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6·25/유엔군 반격 / 북진'

구름위 2013. 3. 1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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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가의 혈전이 최고로 치닫고 있던 1950년 9월 14일 밤, 마지막 배가 인천항 외항 해역에 진입함으로써 총 261척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 제7기동함대는 집결을 완료하였습니다. 이들 선단에는 총 7만 5천명의 국군 및 유엔군 병력이 승선하고 있었고 이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차례대로 인천으로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2시, 상륙명령이 하달되자 칠흑 같은 야음을 뚫고 19척의 선두함대가 종대대형으로 인천항으로 향하는 좁은 비어수로(飛魚水路)를 따라 인천항을 향해 전진하면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요도]


  사실 6·25전쟁 초기의 향방을 일거에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은 상륙병력과 장비를 실은 선박들이 일본 및 부산항을 출발한 9월 12일부터 본격 개시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각지에서 출발한 이들 함정들이 인천 주변 해역으로 몰려듦과 동시에 13일부터 상륙예정지인 인천항 일대 요충지에는 쉴 새 없는 폭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불벼락에서 살아남은 북한군 해안포의 간헐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05시부터 8기의 함재기가 아군이 최초로 상륙할 월미도 일대를 폭격함과 동시에 인천항 주변에 도열한 군함으로부터 함포세례가 이어지자 더 이상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탑승한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적재한 전차상륙함은 녹색해안(Green Beach)로 명명된 월미도 해변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06시 30분, 무사히 해안선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상륙군은 곧바로 월미도 내륙으로 진출하였습니다. 해안가의 북한군은 이미 사전 포격과 폭격으로 제거된 상태였지만 일부 북한군이 섬 곳곳에 만들어진 동굴에서 저항하자, 후속 상륙한 도저전차가 입구를 봉쇄해 북한군 잔당을 생매장시키고  동시에 화염 방사기로 잔적을 소탕하면서 08시경 월미도를 완전 장악하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방법은 태평양전쟁 당시 옥쇄를 각오하며 치열하게 저항했던 일본군을 소탕하며 얻은 전투 기법이었습니다.


[화염방사기로 월미도 정상의 북한군 통신소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


  당시 월미도를 방어하고 있는 북한군은 제226해안포병대대와 제64해안보병연대 병력으로 구성 된 약 400명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살 108명, 포로 136명 그리고 100여명이 생매장되면서 완전히 붕괴된 반면, 아군의 피해는 상륙초기 해안 기관총 사격으로 사상 당한 17명이었을 만큼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동안 가장 긴박한 순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비록 월미도를 장악했지만 썰물로 인하여 함대는 후방으로 물러났고 오후 물때에 후속 주력부대의 상륙전까지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대는 적 지역에 고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전차 같은 중화기를 앞세워 인천에서 방파제를 건너 월미도로 진격하여 온다면 월미도에 상륙한 1개 대대만으로 얼마나 교두보를 사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휘함 마운트매킨리(USS Mount McKinley)호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던 맥아더도 긴장하였고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함재기들이 출동하여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40킬로미터 지역의 도로를 맹폭격하면서 북한군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강변까지 일사천리로 진출한 미 해병대]


  그리고 오후 물때가 되자 제5해병연대 본대가 17시 33분, 월미도 건너편에 설정된 적색해안(Red Beach)으로 상륙하면서 월미도를 사수하던 3대대와 연결되었고, 거의 동시에 제1해병연대가 인천항 남측의 낙섬 인근 해안에 설정된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두 연대는 9월 16일 새벽까지 인천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횡단하며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5해병연대가 동쪽으로 진출해 9월 18일 아침에 김포비행장까지, 제1해병연대는 부천을 거쳐 19일 밤 영등포 외곽까지 진출하였고 후속하여 9월 17일부터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낙동강에서 반격하여 올라오는 북진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오산방향으로 남진하였습니다.

