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극을 알린 신호 ‘폭풍’
1950년 6월 25일,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상 설정되었다가 어느덧 국경 아닌 국경으로 변한 38선 일대에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동트기 이전인 새벽 4시가 되면서 38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각 부대에 암호명 '폭풍'이 하달되자 이미 남쪽을 향하여 조준을 완료하고 있던 모든 대포는 국군 진지를 향하여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였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송악산 전투'처럼 서로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국지적인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국군은 부지불식간 날아온 포탄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한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던 최초의 생각이 오판임이 밝혀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은 서해의 끝 옹진반도에서 동해의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체에서 북한군은 동시에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포연이 걷혀가자 주요 축선으로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의 북한군이 남하하는 모습이 관측되었습니다. 바로 현대사 최고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었습니다.
[포격을 가하는 북한군 포병]
침략을 당한 우리입장에서 6·25전쟁 최초의 모습은 기습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대비태세 부족과 그로인해 당했던 굴욕을 핑계로 삼기 위해 언급한 단어였을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38선에서 국지적인 도발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로인해 비상경계령이 발령되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놓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종 정보에 의해 전쟁이 임박한 징후를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경계기간이 길어지고 농번기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후속 대책도 없이 전쟁 발발 바로 전날 경계령을 해제하였을 만큼 당시의 군 수뇌부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물자와 장비를 지원받고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완료하고, 남침 직전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을 중국으로부터 전환 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개전 2주전이 되었을 때 북한군은 전차, 야포, 함정,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20여만의 병력을 38선 일대로 은밀히 이동시켜 배치하여 놓고 남침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국군은 많은 병력이 외박이나 휴가를 떠나 불과 6만여 명만이 정상적인 근무중이였습니다. 더구나 중무장한 북한군과 달리 미국으로부터 전력증강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국군은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군의 전신이 되는 창설 직후의 국방경비대]
분명히 개전직전 남북 간의 전력비는 일방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차이가 많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개전 초에 있었던 굴욕적인 패배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무조건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쟁 초기에 국군이 오합지졸처럼 무조건 붕괴되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우에 따라 부족한 전력으로도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능욕 당하였다는 치욕이 너무 커서 그런지 6.25전쟁을 겪었던 세대조차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론적인 세세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망설임 없이 동족을 향하여 총을 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고 그것은 회복하기 힘든 엄청난 비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입니다.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무려 500만 명의 인명피해와 1천만 이산가족,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800만 명이 전쟁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우리민족이 오천년 역사 동안 겪었던 최악의 피해입니다.
[저 폐허가 불과 60년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불과 60년 전의 가까운 과거의 일이며, 휴전이라는 형태로 아직도 끝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땅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망각과 무관심은 60년 전에 발발한 참혹한 전쟁을 막지 못하였던 원인중 하나이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남의 땅에서 벌어진 남의 역사가 아닌 그리고 아픔을 잊지 말고 교훈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참혹하였던 우리 현대사 비극의 현장으로 이제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2. 준비된 도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북한에게 침략을 당한 우리는 그 대가로 초반의 굴욕을 겪었지만 이점은 반대로 생각한다면 북한의 침략준비가 상당히 철저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은 흔히 국지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고 시작부터 철저하게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외세의 깊숙한 개입이 있었습니다. 1950년 당시 일제의 식민지를 갓 벗어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후진국이었고, 사실 이점은 풍부한 자원과 일제가 남긴 많은 기간시설을 보유한 북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외세의 구체적인 지원이 없이 단지 도발하겠다는 의지만가지고 북한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 중인 김일성]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은 직접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에 동의한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이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할 만큼 충분한 다량의 전차, 야포,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전쟁 물자가 소련으로부터 북한에 공급되었고 이 때문에 전쟁 발발직전에 남북한 간의 전력비는 거의 1:5 수준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와 더불어 김일성은 남침직전인 1950년 5월 13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을 찾아가 남침 동의를 구하고 필요한 군사지원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원에 의하여 북한군이 외형적으로 증강된 것과는 별개로 쉽게 충당하기 힘들만큼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경험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침당시 20만 북한군을 이끈 총참모장 강건(姜健)만 하더라도 항일유격대를 거쳐 소련군에서 활약하였지만, 위관장교로 중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한 경험만 있던 불과 33세의 젊은이였을 만큼 거대한 전쟁을 이끌만한 인적자원이 절대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실질적으로 전쟁 지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지원을 요청하여 1950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수십 명의 소련군 장교들이 고문단 명목으로 북한에 들어왔고 이들의 주도로 구체적인 남침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柳城鐵)의 증언에 따르면“원래 북한군 장교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이 있었으나, 군사고문단 소속인 포스트니코프 소장이 그것을 폐기한 후 새로운 작전계획을 만들었다”고 하였을 만큼 남침에 관한 소련의 개입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열차편으로 북한에 공급되는 T-34 전차의 모습]
소련 군사고문단은 동서간의 대립으로 서유럽에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의 국제여건상 미군이 신속하게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기는 힘들 것이고,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시에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북한 측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침략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주공은 서울을 북방에서 정면공격하고, 조공을 춘천-수원과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우회기동 시켜 38선 인근의 국군부대와 후방에서 올라올 예비사단들의 배후까지 동시에 차단시켜 일거에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에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전쟁을 종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50일 동안 하루 10킬로미터씩 전진한다는 가정 하에 역으로 환산하여 그해 6월 25일을 개전일로 산정하였습니다.
