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낯선 군대의 등장

구름위 2013. 3. 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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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에서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감격스럽게 수통에 물을 담던 10월 26일, 인근 벽동을 향해 진격하던 제6사단 2연대는 동림산 근처에서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정체불명의 적 부대와 격전을 벌였습니다.  제3대대가 분산되자 즉시 제2대대를 투입하였음에도 전세가 계속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이제까지 패주하기에 급급하던 북한군의 반격으로 보기 힘들만큼 강력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적의 거센 저항에 피해가 속출하였습니다.]


  38선 돌파이후 처음 겪는 이러한 강력한 적의 저항이 있게 된 이유를 제2연대는 그날 오후에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복장의 적을 생포하였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은 중공군이었고 10월 19일부터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놀랄만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그날 오후에 불상의 대부대가 온정리를 점령하자 앞만 보고 북진하던 제2연대는 순식간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봉착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의 빗발치는 공격이 개시되자 제2연대는 순식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제2연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군 부대 중 가장 앞서 가던 제6사단 예하 모든 부대들이 거의 동시에 처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반전에 제6사단 지휘부는 당황하였고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하였습니다. 10월 27일, 압록강에 진출하여 감격하고 있던 제7연대에게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사단본진도 후퇴하기 급급하였을 만큼 상황이 나빠 이들의 퇴로를 확보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가장 북진의 최선봉에 서서 초산에 도달했던 제7연대의 안위는 풍전등화의 상태로 순식간 바뀌었습니다.


[중공군의 등장으로 전선의 상황은 급변하였습니다.]


  한편, 제6사단 좌측에서 운산을 공략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도 10월 25일 11시, 갑자기 나타난 전혀 다른 적 부대와 교전하였고 생포된 포로를 통하여 중공군의 개입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상급자인 밀번(Frank W. Milburn) 미 제1군단장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였으나, 유엔군사령부의 판단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10군단이나 제8군 사령부 모두 “중공군의 조직적인 개입은 있을 수 없으며 북한군에 편입된 소수의 중공군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을 만큼 맥아더가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에게 보고했을 때의 시각과 전혀 다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밀번은 국군 제1사단의 공세가 둔화된 틈을 타서 11월 2일, 미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제1사단을 추월하여 선두에 서라는 지시하였을 하였을 만큼 상황인식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결과 제1기병사단은 곳곳에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고 순식간 고립되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미 제10군단이 담당한 동부전선의 상황도 급변하였습니다.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진격작전에 투입되었는데, 11월 2일경 장진호 초입인 수동 일대에 갑자기 출몰한 대규모의 중공군과 치열한 근접전투가 벌어져 비록 700여명의 중공군 을 사살했으나 해병대 또한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날씨마저 급변하여 -20~-25℃까지 내려가는 혹한기가 되었고 이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에게는 계속 진격명령이 하달되었고 선봉인 제7해병연대는 진흥리, 고토리, 하갈우리를 거쳐 11월 24일에 유담리까지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장진호일대에 은밀히 포진한 수 개 사단의 중공군이 쳐 놓은 포위망 안으로 미 해병대가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혜산진에서 중국 쪽을 경계하는 미 제7사단]


  이원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은 11월 2일, 풍산까지 진출하여 적을 격파하고 추격 작전을 전개했는데 그들이 상대한 적이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11월 15일, 풍산을 방문한 알몬드(Edward M. Almon) 미 제10군단장은 바(David G. Barr) 미 제7사단장에게 북진을 독촉하여 예하 제17연대가 11월 21일 압록강변의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여 한만국경선에 도착한 2번째의 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이 물이 말라버려 폭이 불과 겨우 2미터로 줄어버린 압록강 건너의 중공군을 보았는데, 앞으로 그들을 상대할 적이었습니다.


  통일의 희망을 안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간 국군과 유엔군 각 부대들은 이처럼 10월 25일부터 전선 전체에 걸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북진의 달콤함이 불과 한 달도 못되어 끝나고 꿈이 악몽으로 바꾸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은 아군에게 너무나 갑작스런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사이에 18개 사단 25만 여명으로 구성된 동북변방군(東北邊方軍)을 편성해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는데, 그 때는 북한군이 가장 극성기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다만 이때는 중국의 보편적인 정책인 “적대국가와 국경을 같이하지 않는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사상에 따라  만약을 대비하기 위한 사전조치였습니다.


