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두지 않고 너무도 빨리 북한 땅을 내주었지만 1950년 12월 중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내심 중공군도 38선에서 공세를 멈춰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마치 지난 9월말 아군이 38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오매불망 바라던 북한정권과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유엔군의 이러한 희망은 맞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12월 중순, 38선 일대까지 유엔군을 추격하여 내려온 중공군은 일단 그곳에서 숨을 고르려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8선 일대에서 중공군이 진격을 멈추어 전선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일단 진격을 멈춘 중국지원군 사령관 펑떠화이는 연합사령부 설치에 착수하여 북한군의 지휘권도 자연스럽게 확보하였습니다. 이제 맥아더에 맞상대 하여 6·25전쟁을 지휘하게 된 펑은 1951년 2~3월경에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지난 두 차례의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데 성공하였지만 반대급부로 소모된 것이 너무 많아 이를 보충하여 전력을 회복하는 것이 선결과제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붕괴된 제9병단의 피해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본토에서 이동 중인 제19병단도 한반도로 이동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그 또한 2~3개월 정도 부대재편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는 하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38선 일대에서 중공군이 정지할 경우, 전선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지체 없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 부대를 재정비하라며 명령을 내렸습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소강상태로 빠지기를 원했던 유엔군의 희망과 달리 마오의 지침에 따라 대강의 준비를 마친 중공군은 12월 31일을 기해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면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1.4후퇴를 야기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을 탈출하는 피난민]
이때 공산군은 총 9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5개 군단(중국 2, 북한 1)으로 편성된 주공은 서울을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고, 중공군 2개 군단이 전선 중앙의 가평으로, 북한군 2개 군단이 동부전선의 홍천-원주 방향으로 38선을 넘어왔습니다. 중동부 전선의 조공부대는 전선을 돌파하여 아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사실 이러한 부대배치와 공세방향은 지난 1950년 6월 당시에 북한군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북한군은 20여만 이었지만 이번 공세에 펑의 지휘 하에 동원된 중국, 북한군은 물경 50여 만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던 17시경, 임진강, 한탄강 일대의 서부전선에 집중 배치된 중공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면서 강을 넘어왔고 얼마가지 전선의 계곡과 능선은 중공군으로 가득 찼습니다.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에 하염없이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투현장을 시찰한 신임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적에게 허용한 돌파구가 예상외로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한강이 결빙되어 적의 공세를 저지할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되었기 때문에 1월 3일 오후에 서부전선의 아군에게 평택-안성선으로 후속 철수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것은 38선 이남에서 동서간에 가장 짧은 거리인 북위 37도선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였고 한편으로 서울을 적에게 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을 재점령한 중공군의 모습]
1월 4일 아침부터 한강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철수하는 아군부대 옆에는 엄청난 피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여름에 벌어진 공산학정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군 당국의 소개명령이 하달되자 엄동설한임에도 한강을 건너 서울을 탈출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13시경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를 완료한 후 14시경, 임시교량이 폭파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중공군이 텅 비워버린 서울에 무혈 입성하였습니다.
아군은 서울을 수복한 지 3개월 만에 다시 한 번 적에게 내어주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결국 평택-안성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겨우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고 전열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부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홍천-원주를 향해 남하한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한 후에도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충주-대전방향까지 진출하여 37도선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유엔군 후방을 차단한다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서울에 미련을 두지 않고 37도선까지 후퇴한 아군은 1월 6일 평택-안성 간에 설정된 방어선을 점령했으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서울에서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마치 중공군의 그림자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간 꼴이 되어버린 제8군은 이러한 의외의 상황에 상당히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목표는 유엔군 격멸이 아니라 서울의 점령이었고 여기에서 그 동안의 계속된 공세로 지쳐있던 부대를 재편할 예정이었습니다. 어쨌든 중공군은 최초 등장이후부터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 행태를 보여 계속하여 아군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중공군은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군대였던 것이었습니다.
[유엔군에게 있어 중공군은 아직까지도 미지의 군대였습니다.]
이처럼 1951년 들어서자마자 숨 가쁘게 서울을 내주고 물러났지만 양측 주력이 팽팽히 길항하던 서부전선은 곧바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가평-춘천 지역으로 공세를 펼친 중공군 2개 군이 국군 제2, 5사단 지역을 돌파한 후 서부전선과 연결을 시도하여 이곳에도 일시적으로 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으나 1월 8일을 전후해 일제히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공군의 모습과 달리 북한군이 공세를 벌인 홍천-원주 지역은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국군 제8, 3사단이 담당하던 전선이었는데, 정면에 북한군 2개 군단이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후방에서 암약하던 유격대가 아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왔습니다.
