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누가 빠른가???

구름위 2013. 3. 1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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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이 하동을 공격하기로 결심을 굳히는데 채병덕 소장의 조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개전 초의 패배를 책임지고 참모총장(당시에는 총참모장으로 통칭)에서 해임된 후 단지 명칭만 있는 ‘경남지구편성군사령관’으로 좌천되어 있던 채병덕은 무어에게 하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공격부대의 안내역을 자임하였습니다. 무어는 채병덕의 의견에 동의하고 하동을 공격하여 가급적 오랫동안 확보함으로써 진주 방어를 위한 시간을 획득하려 결심하였습니다.


[미군의 무덤으로 변한 하동고개]


  제19연대에 긴급 배속된 미 제29연대 제3대대는 무어의 명령에 따라 26일 0시 30분에 진주를 출발하여 우여곡절 끝에 하동 동쪽 8킬로미터 지점의 횡천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습니다. 야간행군을 위험하게 생각한 제3대대장은 하동으로 진입을 다음날로 미루고 횡천리에서 일단 숙영하였는데, 당시 제3대대 병사들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을 한잠도 자지 못했을 만큼 몹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누렸던 마지막 휴식이었습니다.


  연대의 명령에 따라 27일 08시 45분경 하동고개를 향해 출발한 제3대대는 09시경, 우계리 일대에서 10~15명의 북한군과 조우하면서 이들을 추격하였는데 그것은 북한군이 파 놓은 함정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뒤를 쫓아 하동고개로 진입한 순간 매복하여 있던 적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고 순식간 고개에 갇힌 제3대대는 대항도 못해보고 붕괴되었습니다. 7월 28일에 집계된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52명, 행방불명 349명으로 추산되었고 제3대대를 안내하던 채병덕도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는 북한군이 유인책에 미군이 완벽하게 결려든 전투로 그해 9월 말, 미 제25사단이 하동을 탈환했을 때 미군 시신 313구를 발견하였을 만큼 치욕스런 결과였습니다.


[상황을 오판한 미군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하동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하였음에도 제8군사령부는 그때까지도 북한군 제6사단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면한 적은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당기간 진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7월 29일 오전부터 정면공격과 함께 양익포위 공격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7월 31일 06시경 진주를 함락시키게 되었을 때 북한군 제6사단의 정체가 확인되었고 미군은 경악하였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북한군이 마산 코앞까지 다가왔던 것이었습니다.


  마산은 부산에서 불과 45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증원군은 아직 바다를 건너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산을 노리는 적은 예상과 달리 2개 사단의 엄청난 규모였지만 이를 막아야 할 미 제24사단은 만신창이 상태였습니다. 긴박성을 감안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일한 예비인 제27연대를 마산에 투입하고,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할 예정인 제5연대 전투단을 마산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엔군과 북한군 간의 싸움은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빠른가? 증원군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이 빠른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미 제25사단은 놀라운 기동을 선보이며 마산으로 전개하였습니다]


  결국 워커장군은 8월 1일부로 전 전선을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켜 병력을 절약하고, 상주에 있는 미 제25사단을 240여 킬로미터를 이동시켜 마산 정면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마산을 위협하고 있는 북한군 제6사단의 예상치 못한 진격이 유엔군을 놀라게 하였지만 이제부터 미 제25사단은 이를 능가하는 기동을 전사에 선보였습니다. 만난의 난관을 극복하고 미 제25사단은 36시간 만인 8월 3일 17시 30분, 마산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보지 못한 이러한 놀라운 이동 전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였습니다.

동해안의 지연전

개전 당시, 동해안의 요충지인 강릉을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은 후방에 상륙한 북한군 유격부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하자 대관령을 넘어 제천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자 강릉에서 부산에 이르는 동해안 7번 국도는 순식간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38선을 넘어온 북한군은 병력을 분산하여 북한군 제5사단 10연대가 대관령을 넘어 국군 제8사단을 추격하고 나머지 38경비 제1여단은 동해 축선을 따라 계속 남하하도록 조치되었습니다.


[국군 제8사단이 내륙으로 후퇴하면서 동해안이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해안이 텅텅 비어버리는 위기가 닥치자 육군본부에서는 이준식(李俊植) 준장을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3사단장에 임명하고, 부산에 있는 예하 제23연대로 하여금 이곳을 방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제23연대는 명령을 받자마자 긴급히 북상하여 6월 29일 울진까지 올라가 북한군과 조우하여 지연전을 전개하다가 7월 12일에는 영덕 북방 영해 부근으로 철수하여 일단 숨을 고르며 재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영일비행장과 포항항이 있는 동해안 남부 지역의 요충지 포항을 확보하려면 포항 북쪽 30여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영덕의 사수가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영일 비행장은 한반도로 이동하여 출격하는 모든 유엔군 항공기의 전개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포항항은 부산항에 이어 유엔군의 증원 및 보급 항구로써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포항이 피탈된다면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이점은 유엔군 최고 지휘부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덕의 확보는 포항의 안전을 담보하는 지름길이었고 반면 포항의 함락은 부산에다가 칼을 들이미는 것과 같았으므로 북한군도 영덕을 신속히 돌파하여 포항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을 돌파하여 포항을 위협하였습니다]


  평해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아군의 즉각적인 지연전과 병참선의 신장으로 월초부터 기동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어 여타 북한군 부대에 비해 진격 속도가 늦었지만 7월 17일 야간에 국군 제23연대의 방어선을 뚫고 영덕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더불어 개전 당일 안인진리에 상륙하였던 북한군 제766유격연대는 태백산을 거쳐 이미 청송 일대까지 진출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한마디로 동해축선의 위기였습니다. 이처럼 영덕을 상실하고 동해안 지역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7월 20일 워커 제8군사령관은 미 제5공군 사령관과 제25사단장을 대동하고 포항에 도착하여 영덕 및 포항을 필히 확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결코 포항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38선에서 부산에 이르는 가장 짧은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동해축선은 바닷가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서 해,공군의 타격작전이 용이하였습니다. 워커의 명령에  따라 동해안 지역에는 유엔 항공기 2개 대대와 해군의 함포가 신속히 지원되었고  다량의 폭격과 포격이 가해지면서 북한군은 전진에 애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긴급히 증원된 국군과 유엔군은 영덕을 탈환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같은 공방전으로 인해 영덕 일대에서는 날이 밝으면 유엔 해,공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 공격하고, 어두워져 지원이 중단되면 북한군이 공격하는 근접 전투가 8월 2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국군 제23연대의 용전분투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


  이러한 끈질긴 공방전의 승리는 결국 국군의 차지였습니다. 제23연대가 주축이 된 국군 제3사단은 8월 2일 18시에 영덕을 완전히 재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동해축선을 위협하던 북한군 제5사단은 전투력을 상실수준인 약 40퍼센트의 손실을 입고 영덕 북방 산간 계곡에 은신하여 재편성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전쟁 개시 후 동해축선은 한동안 무주공산 상태로 있었지만 다행히도 북한군 제5사단과 내륙에 침투한 제766유격연대가 공조하여 신속히 남하하지 않아 아군은 천금 같은 시간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동해축선의 요충지 포항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운보다도 유엔군 해·공군의 효과적인 지원과 더불어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한 국군 제23연대의 용전분투가 위기를 넘긴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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