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죽음의 계곡

구름위 2013. 3. 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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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군은 언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을 붙인 대대적인 진격작전을 개시하였지만 오히려 실제로 전선은 후퇴를 거듭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였습니다. 11월 27일, 덕천과 영원 일대의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자 제8군은 전 부대를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였고 이것으로도 위기를 감당할 수 없자 곧이어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은 이중으로 아군 주력을 포위하여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38군이 덕천을 돌파하여 군우리(軍隅里) 후방으로 진출하여 내곽을 포위하고, 제42군은 영원, 북창을 거쳐 순천 및 성천 방향으로 진출하여 외곽을 봉쇄하려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대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당시 청천강 상류의 교통 요충지인 군우리 일대를 방어하던 부대는 미 제2사단이었는데,
11월 29일 군우리 전방에 출몰한 중공군 제40군의 압박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숙천 후방으로 부대를 철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군우리 후방으로 파고들던 중공군 제38군 113사(사단)가 군우리와 순천중간인 갈고개를 점령함으로써 위기가 증폭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중공군 제42군을 순천북방 신창리에서 미 제1기병사단이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철수할 수 있는 통로를 겨우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안전은 장담하기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2사단이 숙천으로 철수하는데 이용될 수 있는 도로가
2개였는데, 하나는 사단 후방에 있는 군우리~순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고 또 하나는 미 제1군단 관할지역인 신안주~숙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습니다. 따라서 순전히 지휘관의 의지에 따라 철수로를 선택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 제1군단장 밀번은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urence B. Keiser)에게 도로 상태가 양호한 신안주~숙천간 도로를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카이저는 미 제1군단과 철수로가 겹치면 혼잡할 것으로 예상하여 군우리~순천 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극의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수로를 정찰하려 먼저 급파된 전차
소대는 저항 없이 갈고개를 넘었고 이상이 없음을 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찰대는 험준한 협로 양측 위에서 매복하여 있던 중공군 제113사가 미 제2사단 본진을 살상지대로 유인하기 위하여 그대로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낙관적으로 보이자 사단은 11월 30일 새벽, 제9연대, 사단 본부, 포병 및 지원부대, 제38연대, 국군 제3연대, 제23연대의 순서대로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험준한 협곡 안으로 진입하자 좌우측에 매복한 중공군으로부터 집중적인 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노출된 병사들은 중공군의 조준사격에 차례차례 쓰러져 갔지만 이 상태에서 뒤로 돌아 빠져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군우리 협곡에서 저항하는 제2사단 공병대대]


  이런 미 제2사단에게 위기기 닥치다 공군의 지원과 외곽에서 미 제9군단이 배속된 영국군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모두 무위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후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군우리에서 용원리까지 1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모든 장비와 대응을 포기한 상태로 몰매를 맞아가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를 개시한 미 제23연대는 연대장 단독으로 신안주로 우회하여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으나 제23연대의 작전지역 이탈로 사단 본부가 더욱 많은 피해를 보게 되어 후일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은 3,000여명의 사상자와 사단의 전 장비를 상실하여 부대가 완전히 와해되는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대해체까지 고려하였지만 전통 있는 부대를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후 미 제2사단은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군들은 군우리
전투가 좌우측으로 늘어서 있는 형(刑) 집행인 사이를 죄인이 통과하도록 하여 몰매를 가하는 ‘인디언의 태형’ 방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인디언의 태형(笞刑 : Gauntlet)’이라고 부르며 뼈아픈 교훈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 당시에 가도에 몸을 숨긴 미 제2사단 장병들 ]


  미 제2사단이 전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그나마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이 강력한 화력으로 궤멸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매복한 상태로 소화기에만 의존하는 공격을 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중공군 제113사의 뒤에는 미 제9군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지원에 나서 강력하게 압박을 가했다면 오히려 중공군이 전멸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나중에 전황을 분석하며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때 까지만 양측 모두는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후방을 향한 공격

기뢰에 막혀 바다 위를 한 달 동안 무의미하게 맴돌다가 원산에 겨우 행정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11월 16일이 되었을 때 인공호수인 장진호(長津湖) 인근의 하갈우리(下碣隅里)까지 진격하였습니다. 개마고원(蓋馬高原)초입인 이곳은 협로로 연결되어 있어 앞으로 나갈수록 전진이 어려웠고 더구나 해발 고도 1,000~2,000미터의 고산지대여서 기온이 영하2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연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가 최종공세를 명령하자 동부지역의 미 제10군단도 11월 27일 진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때 군단장 알몬드는 제1해병사단에게 장진호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방향으로 진격하여 서부전선의 제8군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무 앞만 보고 공격만 하다가 벌어진 전선의 간격을 막기 위해 내린 고육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미스(Oliver P. Smith) 미 제1해병사단장은 보급로와 임시 비행장 건설이 먼저 이루어진 후에야 사단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여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는 이후 놀라운 기적을 연출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 미 제1해병사단장 ]


  준비를 마친 미 제1해병사단은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柳譚里)로, 제5해병연대가 무평리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11월 27일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10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이 만들어 놓은 포위망 안으로 제1해병사단이 유인되어 있던 상태였고 이런 놀라운 사실이 정찰대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방팔방에서 제1해병사단을 향하여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더불어 밤에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기온은 오히려 중공군 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11월 30일,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사단장은 가장 앞서 있던 양 연대를 12월 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무려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요한 방해를 물리치고 600여명의 들것 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이룬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미 제1해병사단이 이곳에 이룩한 신화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제 하갈우리에는 4,300여명의 부상자를 포함한 10,000여명의 병력과 1,500여명의 피란민 그리고 1,000여대의 차량이 집결하여 있었습니다.


