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만용의 대가

구름위 2013. 3. 1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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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던10월 25일, 배속된 전차를 앞세운 국군 제1사단은 운산에서 압록강의 수풍호(水豊湖)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진격을 개시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전 11시경, 38선 돌파 후 가장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적의 규모와 소속을 파악하지는 못하였고 적의 단지 단발적인 마지막 발악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우익인 제15연대 3중대에서 전투 중 생포한 한 명의 포로를 심문한 결과 운산과 희천(熙川) 일대에 2만 여명의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백선엽 사단장은 이를 즉각 밀번(Frank W. Milburn)미 제1군단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전차를 앞세우고 북진하는 미 제1기병사단]


  같은 날 제1사단의 우측인 온정리에서 북진중인 국군 제6사단 2연대도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2연대는 중공군 병사 2명을 생포하면서 대규모의 중공군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거의 동시에  전선의 여러 곳에서 잡힌 이상한 복장의 포로들로부터 속속 같은 진술이 수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포로들은 즉시 평양에 설치 된 제8군사령부로 후송되어 조사를 받았고, 조사 내용이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도 분석되었지만 막상 내려진 결론은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은 압록강 진격작전을 계획대로 펼치기로 하고, 진격이 운산에서 멈춘 국군 제1사단을 대신하여 미 제1군단 1기병사단이 수풍호로 진격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10월 28일, 평양을 출발한 미 제1기병사단은 30일 순조롭게 운산에 도착하여 공격에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적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11월 1일에나 국군 제1사단과 진지교대가 이루어 질 만큼 진격이 둔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우측의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고 있다는 급보가 날라들었습니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인하여 전선의 곳곳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앞만 바라보고 내달리던 미 제1군단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위급한 순간이어서 군단장은 전방의 각 사단장들에게 공격을 멈추고 후방의 청천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회의를 거쳐 가장 앞에 서있어 위험에 노출된 미 제8기병연대가 먼저 철수하고, 국군 제1사단은 이를 엄호하기로 합의했으나 상황은 그렇지 못할 만큼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엄호를 맞아야 할 운산 우전방의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먼저 붕괴되면서 미 제8기병연대의 후방이 차단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간신히 봉쇄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제3대대는 적진에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구할 여력이 없을 만큼 적의 공세가 거 세자 밀번 군단장은 제3대대의 구출을 포기하고, 모든 예하부대들에게 11월 2일 15시를 기해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고립된 제3대대는 11월 4일까지 사투를 벌였으나 대대원 800여 명 중 약 530여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고, 이것은 이후 ‘운산의 비극’으로 미군 전사에 표현되는 참담한 결과였습니다.


[운산의 비극은 만용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분명히 10월 25일 이후 전선의 곳곳에서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하고 있다는 물증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지만 유엔군 최고위층은 애써 이를 무시하는 오만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위험징후가 보이면 이를 해소하고 또한 조심하여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였고 그 결과가 바로 운산의 비극이었습니다. 반면 중공군은 최초의 교전을 통해서 미군이 화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므로 지원이 제한되는 야간에 전투능력이 반감됨을 파악하였고 더불어 국군에 대해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는 혹독한 평가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최초 판단은 적어도 1951년 봄까지는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등장으로 초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는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앞에 서있던 제6사단 2연대는 후방의 온정리가 점령되면서 연대 전체가 붕괴되는 참사를 입게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출몰한 중공군은 야간 및 산악전투에 상당히 능숙했고 더불어 피리와 꽹과리 등을 이용하여 아군의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심리전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제파식 집중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참전 초기에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중공군 특유의 공격방식을 국군과 유엔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 불렀는데, 사실 중공군 참전 초기에는 중공군의 병력이 아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만큼 많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군 담당지역이나 교통요충지처럼 반드시 돌파하여야 할 핵심지역으로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따라서 넓게 퍼져있던 아군 입장에서는 중공군이 출몰하지 않아 평온한 지역도 있었지만 중공군과 조우한 부대는 체감 상 엄청나게 많은 적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해전술은 1951년 봄에 연이어 있었던 세 차례의 대공세 당시였습니다.


  엄청난 변화에 놀란 국군 제2군단은 10월 27일, 가용 전투역량을 총집중하여 10월 29일까지 3일 동안이나 온정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중공군의 공격에 퇴로가 차단되어 증원부대들 까지 한 번에 붕괴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제2군단은 무참히 붕괴되어가고 있던 예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최대한 수습해 후방인 청천강 방어선까지 철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퇴로를 확보해 주어야 했는데 이때 구원투수로 평양탈환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 제7사단(칠성부대-七星部隊)이 나섰습니다. 당시 육군 예비로 영변 일대에 집결하던 제7사단은 제2군단이 붕괴되어 가자 10월 29일부로 제2군단으로 배속을 전환하여 군우리(軍隅里)로 출동합니다.