이들은 순식간 영월-단양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제8군의 후방 병참선을 위협하면서 순식간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 10사단은 안동지역까지 급속 남하하여 아군을 초긴장상태 몰아넣었습니다. 한마디로 1950년 여름 북한군의 최대 진격선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진출속도는 오히려 당시를 초과하였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제8군사령관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던 국군 제3군단을 1월 3일자로 미 제10군단에 배속하여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대구 및 부산 등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던 중이었고, 이곳에는 군우리에서 학살과 같은 참화를 겪고 망신창이가 되었던 미 제2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 제2사단은 중부전선의 최대 위기처인 원주를 사수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당시의 요도]
이제 1951년 1월 초, 유엔군의 최대 관건은 서부전선보다 원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원주를 돌파하여 청주-대전방향으로 진출한다면, 서부전선에 포진한 유엔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될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을 내어주고 중공군의 공세가 주춤한 1월 4일 이후부터는 북한군의 공세가 극성을 부린 원주가 제8군의 최대 관심지역으로 부각된 것이었습니다. 북한군 제5군단은 피란민으로 위장했던 부대를 원주 정면에 투입함과 동시에 원주 서측 문막에 제12사단을 투입하여 방어에 나선 미 제2사단의 후방을 위협했습니다. 군우리의 악몽이 떠오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포위당하여 몰 살 당할 악몽을 경험하였던 미 제2사단은 퇴로차단을 우려해 1월 7일 밤, 원주 남쪽의 목계 방향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주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군단장의 명령으로 현지사수로 목표를 바꾸었고 1월 8일 아침, 항공기의 근접지원과 함께 역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격렬한 공방전 끝에 1월 11일 오후, 원주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247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었고, 미 제2사단은 제8군의 위기를 수습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전투를 기화로 미 제1사단은 군우리에서 당한 패배의 앙금을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던 점입니다.
[원주를 공격하는 미 제2사단 (1950년 1월 10일 사진)]
1950년 12월말,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면서 공산군 측 지휘권을 펑떠화이가 모두 차지하게 되었던 것을 내심 김일성과 북한 군부가 반발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북한군의 단독공세가 사전에 중국 측과 조율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북한군에게 단독 공격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들었고 더욱 더 중국 측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는 마오쩌둥의 지침에 따라 서울점령이라는 작전목표를 손쉽게 달성하였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의 주력을 보존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다를 통해 후퇴한 미 제10군단이 즉시 전선에 재투입되기에 곤란한 상황이어서 상대적으로 중동부전선의 방어선이 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때 중공군이 북한군과 함께 원주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하였다면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마오의 명령에 따라 예정보다 빨리 제3차 대공세를 개시한 중공군도 준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아군은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수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적
개전 직전 북한 공군은 전투기를 포함한 200여기의 작전기를 보유하여 불과 20여기의 훈련기만 보유하였던 대한민국 공군을 압도하였지만, 훈련량 등이 절대 부족하여 실전에서 그리 커다란 전과를 기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6·25전쟁이 개시되었던 얼마간의 순간을 제외하고 휴전이 될 때까지 하늘에서는 유엔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미 공군 덕분에 처음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마음 놓고 근접항공지원과 후방차단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위기의 순간에 국군과 유엔군을 지탱한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 B-29의 융단폭격 모습]
미 공군이 6·25전쟁이 참전하자마자 북한 공군은 괴멸되었고 이후 한반도의 하늘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습니다.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도 적진 한가운데인 평양에 대한 공습이 연일 이루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 이후부터 지상군 같은 완전히 역전당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늘의 상황도 변하였습니다. 1950년 11월 8일에는 압록강 건너 만주 기지에서 발진한 중공군 소속의 MIG-15 전투기가 미군 F-80 전투기를 공격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비록 찰나의 조우였고 피아 모두 별다른 전과는 없었지만 이것은 항공전사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역사상 최초의 제트기만의 공중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1950년 1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10여 개월 f동안, 미 공군 전투기나 폭격기들이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주변에 출현하면, MIG-15는 만주의 안동기지에서 출격하여 유엔군 공군을 요격하였습니다. 4기로 구성된 MIG-15 편대는 이륙 후 2기씩 2개 편대로 분리된 후 공격을 시도하고는 재빨리 만주로 도주하는 전형적인 히트 앤드 런(Mit & Run) 전법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러한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은 아군에게 경악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의 주력 전투기는 F-80이었지만 몇 차례 조우결과 MIG-15에 절대 열세임이 판명되었고 B-29같은 폭격기는 MIG-15에게 손쉬운 먹이거리기 되었습니다.
