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말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연이어 계속된 썬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으로 전선을 30~60킬로미터를 북상시켰는데, 사실 이런 가시적인 성과보다 중공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것이 더욱 고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한편으로 지난 1.4후퇴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은 중공군이 보급을 받아 서서히 다음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2월로 접어들면서 전선에는 중공군의 재배치를 위한 대규모 부대이동이 관측되기 시작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이동 모습이 관측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재배치는 중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한다는 펑떠화이의 복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펑은 지평리와 횡성(삼마치고개)을 비교한 결과 기동력과 화력이 비교적 열세한 국군 제8사단과 제3사단이 배치된 횡성을 먼저 공격한 후 이어서 미군이 배치된 지평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 11일 20시 30분, 중공군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3병단이 횡성 북방의 삼마치 고개로 돌입하여 들어왔고 이곳을 담당하던 국군 제8사단은 급속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흔히 2월 공세라고도 불리는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8사단은 불과 4시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다음날 수습된 병력이 장교 263명, 사병 3,00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사망하거나 실종된 인원이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되는 사단 해체 수준의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국군의 조기붕괴는 후방의 미군 지원부대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방의 지원부대들에게 전방사단의 붕괴 사실이 뒤늦게 전파되었을 만큼 중공군의 진출이 빨라서 이들마저 순식간에 고립된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화포와 차량 등 많은 중장비를 버리고 산악능선을 따라 철수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측에 있던 국군 제3사단도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후방이 차단되었으나 중공군 1개 사단과 북한군 제5군단의 일부 부대를 적절히 견제하면서 횡성동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국군 제3사단을 추격한 중공군 제66군은 횡성 후방으로 진출하여 미 제10군단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군단 전체가 몰락하는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국군 제3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미 제10군단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운드업 작전으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부전선의 국군이 붕괴면서 일순간 위기가 닥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횡성전투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 하루 만에 국군 2개 사단을 격파함으로써,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2월 12일 정오,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이 원주의 미 제10군단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지평리-원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여 이곳으로 부대를 철수시킨 후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평리가 유엔군방어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반면 중공군도 횡성에서의 승리가 전선 전체, 특히 한강 이남까지 올라와 있던 서부전선의 유엔군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그 연결점인 지평리를 확보하여야 했습니다.
당시에 미 제2사단 23연대 전투단이 점령하고 있던 지평리는 양평군 지제면에 속한 조그마한 한촌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의해 미 제10군단이 원주로 후퇴하였기 때문에 지평리의 제23연대는 순식간에 적 지역으로 돌출된 형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여주 인근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수순이었습니다. 하지만 리지웨이나 펑이나 지평리가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의 연결고리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철수 준비를 하던 미 23연대는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따라 지평리역에 지휘소를 선정하고 방어에 임하였습니다. 지평리는 역을 중심으로 직경 5킬로미터 주위의 고지를 연결하면 완벽한 원형방어 진지를 편성할 수 있는 구조였으나 둘레가 16킬로미터나 되어 4개 대대 5,600여명의 병력으로 진지편성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연대장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은 방어선을 안으로 대폭 축소시켜 낮은 구릉과 논둑을 이용한 직경 1.6킬로미터의 원형방어 진지를 편성하였습니다.
[혹한의 눈 속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 제23연대]
이로써 방어지역을 대폭 축소시킬 수 있었으나, 주위의 고지군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축소한 총 둘레 6킬로미터의 방어선도 4개 대대로 방어하기에는 힘에 겨운 넓이였습니다. 프리만은 예비대를 연대에 1개 중대, 각 대대에 1개 소대로 제한하고, 전차를 포함한 전 병력을 방어진지에 배치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는 참호를 깊게 파도록 조치하였고 다량의 지뢰를 매설하면서 적의 공세를 기다렸습니다.
1951년 1월 말, 서부지역에서 한강을 향하여 공격하는 썬더볼트 작전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도중에 보급이 취약한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한 리지웨이는 서부전선의 북상과 발맞추어 중동부 지역의 전선도 북으로 끌어올리려 결심하였습니다. 상대에 대해 자심감이 생기자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피아 공히 공격이 어려운 한강을 기준으로 일단 서부전선을 안정화시키면서, 중동부 지역에서 북상을 개시하여 홍천일대에 포진한 중공군주력을 포착하여 섬멸한다면 서울 탈환에 보다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해당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미 제10군단에게 적극 공세에 나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양측 병력이 홍천일대에 집결하면서 격돌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朝)․중(中) 연합군사령관 펑떠화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서부지역의 유엔군 반격을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한 상태로 중공군과 북한군의 주력을 중부전선에 집결시켜, 횡성 일대로 돌파구를 형성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따라 홍천 포위를 계획하고 있는 아군과 횡성 진출을 기도하고 있는 공산군은 중부전선에서 거대한 일전을 벌일 운명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여주-평창을 연하는 선에 배치되어있던 미 제10군단은 제 8군으로부터 하달된 공격 명령을 접수하자, 서부지역에서 재미를 보았던 위력수색작전으로 반격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월 31일, 미 제2사단 23연대 전투단이 문막-지평리 방향으로, 기갑부대가 원주-횡성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처럼 적의 대부대는 없었고 단지 산발적인 경미한 저항만을 받으며 기갑부대가 2월 2일 횡성에 도달하였고, 제23연대 전투단이 2월 3일 지평리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기갑부대가 횡성에서 홍천을 향해 북상하자 적의 저항은 점차 치열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부지역의 교통요충지인 홍천 일대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부대가 집결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지만 만약 홍천을 점령한다면 이곳에 모여 있는 적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던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우측의 국군 제3군단과 협조하여 홍천을 포위하여 적을 분쇄한 후, 전선을 홍천-대관령-강릉선으로 북상시키려 결심하였습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차기공격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알몬드는 이를 적의 주력을 몰아서 섬멸한다는 의미의 라운드 업(Round Up) 작전으로 명명했습니다.
[드디어 중부전선에서도 아군의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 제10군단은 주공인 국군 제8사단이 서측에서, 조공인 국군 제5사단이 동측에서 진격하여 홍천을 포위하도록 했고, 예비인 미 제2사단과 제7사단은 지평리-횡성-원주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전면에 나설 국군 2개 사단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2월 5일 08시, 야심만만한 홍천 포위공격이 시작되었고 최초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아군은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중공군의 저항도 거셌습니다. 5번 국도의 요충지인 삼마치 고개에서 중공군 제198사단이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습니다.
국군 제8사단은 금번 작전의 최대 난관인 삼마치 고개를 돌파하기 위하여 항공지원 하에 보병, 전차, 포병의 협조된 공격을 2월 10일까지 계속하였으나, 위치를 선점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돌파에 실패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측에서 공세에 나선 국군 제5사단도 공격초기부터 북한군 제6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저지되었습니다. 결국 2월 10일까지 홍천 포위작전을 펼쳤으나 진척이 없었습니다. 삼마치의 적이 계속 증강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알몬드는 국군 제3군단 소속 제3사단을 국군 제8사단 지역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삼마치 고개의 중공군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은 삼마치를 방어해 내었습니다.]
반면 삼마치 고개에 모든 시선이 쏠려있는 틈을 타서 미 제10군단의 우측에서 병진하여 앞으로 내달리던 국군 제3군단은 평창 북방의 창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2월 7일 대관령-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동해안의 요충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비록 삼마치 고개 돌파에 실패하였지만 국군은 전술적 요충지인 동해안의 항구와 비행장을 확보하고 대관령과 횡계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반면에 평창-영월-안동까지 침투해있는 북한군 제2군단은 순식간 연결이 차단되어 고립되었습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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