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전멸을 각오한 사투 다부동 전투

구름위 2013. 3. 12.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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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계속된 기간은 언제쯤일까요?
  많은 분들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와 고지 쟁탈전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의외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 인천상륙작전 )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대전 전투의 참패와 더불어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의 전라도 석권으로 인해 한국군과 UN군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밀려났고 곧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경상남북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내어준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마저 상실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마저 없던 셈이었습니다. 
  낙동강에서 북한과 유엔군 측의 대결은 물자와 전투기술의 대결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신력과 의지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죠.


  치고 내려올 수 있는데까지 내려왔기에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둔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 좌측 사진 )은 이미 전 사단에 8월 3일에 8월 6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이미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 하에서 실시된 낙동강 도하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부산 점령의 날짜는 뒤로 밀리자 초조해졌습니다. 
  하지만 8월 12일 한국군이 대구 북방으로 퇴각하자 김책은 이 기회를 이용해
8월 15일까지 작전을 종결하고자 일선 사단장들에게 서둘러 대구를 함락시킬 것을 독촉했습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대구로 접근하기가 용이한 다부동이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습니다.
   북한군은 이 곳을 사수하고 있던 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개전 이래 숱한 실전을 겪으며 활약한 정예 부대인 제1, 13, 15 보병사단을 투입했습니다.
 
이로써 발발한 다부동 전투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보다 융통성있는 방어작전을 위해 전선을 축소 조정한 후 제1 보병사단이 경상북도 칠곡군의 다부동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8월 13~29일까지 무려 16일간이나 지속됐습니다.
  백선엽 준장의 제1 보병사단은 다부동 전면의 험준한 유학산 839 고지, 좌측의 숫데미산 518고지와 328고지, 그리고 우측의 신주막~대구 간 도로의 방어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단 좌측 지경선 너머인 왜관 너머에는 미 제1 기병사단이 낙동강 중류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군위와 신녕을 방어하는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가 연접하고 있었지만 이 사단들은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쉽사리 지원부대를 보내주기가 어려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1 보병사단은 나홀로 북한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죠.

  만약 다부동을 사수하는데 실패해 대구가 함락당한다면 한국군은 전원 부산 앞바다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용호동 해군 작전사령부 인근의 해안 절벽지대.
  한편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단숨에 붕괴시키고 대구를 장악하고자 했던 북한군은 제15 보병사단이 최영희 대령의 제15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숫데미산과 328고지를, 북한군 제1 보병사단은 박기병 대령의 제12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중앙의 유학산 정상 부근의 높은 절벽과 같은 고지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쪽의 계곡 접근로에서는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이 김동빈 대령의 제11 보병연대 방어선을 붕괴시킨 후 신주막~다부동~대구 간 도로를 이용해 남하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 제8군은 즉각 제11 보병연대 방어선 후방에 미 제2 보병사단 23 보병연대, M26 "퍼싱" 중전차를 장비한 제73 전차대대 C중대와 포병 2개 대대를 증원부대로 배치했습니다.

  한반도로 투입된 F-86 "세이버" 전투기. 다부동 전투 시기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전쟁 기간 중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제공권을 확고하게 장악함으로써 북한군의 주간 이동과 공격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북한군은 7월 한달간 미 공군의 맹렬한 폭격에 의해 후방보급선을 차단당함으로써 보급이 급격하게 악화돼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병사들은 하루 1, 2끼 정도만 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차량 등은 포탄과 경유, 휘발유 공급이 끊겨 가동 불능상태에 처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충천했습니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인 북한군 장교와 고참병들의 전의는 왕성했고 이에 따라 다부동 전투는 소강상태 없이 연일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어서 오너라! 괴뢰군!!" 대구 북방에서 90mm 대공포를 이용, 치열한 지원 포격을 감행하고 있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장병들. 다부동 전투는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절대적인 현 위치 사수전이었습니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제1 보병사단의 대응은 놀랍게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격작전을 감행, 함락당한 방어진지와 거점을 반드시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에게 함락된
숫데미산 탈환을 위해 제12 보병연대 2대대는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5 보병연대 역시 뒤지지 않겠다는듯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8월 15~16일에 일선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모든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동원했고, 이로 인해 부족한 T/O는 갓 자대 배치된 신병들에게 할당했습니다.
  이처럼 전멸을 두려워하지 않은 작전 전개로 인해 제15 보병연대
 1대대는 단 하루 만에 중대 병력 130명이 60~7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중 전투경험이 있는 선임병이 겨우 15~16명일 정도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초기 개전 부분에서 말도 안되는 고증 오류로 인해 비난을 받았던 MBC 미니시리즈 로드 넘버 원에서도 다부동 전투는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혹심한 인명피해로 인해 사단 사령부는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만 수백 명의 신병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격렬한 전투 중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후송당하는 통에 중대에서는 소대장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이렇듯 다부동 전투는 제1 보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사병이나 투혼을 발휘한 방어전이었습니다.

  특히 방어선에 갓 배치된 많은 신병들이 북한군의 함성소리와 쉴 새없이 날아드는 박격포탄의 작렬로 동요하고 흔들리자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착검한 M1 개런드 소총을 움켜쥔 채 돌격의 선두에 나섬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에 따라 사단은 부대 건재와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결사적인 방어전으로 잇따른 공세의 감행에도 불구하고 진격이 다부동 서측방과 중앙에서 돈좌되자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장 최용진 소장은  마침내 8월 21~23일 밤에 걸쳐 T-34/85 9대를 집중시켜 신주막~다부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통해 야간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마지막 희망을 T-34/85에게 걸었지만 의정부와 오산, 대전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를 열람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훗날 "볼링 앨리" 전차전이라 불린 이 격전에서 미군은 M26 "퍼싱" 중전차를 동원해 치열한 야간 전차전 끝에 돌격해 들어왔던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 대부분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미군 전차대에 의해 마무리지어졌습니다.
  결국 다부동 전투 종전까지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T-34/85 14대와 Su-76 대전차 자주포 5대를 손실해 사실상 기갑전력을 완전 손실하며 전투력을 상실했고 이로써 제1 보병사단은  혹독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적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격퇴시키며 다부동과 대구를 지켜냈습니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의 T-54 전차. 만약 제1 보병사단이 다부동을 사수해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런 사진을 바라보며 공산치하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부동 전투를 통해 전투는 의지와 인내력의 싸움이며 하도 전사자가 속출하다 보니 주변이 온통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차고 여름의 찌는 듯한 폭염 아래에서 죽음과 부상의 공포를 이겨내며 3배에 달하는 적을 맞아 승리할 때까지 버티며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고군분투한 제1 보병사단 장병들의 투혼에 존경심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단장 백선엽 준장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문자 그대로 계급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감투정신은 북한군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막아낸 제1 보병사단의 승리라 더 후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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