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였던 이유는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연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의 점령은 최우선 목표가 되었고 이것은 전쟁 초기에 북한군 주력이 서울로 몰려들었던 이유와 같았습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보유한 고도(古都) 평양은 당시에도 50만의 인구를 지닌 한반도 제2의 도시였습니다. 10월 12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출을 재개하였는데 이러한 진격속도는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의 예상을 벗어난 쾌속의 속도였습니다.
[외곽에서 평양 진입을 준비 중인 국군 제1사단]
북한군은 평양 외곽부터 첩첩이 방어선을 설치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이것은 평양 방위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주요기관들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만큼 북한은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평양을 향한 아군의 경쟁은 전입가경이었습니다. 평양을 선점 하겠다는 경쟁심은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사단 간, 사단 내의 연대간 까지도 불타고 있었는데, 특히 미 제1군단의 쌍두마차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의 경쟁은 양국의 자존심을 걸었을 만큼 치열했습니다.
원래 미 제8군의 주공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보유한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하고 서흥, 황주를 거쳐 10월 19일 대동강남쪽에 도달하였습니다. 반면 우측에서 조공역할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차량부족으로 11일에서야 38선을 넘을 수 있었지만 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여 시변리, 신계, 수안, 율리를 거쳐 10월 19일 대동강동쪽에 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11시, 예하 제12연대가 대동교 동쪽 100미터 지점에 있는 동(東)평양의 선교리에 진출하면서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제 대동강만 건너면 아군은 본(本)평양(또는 서(西)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1사단 12연대와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11시경,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 철교를 완벽하게 폭파시켰는데, 이것은 전쟁 초기에 두고두고 문제로 거론된 국군의 한강교의 폭파와 비교한다면 군사적으로 상당히 정확한 조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제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했고, 그 동안 지체는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미 제1군단장 밀번과 작전을 협의하는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
따라서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기에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에게 이곳은 어릴 때부터 물놀이를 하던 곳이어서 지체하지 않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은 도섭지점을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여 미군보다 하루 빠른 19일 밤, 제15연대가 드디어 본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2연대가 동평양에, 15연대가 본평양을 제일먼저 점령하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 최초 입성과 관련하여 국군 제7사단 8연대가 먼저 평양에 진입했다는 주장도 있어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국군 제2군단 소속이던 제7사단 8연대가 진격방향을 꺾어 평양으로 진격하게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정일권(丁一權) 총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는 밀명을 내림으로써, 국군 제2군단도 평양진출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2군단 부대 중 평양에 가장 근접하였던 제8연대가 19일 밤,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국군 제2군단 8사단도 평양 인근의 강동을 점령하였으나, 이미 평양이 함락된 뒤여서 진로를 돌렸습니다.
[평양시민의 환영대회]
이처럼 치열한 경쟁 끝에 평양을 국군이 선점한 것은 더 할 수없는 영광이었지만 모든 부대들, 특히 전선 중앙을 담당하던 제2군단까지 평양으로 몰려 들어갔던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한 이상 평양 점령은 사실 단지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다는 전술적 의미밖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평양으로 몰려갔던 이들 부대들 중 일부라도 평양을 외곽에서 크게 우회해 후방지역인 순천이나 숙천으로 곧바로 진출하여 도망가기 급급한 북한 전쟁지도부를 차단했다면 포위했다면 이후 전쟁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초강대국의 국가원수와 그의 명령을 받는 일개 장군간의 회담이 1950년 10월 15일, 하와이 서쪽에 있는 조그만 웨이크(Wake) 섬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언 듯 우리 상식으로 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대통령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워싱턴으로 날아와 향후 전쟁 전망에 대해 설명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맥아더가 지휘문제로 장시간 전장을 떠날 수 없다고 하자, 대통령이 미국 본토와 한국의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웨이크에서 회담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맥아더의 위상은 대단하였습니다.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향후 전쟁전망에 대해 맥아더는 추수감사절이면 교전이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트루먼은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이에 대해 맥아더는 개입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중공군의 개입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덧붙여 그는 만일 중공군이 참전한다면 병력은 5~6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압록강을 넘자마자 공군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수행한 브래들리(Omar Bradley) 미 합참의장이 여타 참전 국가들의 추가파병 필요성에 대해 문의하였을 때, 그들은 전투를 치러 보지도 못할 것이라고 답변할 만큼 맥아더는 조기종전을 자신만만해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맥아더의 지나친 자신감은 결론적으로 미국 정책 당국의 판단을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추가적인 병력과 보급품의 제한을 불러일으켜 차후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공군 개입가능성에 대한 오판으로 인하여 공격중인 유엔군 부대들이 상호 협조대책이나 적의 기습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강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실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공군의 제1, 2차 공세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평양이 조기에 점령되고 더 이상 북한의 조직적인 저항이 보이지 않자 맥아더의 자신만만한 예상처럼 추수감사절 이전에 전쟁이 끝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습니다. 미 육군성과 도쿄의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에 투입된 미 제2사단을 빼내어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계획에 착수하였고 또한 제8군사령관 워커는 종전을 대비하여 한국에 반입될 모든 탄약을 제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최고 지휘부의 장성들은 물론 어느덧 말단 장병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승리는 눈앞에 보였고 상황은 낙관적이었습니다.]