[험로를 통하여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


  중공군 제9병단 예하 8개 사단에 포위된 이들이 황초령을 넘어 함흥까지 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때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사단장은 최소한 2개 대대가 마지막까지 활주로에 잔류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행동이고 해병대 역사상 그 같은 경우는 없었다고 일언지하 거절하였습니다. 단지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사지를 탈출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12월 6일,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스미스 사단장은“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습니다.


  유담리와 하갈우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격멸하는데 실패했던 중공군 제9병단은 4개 사단을 황초령 일대에 추가 투입하였지만 해병대의 의지는 중공군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해병대는 살인적인 혹한과 더불어 그들을 가로막는 중공군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황초령을 넘었고, 12월 11일 드디어 함흥을 거쳐 흥남에 도착하여 철수작전을 완료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 섬멸할 경우, 미 국민들이 입게 될 심리적 충격을 잘 알고 있어 연일 매체를 통해 포위섬멸은 시간문제라고 선전하던 중이었고 미국 언론들도 미 제1해병사단의 포위와 철수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존심을 건 상징적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결국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는데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이와 맞섰던 중공군 제9병단은 거의 궤멸되어 이후 4개월 동안의 부대정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중공군이 미 제1해병사단에게만 매몰되어 있다 보니 함경도 깊숙이 진출한 미 제10군단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의 살신성인과 같은 투혼으로 아군은 전력을 보존하였고 반면 중공군은 이후 벌어진 제3차 공세에 제9병단을 동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대한민국의 수호였습니다.

 

미련 없이 내어준 평양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한 11월 28일, 맥아더는 워커 제8군사령관과 알몬드 제10군단장을 도쿄의 유엔군사령부로 소집하여 향후대책을 논의했는데, 이때까지도 맥아더의 두 선봉장들은 상황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워커는 평양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했고 알몬드 또한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의 중공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맥아더가 이들 야전지휘관의 보고를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평양을 정점으로 하는 선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였습니다.


[11월 말까지만 해도 중공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제2사단이 군우리에서 붕괴 당하자 유엔군은 커다란 충격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중공군에게 밀려난 국군이 과오를 감추기 위해 엄살을 부렸던 것으로 치부하던 분위기였지만, 미군 정예사단의 궤멸은 어느덧 중공군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12월 3일, 대규모 중공군이 성천을 향해 남하중이라는 보고를 접하자 워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맥아더에게 평양에서 철수하겠다고 건의했습니다. 워커는 중공군이 평양에서 유엔군 주력을 포위격멸을 기도한다고 판단하였을 만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은 공식적으로 12월 4일 아침부터 평양을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나 미 제8군 예하부대들이 이미 평양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불과 일주일전 확인된 평양확보 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워커는 현 단계에서 제8군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는 것뿐이라는 극히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8군은 평양에 산재한 각종 시설과 수송하기 곤란한 2,000여 톤의 보급품을 파괴하여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후 서둘러서 남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사실 말이 후퇴였지 12월 23일에 평양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38도선 일대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온 도망이었습니다. 단지 중공군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은 기동장비가 낙후된 중공군이 추격에 나서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평양을 철수하는 아군의 모습]


  이들의 철수행렬 옆에는 수십만의 피난민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추스르기에만 급급하였던 제8군은 민간인 철수대책을 수립하지 못했으나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아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대규모로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정점이 부교를 이용할 수 없던 피난민들이 대동강을 건너기 위해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파괴된 철교를 건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버리고 엄동설한에 아이를 앉고, 업고 줄지어 남으로 향하고 있었고, 내려 갈수록 피난민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습니다. 이들은 끔직한 북한정권의 학정을 피해 오로지 자유를 찾아 내려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2차 공세에 임하는 중공군의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엔군이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에서 강력히 저항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예상되는 아군의 격렬한 반격을 우려한 마오쩌둥은 숙천-순천선 이북에서 일단 쉬면서 주력부대를 재정비한 후 평양으로 진격하도로 명령했을 정도였습니다. 12월 1일경 중공군은 지쳐서 거의 탈진상태에 있었고 또한 최초 공세 시 휴대하였던 모든 보급품이 바닥나고 재보급 또한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


  만약 제8군이 평양 북방과 원산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공군과 해군의 도움을 받아 강력히 저항했다면, 1.4후퇴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평양-원산을 연하는 지역은 직선으로 불과 20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므로 한반도 전체로 볼 때 저항선을 구축하기 가장 좋은 위치였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동안 남이던 북이던 이를 방어에 이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행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엔군은 싸우지도 않고 단지 놀라서 도망가고 중공군은 반대로 지쳐서 공격을 멈추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일단 38선에서 후퇴를 멈추자 결국 전쟁은 석 달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흥남 철수작전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 적진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때 함흥-원산해안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흥남항에 집결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5,000여명, 차량이 1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여톤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하여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영웅적인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철수도 병행되었습니다.