[출격 준비 중인 중공군 MIG-15]
특히 1951년 9월부터는 중공 공군의 출격횟수가 더욱 증가되어, 12월에는 46기로 구성된 미 공군 B-29 폭격기 편대에 대항하여 한꺼번에 105기의 MIG-15를 출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중공군의 일일 최대 출격 소티는 400회, 최대 동시 출격 기수는 180기에 달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유엔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MIG-15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작전 나가는 것을 거부하였을 만큼 순식간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결국 MIG-15의 등장은 미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인 F-86이 조기에 전쟁에 등장하도록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한반도 상공에서 펼쳤던 숨 막히는 공중전은 항공전사에 커다란 한 획이 되었고 MIG-15와 F-86은 최고의 라이벌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MIG-15는 주로 청천강이북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고 대부분의 공중전도 이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MIG-15가 자주 출몰하였던 이 지역을 흔히 미그회랑(MIG Alley)이라 불렸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감탄한 MIG-15의 성능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아스러운 부분입니다. MIG-15가 대지공격 능력이 없는 순수한 제공전투기이기는 하지만 최전선에서 지상의 공산군을 공격하는 유엔군 전술기를 요격하지 않고 오로지 미그회랑에서만 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근의 에어쇼에도 자주 등장하는 F-86과 MIG-15]
[최고의 라이벌로 항공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에 중공군복을 입은 수많은 소련 조종사들이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비록 동체에는 중국 국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전투기 모두와 상당수의 조종사를 소련이 공급한 것이어서 한반도에 등장한 MIG-15는 소련 공군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련말로 교신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고 만일 격추되더라도 안전한 지역에서 작전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MIG-15는 미그회랑 일대에서만 주로 목격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련과의 교전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하면,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탓에 소련군 이 참전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군과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였을 만큼 상대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논의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방안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유엔군의 철군은 대한민국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정부 또한 다급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각종 결의대회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여 서방측에 계속하여 항전을 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어필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국민방위군 고급간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려 물품을 빼돌려 집단 아사, 동사자가 생기게 만드는 부끄럽고도 한심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한심함의 극치였습니다.]
미국은 국방비를 증액하고 징집연령을 낮춤과 동시에 18개 사단 재창설 계획을 조기에 앞당기기로 했을 만큼 중공군의 출현은 위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는 서유럽을 방위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군을 창설하였습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확대한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등장으로 전황이 순식간 바뀌자 미국을 비롯한 참전 유엔군 측은 “한반도에서 철군할 것인가, 확전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12월 2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중국의 의도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철수 한다”는 암울한 내부 의견을 정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게 되면, 한국국민 일부를 제주도로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도록 조치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고, 단순히 의사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때문에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확전을 주장하여 투르먼과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1950년 12월 전선을 순시하는 맥아더와 리지웨이)
반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중심으로 확전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는 합참의 지시가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다음날 회신에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보복조치를 요구했습니다. 맥아더는 중국해안 봉쇄, 중국본토에 대한 폭격, 타이완 군의 참전 및 중국본토 상륙공격 허용 등의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맥아더의 주장은 ‘중국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의 전쟁에 말려든다면 결코 미국의 국익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대통령 투르먼과 대립을 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주요 참전국 중 하나인 영국의 주도로 정치적으로 철군과 확전의 중간인 명예로운 휴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1월 17일, 당시 3차례의 공세에서 모두 승리하여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중국은 이를 휴전을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림 셈이었습니다. 만일 이때 휴전 교섭에 돌입하였다면 공산권 측의 의도대로 전쟁이 멈출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쉽게 최종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여 전쟁을 고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너무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었고 미국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최고 극성기를 연출한 중공군]
이처럼 연이은 공세를 성공시켰지만 힘이 극도로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나아가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상황이었습니다. 평택-삼척에 형성된 전선으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금강까지 더 밀려난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였습니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면서 더 이상 내려올 수 없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지만 만일 그때 마지막 힘을 다하여 좀 더 밀어붙였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고 있었지만, 막상 중공군도 유엔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전쟁..... > 한국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전의 장소로 떠오른 지평리 (0) | 2013.03.19 |
---|---|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0) | 2013.03.19 |
죽음의 계곡 (0) | 2013.03.19 |
만용의 대가 (0) | 2013.03.19 |
낯선 군대의 등장 (0) | 2013.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