군 제1사단 정찰대]
3월 15일, 리지웨이는 미 제1군단장에게 강을 건너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도록 명령했습니다. 3월 15일 05시 30분에 수륙양용장갑차로 무장된 1개 대대가 마포방면으로 도하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울 탈환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16일 아침 도하를 완료하여 서울전역을 장악하였습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탈환한 지난 9. 28 서울수복작전 당시와 달리 중공군의 반격이나 시가전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탈환한 서울은 지난 1년 동안 그 동안 4번이나 주인이 바뀌어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있었습니다.
1.4후퇴 전 150만 서울시민중 부득이한 사유로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는 시민은 20만이었는데, 이들에게 제공해줄 식량마저도 부족한 실정이었을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도 별도의 수복행사를 열지 않고 부산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서울의 여건이 개선될 때까지 시민들에게 복귀를 자제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비록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한국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었지만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또 다시 서울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 및 시민의 귀환은 상당기간 지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마포에 진입한 국군 제1사단]
이것은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되고 전략적으로 적을 막아내기 힘들다면 또 다시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물러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런 입장은 서울을 선선히 내주고 북으로 물러간 중공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덧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서울은 이제 단지 상징과 명분만 있는 곳이지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악착같이 사수항려야 할 장소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3번째로 컸던 도시를 이처럼 유령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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