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치열했던 서울탈환

구름위 2013. 3. 1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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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서울탈환을 위해 동진하면서 김포공항과 영등포외곽까지 진출하였고,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낙동강에서 치고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안양, 수원, 오산방향으로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 수복과 동시에 낙동강가 몰려있던 북한군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대담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도 서울이었는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만큼 이곳을 사수하려는 북한의 집념도 컸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9월 20일 새벽 2시,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가 김포공항에서 행주산성으로 최초로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을 만큼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강력하였습니다. 결국 엄청난 폭격으로 북한군의 저항 근거지를 제거한 후 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장악한 아군은 곧바로 신촌 방향으로 진격하여 들어갔고 21일 저녁에는 중앙청 바로 목전인 연희동 일대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진격한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시가지에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선 북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22일 아침, 노량진 한강일대까지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중앙청(현재 광화문)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9월 22일,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연희고지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였습니다. 목표까지 거리는 불과 1킬로미터 정도였지만 이곳을 요새화한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이틀이 지나도 점령은커녕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국군을 대신하여 미 해병대가 공격을 계속하였는데도 연희고지는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항공기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9월 24일 오후 천신만고 끝에 연희고지를 탈취하면서 북한군의 서울 서측방어선이 붕괴되었습니다. 더불어 미 제1해병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방향으로 진출했습니다. 인천상륙 후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을 만큼 이때의 전투는 격렬하였지만 적 1,750명이 사살 된 것으로 파악되었을 만큼 북한군의 피해도 극심하였습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피아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강 남쪽까지 순식간 진출하였을 때 당황한 북한은 최용건(崔庸建) 서해안방어사령관의 지휘로 경인지역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부대들과 사리원, 철원, 김천에 위치한 20,000여명 정도의 모든 가용 병력을 끌어 모아 서울에 투입하였고 또한 시민을 강제로 동원해 진지와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남쪽에서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 번 차지한 서울을 결코 내어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습니다. 아니 바로 직전까지 부산을 집요하게 위협하고 있다가 일순간에 반전 된 이러한 상황을 북한수뇌부는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었고 그만큼 서울 시내에서의 저항은 극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서울탈환이 지연되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낙동강에서 반격하여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려 수원방향으로 진출중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를 서울 공격부대로 추가 투입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미 제7사단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서울 남쪽에서 공격하자, 힘을 얻은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일제히 북한군을 소탕하고 서울중심부로 돌입하여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북한군이 격렬히 대항하였으나 사실 이 이상의 저항은 무리였습니다.


[환도식의 모습]


  9월 27일 15시 08분, 점령한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북한군의 저항은 종식되었고 서울시 전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완료한 국군과 유엔군은 28일을 기해 각부대별로 경계태세에 들어감으로써 전쟁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게 내어준 서울은 91일 만에 다시 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스런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상황을 환원시켰으나 동시에 새로운 과제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38도선 돌파의 문제였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까지 진격하게 되자 여기를  돌파하여 계속 북으로 나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까지도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었고 우리나라는 물론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와 준 유엔군 파병국가별로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38선에서 정지’든 ‘38선 돌파’건 모두가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였습니다.


[1947년 자유를 찾아 38선을 남하하는 일가족의 모습

우리의사와 상관없이 어느덧 분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먼저 전쟁의 제1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북진통일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수립하고 난 후 일관되게 주장해 온 내용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정부의 수뇌부가 가장 염려했던 것이 유엔군이 38선에서 정지하는 것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국토가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더구나 전쟁이라는 돌이키기 힘든 최악의 상황을 겪고 간신히 전세를 반전시킨 이 시점에서 통일을 성취하려는 열망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이 같은 배경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9월 20일의 연설에서 “만일 유엔군이 38선에서 정지하더라도 국군은 북진한다”라는 결의를 표명했고 이어서 9월 30일에는 국회가 이를 지지하였습니다.


  유엔의 깃발아래 파병한 국가들의 견해는 천양지차였는데 우선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고 전쟁 초기부터 적극 개입한 미국의 경우는 북진과 정지의견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원래 미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때의 목적은 38도선을 넘어온 북한군을 일소하여 전쟁 전의 상태로 원상 복귀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9월 하순 들어서 유엔군의 진격이 예상을 뛰어넘어 급속히 진행되자 38선 돌파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미국 정부는 전쟁 개입 초반인 7월부터 이에 대해 검토를 하였는데, 가장 큰 변수는 역시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개입가능성이었습니다.