맥아더의 집념 그리고 반대

 인천상륙작전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맥아더 원수의 고집에 의해 실행되었다고 하여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만큼 그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맥아더는 6월 29일, 전쟁발발 후 한강방어선 시찰당시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는 북한군을 일거에 격멸하고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병참선의 요충인 서울을 측방에서 기습 공격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하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더불어 서울을 조속히 탈환하여야 한국 국민들에게 정치적,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는 신속히 참전한 미군 전초부대조차 무참히 붕괴되며 후퇴를 거듭하던 7월초, 이미 구체적 작전수립을 지시하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미 극동사령부는 서해안의 인천, 군산, 그리고 동해안의 주문진에 상륙하는 세 가지 제안을 상정하였고 이중 인천으로 상륙하는 100-B계획을 채택하였으나, 8월이 되어도 북한군 공세가 예상 외로 강하여 막상 상륙작전을 실행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선의 상황과는 별개로 미 합참뿐만 아니라 극동군 해군조차도 인천상륙을 처음부터 반대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는데 사실 모두 타당한 분석이었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9미터나 되어 상륙시간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낙동강 방어선과 거리가 너무 멀어 상륙군이 각개 격파될 위험성이 크다. 현재 보유한 원거리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고 상륙병력 차출 시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유지가 곤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병력이 한반도 집중되면 일본방어에 공백이 발생한다.”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서라도 인천으로 상륙하여야 한다고 강조했고, 더불어 만일 낙동강 방어선부터 차근차근 북진할 경우에 예상되는 약 10만의 아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러 본토에서 극동군사령부를 일부로 찾아온 콜린스(Joseph L. Collins) 미 육군 참모총장이 맥아더에게 오히려 설득되었던 사실은 그의 신념이 어느 정도로 강렬하였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결국 맥아더의 생각대로 계획은 진행되었고 9월을 목표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상륙전 함상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국군 해병대]


  맥아더는 상륙군으로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을 주축으로 미 제10군단을 재창설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극동군사령부 참모장인 알몬드(Edward Almond)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미군은 극심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 예정된 시간 내에 부대를 구성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비록 예비역을 소집하여 연대별로 부대를 구성하는대로 배에 실어 일본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작전 개시 직전까지 완편 된 부대의 참가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결국 국군 제1해병연대가 미 제1해병사단에, 국군 제17연대가 미 제7사단에 배속됨으로써 작전 직전에 부대를 완편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국군도 역사적인 작전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상륙작전은 치밀한 사전정지 작업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특히 인천은 수로 조건이 나빠 야간에 대규모 선단 운행이 불가능하고 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일거에 상륙군을 투입하기 구조적으로 어려워 더더욱 상륙군이 적진에 고립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따라서 아침과 저녁 만조시간에 맞추어 2단계 상륙계획을 작성했고 12시간의 간격동안 함포사격과 항공차단으로 북한군의 증원을 저지하는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적색해안에 상륙하는 미 제5해병연대 병사들]