최초 북진 시, 맥아더는 워싱턴 훈령에 의거 국군을 제외한 유엔군의 진출 한계선을 국경선에서 150~170킬로미터 떨어진 정주~함흥선으로 통제했으나, 이런 낙관적인 분위기에 따라 10월 24일, 전격적으로 유엔군의 진출한계선을 철폐하고 제8군사령관과 제10군단장에게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을 향해 진격하라는 수정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그리자 모든 부대들은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한만국경을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중 선두는 평양을 우회해 순천에 진출한 국군 제6사단이었습니다. 더구나 제6사단은 북한군이 버리고 간 150여대의 차량을 노획해 사용함으로써 진출속도를 배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중 선두였던 제7연대 3대대장은 부대원들에게 개천으로 직행하되 만일 적을 만났을 때 저항하지 않으면 대응하지 말고 무조건 전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3대대는 자동차에 탑승한 채 북한군을 향해 투항하라고 외치며 밤새 전조등을 밝히고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한차례의 총격전도 없이 개천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청천강을 도하할 때 또 다시 북한군 차량 150여대를 추가 노획하면서 순식간 국군 최초의 차량화보병연대가 되어버린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10월 26일 07시에 압록강을 향해 마지막 진격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는 감격스러운 모습]
초산 남쪽 6킬로미터 지점에서 북한군 제8사단의 패잔병과 일시적으로 치열한 교전이 있었으나, 차량에 탑승한 제7연대 1대대는 초산을 향해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14시 15분에 압록강 남단의 한만국경선에 진출하였습니다. 그곳은 한반도 북부의 끝이었고 강 너머는 만주였습니다.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었던 대대 장병들은 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경건하게 수통에 담는 흥분된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식은 후방에서 통일을 고대하던 모든 국민들을 감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통일은 눈앞에 다가와 보였습니다.
김칫국부터 마신 갈등
국군 및 유엔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은 북한 정권의 압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새로운 통치권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라는 지역을 보는 시각차이 때문에 한국과 유엔군을 주도하는 미국정부 간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우리정부는 북한지역을 당연히 우리 영토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북한 지역의 통치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즉시 행사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지역이 한국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즉시 통치권을 행사하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북한지역을 점령하면서 통치권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즉각적인 통일을 원하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미국은 유엔의 결의에 따라야 한다는 정책을 처음부터 견지하였습니다.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한국 정부가 북한을 즉시 흡수하는 것은 곤란하고 점진적인 절차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일단 군정을 통해 북한 지역을 통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미국이 수립한 군정계획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을 만큼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제1단계, 북한지역의 질서회복이 급선무이니 사회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미국정부와 유엔군 사령부 통제 하에 군정을 실시한다.
제2단계,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 통제 하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한다.
제3단계, 통일정부 수립 후 외국군이 철군하면서 새로운 정부에 대한 유엔의 통제를 점차 줄여 나간다.
더불어 북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0월 12일에 개최된 유엔총회 임시위원회는 “유엔은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통치 할 수 있는 합법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다”라고 미국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가결시켜 한국정부의 북한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부인하였고, 또한 유엔군사령부와 유엔 한국 통일부흥위원단의 주도로 북한지역을 상대로 군정을 시행하도록 미국에 요청하면서 미국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북한지역을 방문하여 국군을 격려하는 이승만대통령]
하지만 유엔의 결의가 있던 당일 조병옥(趙炳玉) 내무부장관은 북한지역에 대한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즉시 민정관을 파견하여 점령지역을 통치하려 하였을 만큼 유엔의 결의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0월 16일 한국정부는 “유엔 임시위원회의 결정은 한반도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고 주장하며 유엔의 결의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특히 구체적인 군정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던 데다가 지난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있었던 미군의 군정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불신은 대단하였습니다. 곧이어 10월 17일, 한국의 계엄사령관은 이북지역에 적용할 계엄령을 포고하였고, 10월 22일에는 한국정부가 평양시장을 임명하는 등 계속하여 강경한 태도를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대응도 강력하여 10월 23일, 유엔군사령관은 유엔과 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정부에게 북한지역에 파견한 한국정부의 관리를 즉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0월 24일에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우리정부와 관련이 없는 12명의 민간인을 선발하여 평양시 관리위원으로 취임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점령지역에 우리정부가 파견한 관리와 유엔군사령부가 임명한 행정관이 서로 통치권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되었고 북한 주민들은 누구의 말에 따라야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였습니다. 당연히 점령지에 대한 통치권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고 혼란만 초래하였습니다.
[통일대통령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임에도 양측이 대립이 이렇게 격화되자 유엔군사령관은 지엽적인 문제로 인해 한국정부와 갈등을 야기 시켜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하였고, 우리정부도 조병옥 내무부 장관을 통해 “유엔 결의내용의 세부 시행문제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양보의사를 비침으로써 서서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양측은 북한 지역에 파견된 한국정부 관리들을 소환하되 유엔군사령부가 임명하는 군정요원은 한국정부와 사전에 협의하는 것으로 일단 의견을 모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립과 타협의 과정은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10월 25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전세가 급격히 변화하게 되자 북한지역의 통치 문제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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