  교두보 밖에 중공군이 몰려들기는 하였지만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호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력 대부분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허물어져 내렸고 남은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중공격으로 만들어진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흥남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습니다. 아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방책이 사실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평양철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남북 간의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여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던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합니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해상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알몬드는 최초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으나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부두지역으로 쇄도하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선편이 닿는 데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극적인 조치로 98,000여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철수작전이었습니다. 때문에 흥남철수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구출되지 못하고 흥남 일대에 남아있는 피난민도 이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당시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래가 없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폭격 덕분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시 보다도 70퍼센트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나면서 파괴되는 흥남항]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려간 아군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남으로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북진은 불과 25일만 달콤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은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로 전쟁의 종결을 희망한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예상과 달리 유엔군이 평양을 쉽게 포기하고 38선까지 신속히 철수하자 중공군은 1950년 12월 6일 무주공산이 된 평양을 쉽게 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추격을 개시하였는데, 현대식 수송 장비를 사용하여 후퇴한 유엔군과 달리 중공군은 도보, 수레, 우마차, 심지어 쌍봉낙타까지 이용하여 시간이 갈수록 간격이 더욱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제공권은 완전히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중공군은 야간에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제8군이 평양으로부터 임진강 방어선까지 도망치듯이 200여 킬로미터를 후퇴하였던 2주 동안 평양 남쪽부터 38선 이북의 광활한 지역은 무인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무주공산이 된 평양에 입성하는 중공군]


  이런 상황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유엔군이 중공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기피하여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2월 14일경 38선 일대인 임진강~화천~양양을 연하여 주저항선을 선정하고 서부전선은 미군이, 동부전선은 국군이 전담하는 등 임무를 분담하였지만 문제는 전투의지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불리하게 진행된 전쟁을 간신히 역전시켜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의 결정타에 순식간 재역전 된 상태였는데, 이런 경우는 사실  전의를 쉽게 회복하기가 힘듭니다.


  12월 21일, 추격하여 내려온 중공군들이 나타나면서 이제  38선 일대에서 중공군과의 일전은 예정되었습니다. 맥아더는 제8군에게 서울을 방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그 일환으로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퇴계원 일대에 배치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와 달리 제8군에게서 서울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제8군은 서울 북방에 저장된 보급품을 한강 이남으로 이동시키고 사령부도 형식상 최소 인원만을 서울에 잔류시킨 후 대부분 대구로 이동시켰습니다. 한마디로 중공군이 공격해올 경우 접촉을 피하고 다시 철수하겠다는 패배의식이 팽배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중공군에 놀라 유엔군은 후퇴하였지만 중공군은 이렇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중요한 때에 제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워커는 중공군의 공세에 일선부대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자 일일이 찾아다니며 격려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던 12월 23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대 시찰을 나가던 워커는 탑승한 지프차량이 현재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에서 서울방향으로 남하 중이던 국군 제6사단 트럭과 충돌하면서 현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시 패튼(Geroge S. Patton Jr.)의 부하로 공세기동전에서 이름을 높인 워커는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방어전의 대가로도 전사에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6.25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 연이어 벌어진 1950년 하반기를 현장에서 맹렬하게 지휘하였던 용장이 어이없게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맥아더는 당시 미 육군본부 작전 및 행정 참모부장이었던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를 후임으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시에 제82공수사단장과 제18공수군단장으로 이탈리아 전선과 노르망디 상륙과 이후 유럽전선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바 있던 경험이 풍부한 야전지휘관이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제8군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는 12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임무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부대현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여 자신은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이곳에 머물며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천명하여 이 대통령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중공군의 공세에 너무 놀라 후퇴하기 바빴던 전임자 워커가 다시 낙동강까지 유엔군의 철수를 고려하자 몹시 실망한 상태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한국정부나 한국군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리지웨이가 신임 제8군 사령관이 되자 유엔군 전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가슴의 수류탄이 인상적인 신임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그는 상징적으로 양쪽가슴에 두발의 수류탄을 매달고 전선의 최전방지역을 직접 순시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런 사령관의 의지 때문에 대구에 위치하고 있던 주요 참모들도 다시 전방지휘소인 서울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선에서는 적극적인 방어를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속속 시행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이후 계속된 후퇴에 전의가 바닥까지 내려왔던 제8군은 새로운 지휘관의 부임과 더불어 새롭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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