  더불어 상륙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클라크(Eugene F. Clark) 대위를 책임자로 하는 정찰대를 9월 1일 영흥도로 파견하여 인천항 주변의 북한군 배치 및 기뢰 부설 상황 등을 정찰하였고, 아울러 상륙 당일에 팔미도 등대를 수리해 함대 진입시간에 맞추어 점등함으로써 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작전 개시에 맞추어 상대방이 오판하도록 기만책을 병행하여 인천에 대한 포격과 동시에 동해안의 영덕과 삼척, 주문진 그리고 서해안의 군산과 남포 일대에 대해 양동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한마디로 치밀한 작전에 의해 거대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유엔군의 인천상륙은 대성공한 기습작전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 중국과 구 소련의 많은 자료가 공개되면서 이와 관련하여 종종 반대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다는 견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이나 소련은 물론 북한 또한 사전에 상륙작전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는 주장인데, 이에 대한 논란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천 외항에 집결된 상륙함대와 공중지원 중인 코르세어 공격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언급되는 것이 1950년 8월 유엔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마오쩌둥이 북한 지도부에 경고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는 소련 측 첩자들이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습니다. 상륙군의 발진기지였던 일본에서는 거의 누구나 상륙작전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반공개 상태로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서 북한 간첩이 이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보름전인 8월 28일부터 경인지역에 북한군이 대폭 증강되었던 사실도 사전에 북한군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북한은 8월 28일 무렵, 인천방어지구사령부를 새롭게 창설하여 예하에 제106, 107연대 외에 제64해안보병연대를 추가로 배속시켰고, 9월초에는 철원에 주둔 중인 북한군 제18사단을 경인지역으로 전개시켰는데 이 부대는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갖춘 완편사단으로 T-34 전차 18대로 구성 된 제42독립전차연대까지 배속되어 있던 정예부대였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모든 것을 낙동강 돌파에 쏟아 붓고 있어서 후방이라 할 수 있는 서울지역에 이 정도의 정예전력을 유지하였다는 자체가 바로 상륙작전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북한군은 전력을 경인지역에 배치하여 상륙전에 대비하는 듯 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 거대한 상륙작전을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하면서 완벽하게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여 위의 주장처럼 막연하게라도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북한 측에서 예상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에 의한 성공이 아니라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의한 공격성공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완벽하고 성공적인 기습이었다는 그 동안의 주장은 유엔군 측의 일방적인 과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인데, 사실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예상했으나 지역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르망디상륙작전은 독일군의 의표를 찌른 기습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의 북한도 막연하게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을 뿐 정확한 날짜와 지역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1950년 8월 29일자 김일성이 행한 연설문을 보면 이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유엔군의 상륙을 예견하면서 예상지역으로 인천 외에도 초도, 남포, 안주, 철산, 다사도, 원산, 함흥, 신포 등  한반도 해안가의 거의 모든 지역을 나열하였는데, 이런 주장은 군사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단지 상륙전을 대비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여러 의혹제기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은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작전개시와 더불어 북한군을 혼란하게 만들기 위하여 동해안에서는 요충지인 삼척과 마양도에 대한 포격이 개시되었고 포항 장사동에서 소규모 상륙작전을 실제 감행되었습니다. 또한 서해의 군산 주변에서도 도로, 교량 그리고 철도 등에 대한 폭격은 물론 소규모의 미-영 해군특공대가 실제로 침투작전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군산 상공에 “시민들은 해안에서 철수해 내륙으로 피난하라”는 전단지가 살포되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영국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평양 근처에 있는 남포 일대와 평북 정주군 앞바다의 달양도를 공격해 북한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북한이 유엔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을 직접 깨닫기 시작한 것은 9월 13일 무렵, 함대가 인천 앞바다 출현하여 인천 도심을 맹폭하기 시작한 이후였지만 엄밀히 말해 이때부터 상륙작전은 시작된 것이었고 북한의 대책은 사후대응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유엔군이 상륙작전 시 여러 곳에서 동시에 행한 기만작전 때문에 북한군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완벽한 기습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알아 본 것처럼 인천상륙작전은 전략상으로 대성공을 거둔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군 내부에서도 수많은 반대 의견이 많았을 만큼 작전을 실행하는데 제약사항이 많았고 그것은 반대로 적들이 내심 안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흔히 인천상륙작전을 ‘세기의 도박’이라 하였을 만큼 단지 전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주위의 우려는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세계 상륙작전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인천 도심을 확보한 미 제1해병사단]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에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남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있어왔던 수많은 다른 상륙작전과 상당히 대별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데, 사실 그보다 썰물 때 들어나는 갯벌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갯벌만 없다면 썰물 때도 상륙은 가능하지만 인천일대의 거대한 갯벌은 밀물 때만 상륙할 수밖에 없는 시간적 제한을 가하였습니다. 즉 인천상륙작전은 시간과 공간의 2중 제약을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입니다.


  둘째, 적의 최소예상선과 최소저항선에 아군의 핵심 전력을 일거에 기습으로 투사시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한 작전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서울의 인접이면서도 구조적으로 적의 방어선이 엷은 지역이 바로 인천이었는데 바로 이곳의 상황과 전략적 가치를 유엔군, 엄밀히 말해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전투력을 격멸하는데 있어 병참선의 차단이 효과적이며, 특히 신장된 병참선의 경계는 전방전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었던 낙동강 방어선의 팽팽한 대치상황이 이 작전 성공 후 일거에 무너져 내린 것만 보아도 뚜렷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썰물 때 드러난 적색해안(Red Beach) 갯벌의 모습]


  이러한 뚜렷한 전과는 지휘관의 일관된 신념과 철저한 준비에 의해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전략적 안목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였습니다. 맥아더는 조건이 최악인 인천을 선택함으로써 북한군을 기만하고 기습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압도적인 제해권과 제공권은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전세 반전의 확실한 축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거대한 우회 기동을 통한 기습으로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적의 전투의지를 파쇄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아군이 빼앗고 국면을 일시에 전환시켜 버렸습니다.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지상반격작전을 감행했을 경우, 북한군은 금강선 등 최소 5개 이상의 방어선을 이용해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쳤을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아군의 막대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륙작전의 성공은 유엔군의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의 주체에서 이탈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6·25전쟁 개전 후 3개월 만에 전쟁을 일방적으로 주도하였던 북한군은 이후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며 전쟁의 주체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중국군 개입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군은 종전 시까지 중국군 의 작전을 지원하는 보조 역할만 수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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