[제7사단이 위기를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11월 2일, 제7사단은 청천강 상류지역을 감제(瞰制)할 수 있고 군우리에서 안주와 순천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해발 622미터 비호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곳을 중공군이 점령한다면, 제8군의 후방으로 향하는 통로가 순식간 개방되면서 아군 전체가 일순간 붕괴될 수 있는 결정적인 지형이었으므로 제7사단은 반드시 사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개 사단으로 편성된 중공군 제38군(군단급 부대)의 선두부대가 제7사단 방어진지로 돌격하여 들어왔습니다.


  전쟁 중반기 이후에서나 볼 수 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비호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제7사단은 최초 중공군의 공격에 잠시 정상을 허락하였지만 반격을 가하여 즉시 되찾고 끈기 있게 방어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에 결국 11월 5일 정상이 다시 중공군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중공군이 청천강 후방으로 곧바로 진출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잘 알고 있던 신상철(申尙澈) 제7사단장은 11월 6일 08시, 모든 역량을 총 집중하여 비호산 정상을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이처럼 2차례의 공방전에서 패배한 중공군 제38군은 서서히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인근의 중공군 제39, 40군도 공세를 멈추었습니다.


[제7사단의 선전으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였습니다.]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라는 상징성과 함께, 제8군 전체를 위기에서 구출한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중공군은 제1차 공세를 통해 제8군 전체를 일거에 격파하려 하였으나 운산, 온정리, 운산 일대에서 일부 아군부대를 격파하는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을 뿐입니다. 이후 밝혀진 여러 자료에 의하면 11월 5일을 끝으로 중공군의 보급역량이 바닥나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었다고 밝혀졌지만, 중공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국군 제7사단의 용전분투가 없었다면 청천강 방어선 구축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한만국경을 향하여 앞으로만 내달리다 10월 말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에 의해 아군이 순식간 청천강 선으로 밀려나자마자 이상하게도 중공군의 공세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동안의 이상 징후에도 불구하고 단지 적의 국지적인 저항으로 폄하하며 대규모의 중공군 개입사실을 애써 부인하던 유엔군 지휘부는 자신들이 판단이 맞는 것으로 결론 짖고 청천강 선에서 전열을 다시 재정비 후 전쟁종결을 위한 최종공세를 조기에 강행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24일 10시에 서부지역의 박천-영변-구장-덕천-영원을 연하는 청천강 북쪽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번 한만국경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보다 3일 늦은 11월 27일에 동부지역의 미 제10군단도 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자신만만하게 진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미 제1군단 사령부를 방문한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늦어도 성탄절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격려하였을 정도로 상황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10월말에 중공군에 의해 호된 신고식을 치른 국군 제2군단도 전열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진격하였고 막상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습니다. 오히려 지난 중공군의 공세에서 붙잡혔던 유엔군 포로들이 대거 탈출하여 아군 전선으로 복귀할 정도로 상황은 낙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모습과 달리 아군은 중공군의 유인책에 걸려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지난 공세에서 패배한 유엔군이 즉시 반격할 것으로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엔군이 공격해오면, 예정된 지역까지 후퇴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을 유인한 후 일거에 격멸하고, 이어서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유엔군의 후방으로 파고들어 전선을 평양-원산선까지 밀어버릴 대담한 계획을 수립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미 중공군은 아군의 공세 직전에 서부지역에 18개 사단, 동부지역에서 12개 사단을 지정된 위치에 은밀히 이동시켜 놓았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군은 진격을 개시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중공군이 쳐 놓은 그물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유인책에 걸려 비참한 결과를 당하였습니다.]


  11월 25일,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미군의 정면은 물론 후방지역에서도 중공군이 등장하여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번에도 중공군은 국군 제2군단지역으로 주력을 집중시키면서 집요하게 파고 들어왔습니다. 중공군 제2차 공세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난 공세에서 붕괴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던 국군 제2군단은 다시 한 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였고 배후가 봉쇄당하자 순식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덕천과 맹산 일대로 진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8군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이제 제8군의 안위는 청천강 남쪽의 개천과 순천의 확보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명령을 받고 출동한 부대는 야지시(Tahsin Yazici) 준장이 지휘 하는 터키여단이었습니다. 터키여단은 11월 26일 덕천으로 이동하던 중 와원(瓦院)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조우하였습니다. 지휘관의 명령 없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전통을 지닌 용맹스러운 5천여 터키병사들은 4배가 넘는 중공군을 맞이하여 이곳을 무려 3일 동안이나 막아내었습니다. 이 전투로 터키여단은 과반수의 전투력을 잃고 와해되었으나 그 대가로 제8군의 비참한 붕괴를 막아버린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무공을 세운 야지시 터키여단장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제8군 사령관 워커]


  결국 자신만만하게 공세를 시작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제8군은 다시 청천강 선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 제2차 공세 이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을 믿지 않았던 맥아더를 비롯한 유엔군 지휘부는 11월 28일에 이르러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기정사실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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