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낙동강아 잘 있거라

구름위 2013. 3. 1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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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 09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드디어 제8군의 반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피 말리는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었던 힘들 중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뒤엎을 수 있다는 간절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대처럼 성공적으로 상륙부대가 적의 배후 깊숙한 곳을 강타하는데 성공하자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고 있던 아군은 교두보를 박차고 나와 북한군을 돌파하여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해 인천상륙부대와 연결하는 사전계획대로 진격을 개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김천에 설치한 전선사령부 예하의 1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이 낙동강가에 촘촘히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공군의 후방차단으로 보급 및 병력보충이 불가능하여 총병력은 7만 여명에 불과했고 그 대부분도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신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초훈련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여 전투력도 모자랐고 식량 및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사기도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전선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총 16만여 명까지 늘어나 있었고 전차, 야포 등의 중화기 전력은 어느덧 10배 이상의 우위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하늘과 바다에서의 전력차이는 비교불가의 상태일 만큼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아군의 전선 돌파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천에 아군이 상륙한 이후인 9월 16일 까지만 해도 전장의 주도권을 아직도 북한군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북한군은 7월 31일 이후 거의 고착화되어 있던 마산-왜관-영천-포항을 연하는 선에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된 9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어느 쪽이 공자(攻者)이고, 어느 쪽이 방자(防者)인지도 모를 정도로 전선이 혼란스러웠던 상태였고 더구나 기상악화로 항공지원이 곤란하자 제8군의 공격은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대응은 집요하였고 전선 돌파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9월 18일, 비가 그치고 기상이 호전되자 돌파구를 개척하려 왜관-김천축선에 B-29폭격기 42기가 집중적인 공중폭격을 가하였으나 공격은 진척이 없었고 반격의 선봉으로 내정 된 미 제1기병사단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사단장까지도 유엔군의 인천상륙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계속 낙동강에만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당시의 낙동강방어선에 모여든 북한군은 자신들의 정확한 처지도 모르고 오로지 공격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자 제8군사령관 워커의 근심은 커져갔고 맥아더는 군산에 추가적인 상륙작전 준비를 지시했을 만큼 초조해 하였습니다. 자칫하면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이 경인지역에 고립되어 버릴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될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때 이런 어려운 고비를 뚫었던 것은 국군 제1사단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원래 주공으로 예정되었던 미 제1기병사단의 우측에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의 방어지역을 공격하던 중 가산산성 우측계곡이 텅텅 비어있던 것을 알고 이곳으로 신속히 돌파를 감행하여 9월 19일에 기습적으로 갈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갈뫼가 아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구공격에 투입되어 있던 북한군 제1, 3, 13사단의 동측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낙동강가의 북한군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의 선전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19일 14시경, 북한군 제3사단을 붕괴시키면서 왜관을 탈환하고 이어서 저녁 무렵에는 낙동강을 건너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2일, 국군 제1사단이 지난 8, 9월 내내 양측이 명운을 걸고 피로 물들였던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자 나머지 국군과 유엔군의 모든 부대들은 낙동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릴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일순간 붕괴되자 북한군은 소백산맥과 금강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 21일경부터 인천상륙 소식이 전선에 전파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북한군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며 독전을 강요하였지만 이런 비이성적인 노력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드디어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낙동강으로부터 전선을 밀고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을 벗어나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워커로부터 경부가도를 따라 38선으로 밀고 올라갈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선봉은 제7기병연대였습니다. 제7기병연대는 보다 신속하게 전방을 개척하고자 린치(James H. Lynch)중령이 지휘하는 예하 제3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9월 22일 08시, 다부동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중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린치특임대(TF Lynchs)는 다음날 상주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의 저항 태세를 점검한 결과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해도 될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일, 사단의 후속부대들이 상주에 집결을 완료하자, 린치는 그의 특임대에 배속된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에 수색대를 합류시켜 “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을 따라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저항하지 않는 적은 대응하지 말라”는 진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린치의 판단대로 전선은 밀고 댕기며 교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군의 진격이 멈춘 곳에서 전선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일 보은으로 출발한 수색대는 오후에 청주를 지나 저녁에 진천 남쪽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그것도 북한군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색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군이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북한군 수송대가 미군 전차를 발견하고는 3대의 트럭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공교롭게도 트럭에는 휘발유가 가득 실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연료를 보충 받은 수색대는 전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전진을 계속하여 그날 20시 30분경 천안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교통정리를 하던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자, 북한군 병사가 얼떨결에 오산방향을 안내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까지 발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됩니다.]


  쉬지 않고 오산남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전방에서 갑자기 치열한 사격이 벌어져 노출된 전차병 1명이 전사하면서 일순간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곧 교전이 멈추었습니다. 전방 부대는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산으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사단 31연대였는데, 다행히도 오인으로 인한 아군간의 교전이 확대되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으로 인천상륙부대와 낙동강 반격작전 선두부대가 감격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선두부대가 조우한 장소가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처음 접촉하여 망신을 당한 죽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8시경, 미 제1기병사단 본대가 상륙부대인 제7사단의 본대와 연결 되면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전선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맥아더의 대담한 도박은 제8군의 낙동강 반격이 성공함으로서 단숨에 북한군 13개 사단의 배후를 포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고 38선을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지만 포위망 안에 갇힌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의를 상실한 잔적을 소탕하는 것보다 전쟁이 종결을 위해서 전진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 지역에 쪼개져서 게릴라가 되어 갔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고 천천히 소탕하면 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지리산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 패잔병 게릴라들은 두고두고 후방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엔군의 놀라운 진격에 일순간 패퇴하였지만  북한군 대부분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