[소련의 개입으로 작성된 선제타격계획도]
그만큼 그들은 자신만만하였고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북한은 불법남침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소련 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작성한 계획을 남한의 공격징후가 보이면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의 의미를 지닌‘선제타격계획’또는 남한의 공격 시 즉시 응전한다는‘반격계획’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그들의 침략야욕을 숨겼고 계획대로 전쟁은 개시되었습니다. 가장 최후의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나 택할 수 있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그것도 같은 동족을 향해서 김일성과 소련은 이와 같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쉽게 꺼내어 들었고 중국 또한 처음부터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6.25전쟁의 발발원인을 분석한 다양한 시각들이 나왔지만, 이처럼 무력으로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지와 이를 후원한 스탈린의 결정 그리고 중국의 후원에 의해서 전쟁이 개시되었다는 사실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어떠한 전쟁 발발의 사유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 현대사 최대의 비극은 침략의 주인공이었던 김일성과 이를 후원한 외세의 합작품이었습니다.
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6,1,4,3,2,7,5사단)이 도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완편사단들이었고 더불어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부대를 배속 받아 화력이 증강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바로 뒤에는 돌파구를 확대하면서 후속 진군할 2선부대로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개시와 함께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전쟁초기 북한군의 공격축선 상황도]
반면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수도경비사령부 포함) 그리고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서에서 동으로 제17연대,제1,7,6,8사단)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삼각편제 기준으로 완편 된 부대는 4개 부대밖에 없었고 이 또한 포병연대가 배속된 북한군과 달리 15문으로 구성된 포병대대밖에 없어 평면적으로 전력을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병력으로는 1:2 수준이었지만 화력을 계량화한다면 1:5수준으로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국군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앞서 알아보았던 것처럼 6월 24일 0시를 기해 국군은 그동안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많은 병력이 휴가, 외출 등을 나와 있었던 관계로 개전 시점의 전력차이는 더욱 벌어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동두천-포천으로 돌파하여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군할 북한군 주공은 2개 사단(후속할 제13사단까지 포함하면 총 3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총 3만2,000명 수준이었는데 반하여 이를 방어할 국군 제7사단은 총 7,000여명의 병력 중 2,500여명이 휴가나 외출중이어서 4,500여명만 부대에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병력으로도 7배였지만 화력은 무려 18배가 벌어진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개전이 되자 국군의 이동이 이루어졌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이후 두고두고 국군에게 오래 동안 콤플렉스가 되었을 만큼 가장 위협을 주었고 또한 막아내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전차였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개전 당시 북한군은 242대의 소련제 T-34전차를 남침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T-34는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당대 최고의 명품전차였는데, 그중에서도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되고 장갑도 증가된 최신형이었습니다. 반면 이를 막아내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2.36인치 로켓포와 57밀리미터 대전차포였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전차무기로 T-34의 장갑을 뚫을 수는 없었으며 더구나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차를 북한군의 남침 당시 처음 보았을 만큼 구체적인 공격방법조차 모르던 상태였습니다. 비록 많은 용사들이 화염병이나 포탄을 직접 들고 특공작전을 벌여 전차의 진격을 막아내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 주공이 엄청난 압력을 가하여 내려온 의정부축선은 제7사단의 허무한 붕괴와 함께 돌파당하며 개전 하루 만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습니다.