[중국의 참전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마오쩌둥]


  그런데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철수한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의 공동명의의 스탈린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했을 만큼 상황이 돌변하고 아군의 38선 돌파가 점차 가시화되자 중국의 생각도 복잡 미묘해 졌습니다. 일단 9월 30일,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는 국경절 연설에서 중국 가까이에 적대세력이 근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한반도나 6·25전쟁을 구체적으로 직접 거론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10월 1일, 박헌영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군의 직접 참전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스탈린이 주중 소련 대사를 통해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하자 중국의 태도도 보다 적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즉시 정치국 상임위원 회의를 소집해 파병문제를 토의에 붙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10월 3일,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하여 “미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보다 직설적인 의사를 표현하면서 군사개입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펑떠화이와 김일성]


  10월 8일, 갑론을박의 격론 끝에 마침내 마오의 결단으로 파병이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마오는 압록강 북쪽에 배치해둔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개칭하여 펑떠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10월 15일 압록강 건너 입북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유엔군의 공식 북진 개시일보다 하루 앞선 결정이었을 만큼 즉각적인 조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기회가 되면 한반도에 즉시 개입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와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마오도 미국을 두려워하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빨리 참전을 결심하였던 것은 소련 공군의 참전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10월 10일, 마오는 비밀리에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1개 사단 규모의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직접 참전에 난색을 표명하고 대신 10개 사단 분량의 전쟁물자 지원만을 약속하여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오는 만주에 출병해 있는 펑을 소환하여 참전 여부를 재검토했을 만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고 이것은 이후 중-소 이념갈등의 원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오는 소련공군의 지원여부에 관계없이 출병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게는 한반도의 의미가 소련에 비해 더욱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중공군]


  드디어 10월 19일 야간, 선두부대로 선정 된 12개 사단이 접경지대에서 압록강을 도강하고, 10월 20일에는 지원군사령부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大楡洞)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아군과 교전이 벌어진 10월 26일에 6개 사단으로 구성 된 제2진이 압록강을 도강함으로써, 불과 일주일 만에 총 18개 사단 26만 여명의 대부대의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들 중공군 부대는 황혼과 함께 이동을 개시하고, 날이 밝으면 은폐하여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완벽에 가까운 놀라운 기습 전개였습니다.

처음 중공군 지휘부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원산 선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고 부대를 정비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따라서 이틈을 노려 청천강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양을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한 파죽지세의 진출을 계속하자 애당초 계획을 급히 수정하여 중요지역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전술로 바꾸었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은 화력이 비교적 미약한 국군 제2군단을 우선 기습하여 섬멸한 후에 미군과 영국군을 공격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하달하였을 만큼 당시 아군의 진격 상황을 세밀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이미 아군의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습니다.]


  지시에 따라 평안북도 운산(雲山) 온정리(溫井里) 일대에 은밀히 전개를 완료한 중공군 주력은 10월 25일, 국군이 담당한 전선 전면에 대대적으로 출몰하면서 처음으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었습니다. 중공군 전사에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제1차 전역(戰役)이라고 부르는 중공군 제1차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고 중공군은 국군지역을 돌파하여 유엔군의 후방으로 진출하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선의 좌익인 영변(寧邊)에서 국군 제1사단이, 우익인 비호산에서 국군 제7사단이 선전함으로써 적의 기도를 일단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선의 중앙부이자 돌출부인 초산(楚山)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북진의 가장 앞에 섰던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초산의 압록강가에 도달하였으나 순식간 중공군에 의해 배후가 차단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고립된 제7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아군이 초산으로 몰려들면 일거에 격멸할 회심의 계획을 수립하고 중공군은 길목마다 지키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방에서 출몰한 중공군과 교전 중이던 국군 제2군단은 막상 제7연대를 구출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제7연대로 하여금 분산하여 알아서 탈출하도록 지시를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제7연대의 비참한 몰락을 불러왔지만 반면 중공군의 국군 유인계획을 실패하도록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국군 담당지역으로 돌파구를 열려고 시도한 중공군의 전략은 한마디로  미군을 겁내지만 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전선이 고착화된 1951년 여름까지 계속된 패턴이기도 하였습니다. 북한군은 1950년 7월 초, 죽미령에서 처음 미군과 교전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정신없이 몰아붙여 자신만만하게 참전한 미군당국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반면 중공군은 이처럼 상당히 신중하였습니다. 어쩌면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북한군은 모르는 상대를 몰아붙여 상대를 잠시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중공군은 미군의 잠재력과 능력을 잘 알고 신중을 기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프로들이 주도하는 형태로 급속히 성격이 바뀌어갔습니다.


  그런데 국군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한 중공군의 전략은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초기에 미군은 중공군과 직접 조우하지 못하였으므로 상대의 규모나 능력을 전혀 몰랐습니다. 따라서 국군 제2군단이 대규모의 중공군 출현사실과 뛰어난 전투력에 대해 제8군에 보고했으나, 미군은 전투에 실패한 국군부대들이 변명을 위해서 중공군의 규모와 능력을 과장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공군 등장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는 실수를 스스로 범하도록 만들어 버린 셈이 되어 버렸고 이것은 후일 더 큰 화를 당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유엔군 최고지휘부는 중공군 등장의 의미를 애써 축소시켰습니다.]


  미군이 주도하고 있는 유엔군의 막강한 공군과 포병을 두려워 한 중공군은 자신들의 장기인 야간전투, 근접전투를 폭 넓게 실시하여 우선 국군을 급속히 혼란에 빠뜨리고 더불어 미군의 판단을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비록 중공군이 제1차 공세를 애초의 의도대로 완전하게 성공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시키고 후속부대의 전개를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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