[냉전으로 살얼음판 분위기였지만 미소는 직접 대결은 피하였습니다.

(1948~1949년 사이에 벌어진 베를린 봉쇄)]


  사실, 미국은 중국보다 소련의 개입을 염려하였는데 적어도 소련은 표면적으로 개입을 꺼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만일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단지 한반도의 문제만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의 동서간의 대치상황도 살얼음판 같았는데, 만일 소련군이 한반도에 투입된다면 유럽에서도 전쟁이 벌어질 개연성은 충분하였고 그것은 바로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부담 때문에 소련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상황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고 미국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오랜 내전을 끝내고 건국 된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가여서 국내의 전후수습에 전념해야할 입장이었고 또한 타이완과 티베트문제를 안고 있어서 한반도의 전쟁에 당장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정보 당국은 중공군의 능력이나 보유한 장비가 워낙 빈약하여 군사적으로 개입자체가 상당히 힘들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시기를 이미 놓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국의 개입을 경고한 저우언라이]


  이 같은 여건을 고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9월 11일, “중국과 소련이 개입할 염려가 없는 경우에 한해 지상작전을 북한지역으로 확대한다”라는 합참의 방침을 승인하고, 9월 27일 훈령을 맥아더에게 하달함과 동시에 유엔에 결의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했던 소련이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행사면서 제안은 부결되었고 이에 따라 10월 7일,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8개국은 38선 돌파결의안을 총회에 회부해 찬성47, 반대5, 기권7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습니다. 이제 북진에 대한 걸림돌은 없었고 마음 놓고 38선을 돌파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중국은 이미 8월 중순에 린바오(林彪)의 지휘로 25만 여명으로 구성된 제 4야전군의 18개 사단을 압록강 북쪽으로 이동시켜두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반도 안보와 관련하여 변함없는 중국의 입장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중국이 적대국과 국경을 연하게 되는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과 10월 3일에는 중국의 수상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해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감격스런 북진

1950년 9월 29일, 국군 및 유엔군 모든 부대를 통틀어 가장 북쪽에 진출해있던 부대는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었는데, 이곳 사령부에 “38선 인근 북쪽에 국군이 진격하는데 방해가 되는 적의 요지가 있느냐?”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한 사람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 겸 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정일권(丁一權) 이었고  질문을 받은 김백일(金白一) 제1군단장은 예하 제3사단의 정면인 하조대에 그런 곳이 있다고 답변하였습니다.


[38선을 돌파를 자축하는 제3사단 장병들의 감격스런 모습]


  그러자 정일권은 제8군사령관 워커에게, 국군 제3사단이 38선 북쪽에 붙어있는 북한군 방어진지로부터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있으므로 일단 이곳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워커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지만 본의 아니게 북진을 허락한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이었고, 허가를 받아낸 정일권은 9월 30일, 제3사단 23연대 진지를 직접 찾아가 현장에서 북진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38선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앞만 바라보고 있던 국군은 감격스런 일보를 내딛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0월 1일 05시, 국군 제23연대가 아군 중 제일 먼저 38선을 돌파해 14시에 양양에 돌입했고 거의 동시에 서측에 있던 수도사단 18연대도 양양에 입성함으로써 가슴 설레는 북진이 드디어 개시되었고, 그날의 감격을 기리기 위해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열흘이 지난 10월 11일, 간성을 거쳐 원산외곽에 도달한 제3사단은 수도사단과 협조하여 동해안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을 점령하는 파죽지세의 진군을 하였습니다.