[서울로 입성한 북한군 T-34전차]
그런데 이런 전선의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총지휘하여야 할 정부와 군 수뇌부는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였고 어떻게든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조급증에 이끌려 후방에서 올라온 부대들을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하는 악수를 두어버렸습니다. 결국 뿔뿔이 쪼개져 후방에서 서울로 이동한 제2사단과 제5사단 예하부대들은 대오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차례차례 전선에 투입되면서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3개 사단을 쏟아 부으며 피로써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더불어 북한의 또 다른 주요 침공루트는 중동부전선의 춘천일대였습니다. 이곳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인제 방향에서 동시에 38선을 돌파하여 홍천을 거쳐 수원까지 최단시간 내 남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의 계획대로 남침이 진행된다면 국군 주력의 대부분은 적의 대포위망 한가운데 갇혀 일거에 괴멸될 수도 있는 엄청난 타격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중동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6사단은 북한의 진격을 신속히 저지하며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엄청난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북한의 야심만만했던 남침전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전쟁전 국군 제6사단은 84킬로미터에 이르는 38선 중동부의 넓은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예하부대인 제7연대가 춘천, 제2연대가 홍천 북동쪽 그리고 원주에는 사단 예비인 제19연대가 각각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총 병력은 9,000명이었습니다. 반면 북한군 2군단은 3개 사단(제2,7,15사단)과 동부전선임에도 30여대의 자주포를 보유한 총 3만 5천명 수준이었습니다. 여타 전선처럼 표면적으로도 북한군은 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거의 1:5 수준까지 전력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발발직전 국군에게 내려진 경계령 해제와 발맞추어 많은 병력들이 휴가와 외박을 나간 여타부대와 달리 제6사단은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단장 김종오(金鍾五) 대령의 통제에 의해 휴가는 물론 외출과 외박이 제한되어 경계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체적으로 취득한 첩보에 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사단장은 진지를 보강하고 포병대대를 적의 예상 접근로에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 같은 철저한 준비태세는 겉으로 들어난 표면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의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청성부대가 선전할 수 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군기가 확립된 국군 제6사단(1949년 예하 7연대 검열 모습 )]
개전 초에 춘천을 침공한 북한군 제2사단은 불과 2시간 만에 화천과 춘천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모진교(母津橋)를 점령하면서 제7연대를 밀어붙여 서전을 장식하였으나 사실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후방에서 올라온 제19연대의 증원과 제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은 제7연대는 소양강을 방어막 삼아 협로에 북한군이 진입하기를 기다린 후 기회를 포착하여 맹공을 가하여 반격을 개시하였고 이후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친 끝에 북한군 제2사단 전력의 40퍼센트를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 소위는 옥산포 주변 도로에서 적의 자주포를 격파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전과로 그는 국군 창군 이래 최초로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더불어 사단 우익을 담당한 홍천 북방의 제2연대도 북한군 제7사단의 공격에 대항해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순차적으로 매복, 역습을 실시하며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그 백미가 6월 27일 말고개 일대에서 11명의 특공조가 육탄으로 공격해 북한군의 Su-76자주포 10여문을 파괴 노획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전선이 밀려나고 있던 개전 초에 청성부대가 보여준 용전분투로 인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개전 하자마자 그 기능이 상실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분노한 김일성은 군단장 김광협과 제2사단장 이청송을 해임하고 사단장 최충국이 전사한 제7사단을 해체시켜 제12사단으로 개편하여 버렸습니다.
[말고개 전투에서 노획한 Su-76 자주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육탄 11용사들]
하지만 청성부대는 이러한 기분 좋은 승리의 와중에 육군본부와 통신이 재개되면서 서울이 함락직전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전선의 단절과 부대의 고립을 막고자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고 않고 원주를 거쳐 충주로 전략적으로 후퇴를 하면서 자랑스러운 대첩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6사단의 성공적인 춘천 및 홍천 전투는“서울의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라는 북한의 원대한 계획을 수포로 만들었고 이것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결정타로 작용하였습니다.
춘천에서의 대승리와 더불어 놀라운 분전이 사실 38선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강릉을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은 후방이 차단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는 북한군 제5사단에게 출혈을 가하면서 부대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대관령을 넘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김포방어를 위해 급편 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살신성인적인 분투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반도 진출을 지연시켜 서부전선의 국군잔여 부대가 경수축선을 따라 후퇴할 수 있는 퇴로를 확보되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몰락, 특히 서울을 3일 만에 적에게 빼앗기게 된 의정부 축선의 붕괴가 워낙 극심하였고 또한 이런 사실이 너무 부각되어서 그렇지 이처럼 우리의 선배들은 열악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적의 남침을 막아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심장은 서울이었고 북한이 이곳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여 주력을 집중시킨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고, 같은 이유 때문에 국군은 이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하였습니다. 10만의 국군을 이끌던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은 26일 오전까지만 해도 “서울 사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의정부를 지켜야 한다”며 예하 부대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와 상관없이 당시 육군 수뇌부가 보여준 모습은 무능 그 자체였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초에 촬영된 서울전경]
수도방위를 위해 공비토벌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후방의 사단들을 급거 서울로 이동시킨 것은 굳이 작전이라 할 사항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귀중한 자원을 어떻게 방어전에 투입하여야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군 수뇌부는 전혀 준비가 없었습니다. 채 총장은 단지 무너지고 있던 전선을 어떻게든 틀어막겠다는 생각에만 매몰되어 후방부대들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즉시 의정부지역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은 마치 방화선을 구축하여 근본적으로 산불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물 한 양동이씩 준비되는 대로 거센 산불을 향해 뿌려대기만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예비 병력의 축차투입(逐次投入)은 단순히 의정부 방어의 실패로 그치지 않고, ‘서울 함락과 국군 주력의 소진(消盡)’이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야기하였습니다. 6월 27일 10시에 창동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군의 서울 진입은 시간문제가 되었는데 그때 그 순간까지 정부는 단지 국민의 동요를 막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상황을 오도하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정작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이미 그날 새벽 03시에 150만의 서울 시민을 적의 군홧발 아래 남겨두고 서울을 빠져 나갔습니다.