  북진을 승인한 유엔의 결의가 10월 7일에 있었으므로 국군의 작전은 사후에 허가를  득한 형식이 되어버렸지만, 9월 29일 당시까지 미국은 아직 북진을 승인하지 않았고 38선을 넘지 말라고 유엔군 각 부대에 엄중히 지시를 내려놓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하달된 ‘38선에서 진격 중지’지시는 북진에 대한 열망과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수뇌부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 당시의 정일권 소장]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 수뇌부회의에서 “국군 통수권 자는 맥아더인가, 대통령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유엔은 국군의 38선 진격과 통일을 막을 권리가 없다. 나는 국군을 북진시킬 생각인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국군을 대표하고 있던 정일권은 “한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에 이중의 명령은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따라서 유엔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군사상의 견해이며, 대통령께서 북진을 지시하면 복종하겠습니다”라고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답변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정일권은 북진을 위한 구실을 찾아 가장 북쪽에 있던 국군 제1군단으로 하여금 38선을 돌파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던 북진에 대한 열망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도 결코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이것은 이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지만 이때부터 이승만의 독자노선은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원산에 입성하는 국군 제1군단]


  ‘유엔군의 38선 돌파 결정’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었으나 엄밀히 말해 6·25전쟁의 참전국들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이 자연스럽게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유엔군의 38선 진격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면 연합국의 조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나, 38선 돌파를 강력히 주장하던 맥아더의 주도로 인천상륙작전 후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키자 그만큼 결정도 쉽게 내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제3사단과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38선 너머로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이 개시되었을 당시, 북한군의 주력은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까지 아군을 압박하였던 13개 사단과 경인지역에서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에게 끈질 지게 저항한 제18사단마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록 시급히 편성한 몇 개의 사단을 평양으로 가는 경의가도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이 상태에서 아군이 38선을 넘은 아군을 북한이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제 북한 스스로 아군의 반격을 막아낼 수는 없어 보였습니다.]

( 포로가 된 북한군 소년병 )


  이 상태에서 북한이 내심 거는 기대라면 “국군이 38선을 넘어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유엔군이 38선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간절한 희망과 달리 북한지역 작전을 승인 받은 맥아더는 10월 2일, 예하부대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미 제 8군은 38선을 돌파, 개성-사리원-평양축선으로 진격하며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해 동부지역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정주-영원-함흥선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에게 일임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아군의 주력을 제 8군과 제 10군단으로 나눈 것은 이후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습니다.

 
  북한이 험준한 낭림산맥 때문에 동서(東西)로 크게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맥아더는 이에 맞추어 작전지역으로 독립된 형태로 분할한 것이었지만, 한반도 자체가 작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한 반론은 당시에도 공공연히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작전 관할만 분리시킨 것이라면 그리 문제는 되지 않는데, 제 10군단을 인천에서 빼내어 한반도를 한 바퀴 돌려 굳이 상륙작전 형태로 원산으로 진입시키려 하였던 것부터 실책이었습니다. 동해축선으로 북진하던 국군 제 1군단이 이미 원산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신격화되어있는 맥아더에게 제대로 건의되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맥아더의 의지에 반하는 어떠한 의견도 용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0월 4일부터 미 제1기병사단이 선봉에 선 제8군은 금천-사리원-평양축선을 따라 북진을 개시하면서 좌측에는 미 제24사단, 우측에는 국군 제1사단을 병진시켰습니다. 제1기병사단은 10월 9일, 개성-평양의 중간인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4일을 지체하여 공격속도가 둔화되었는데 이틈을 타서 북한군 지도부의 질서 있는 철수를 하였습니다. 사실 아군이 38선에 근접한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의 10일간은 도망가던 북한군에게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귀중한 시간이었는데,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정치적, 외교적 이유와 잘못된 북진방법을 채택한 군사전략상의 오류로 인하여 아군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금천에서의 지체는 제10군단의 원산상륙작전에 비하면 그나마 낳았던 결과였습니다. 원산을 상륙예정지로 정확히 판단한 소련은 북한을 도와 10월 4일까지 3,000여기의 기뢰를 원산만 일대에 설치했고, 이로 인하여 미 제10군단은 10월 1일 상륙작전 명령을 받았지만 소해(掃海)작업이 완료된 10월 26과 28일에 원산과 이원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1개 군단의 대병력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바다 한가운데서 무의미하게 1개월을 소모하였던 것이었고 그들이 상륙하였을 때 원산은 이미 국군 제1군단이 접수한 상태였습니다.


[원산만 갈마반도에 접안한 LST

하지만 원산상륙작전은 실패한 작전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카리스마가 있었던 데다가 고집스러울 정도로 주장을 관철하여 대성공 시킨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어느덧 맥아더에게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는데, 이와 관련한 부작용이 불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원산상륙계획은 분명히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이를 맥아더 앞에서 비판하거나 오류를 시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유엔군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의 모든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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