[개전 초의 무능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는 채병덕 참모총장]
그러자 단지 위정자들이 서울을 비웠다는 이유만으로 채 총장은 그때까지 주장해오던 서울 사수 결심을 번복하기에 이르렀고 육군본부를 시흥으로 이동하여 한강을 방어선 삼아 저항하겠다고 천명했으나, 막상 한강 이북에서 고군분투 하던 부대들의 효과적인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이 없었습니다. 의정부축선으로 남침한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 2개 대대였는데 반하여, 이를 막기 위해 포진되어 있던 아군은 제7사단과 후방에서 긴급 전개한 제2, 5사단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의 4개 사단이었습니다. 비록 화력에서 절대열세였지만 당시 미아리고개를 경계로 하여 대치중인 피아간의 병력규모는 이처럼 얼추 비슷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안심하고 시가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한다던지 아니면 안전하게 한강 이남으로 빼어내어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단지 위정자들을 쫓아 군 수뇌부만 안전지대로 내려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무책임한 지휘의 절정이 6월 28일 02시 30분에 벌어진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이었는데, 아무런 통제나 대피도 없이 작전이 감행되어 피난민을 포함한 약 800명의 무고한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단지 2대의 T-34만이 미아리를 넘었을 뿐이었고 아군의 대다수 주력부대는 아직도 한강 이북에서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점령된 서울은 무자비한 폭력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한강 이북에서 작전하고 있던 부대는 제1, 2, 5, 7, 수도경비사령부였는데 한강교 폭파로 말미암아 이들 육군 주력부대들의 철수로가 자동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따라서 국군은 야포, 박격포, 차량 등 주요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을 휴대한 채로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부대 단위로 도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겠다면서 개념 없이 저지른 작전이 결론적으로 주력을 사지에 내팽겨 치고 수뇌부만 이동한 어처구니없는 행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의 부대편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병력 숫자도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 2만5천여 명으로 급감 했습니다.
안전하게 피난갈 수도 있었던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수많은 시민들이 남겨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동족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대며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새 세계를 열겠다며 자행하였던 일은 반공인사 살해 같은 피의 학살극이었고 이것은 이후 오래 동안 동족 간에 씻기 힘든 상처와 증오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는데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당시의 위정자와 수뇌부들의 책임도 컸다는 사실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할 역사의 교훈입니다.
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상식과 전혀 반대로 엉뚱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흔히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가장 극한 상황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이런 모습은 의외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또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개전 초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공격하지 계속하지 않고 3일간이나 지체하였던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중동부전선에서 선전한 국군 제6사단 외에 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는데, 바로 이때 북한군 주력이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아군 주력을 고립시키면서까지 시도된 한강교 폭파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강에는 인도교(현 한강대교 구교)와 3개의 철교가 있었는데 2개의 철교가 폭파에 실패하여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물론 국군에게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남침의 선봉장 노릇을 하던 전차들까지 마음만 먹었다면 신속하게 한강을 건너 패주하고 있던 국군을 추격을 계속할 수 있었었습니다. 만일 이때 북한군의 진격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국군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사실 북한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밝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있고 이것이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러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에 북한이 정세를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남침계획 수립당시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 지역에서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이승만 정부가 순식간 붕괴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6월말까지도 민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것은 전후에 김일성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세력을 숙청 할 때 구실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를 6월 30일 미군기가 폭격하는 모습 ]
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한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북한의 초기 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린 국군 제6사단의 대승과 김포축선을 방어했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분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의정부 축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선점한 북한군 제3, 4사단의 좌우익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더 이상 단독으로 앞서 나가기 힘들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북한군의 지체를 틈타 육군본부는 한강선 방어를 위해 임시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했고 삼삼오오 한강을 도하해오는 철수병력을 재편성하여 6월 29일에는 간신히 한강방어선이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을 지체했던 북한군은 그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더불어 미국 지상군의 조기 참전가능성이 대두되자 6월 30일 밤부터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을 마주보고 치열한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고 난 후인 7월 1일 04시, 철교를 이용하여 4대의 적 전차들이 강을 건너고 후속하여 북한군 주력이 영등포까지 진출하자 그동안 아군이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국군은 7월 3일, 경부축선을 따라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북한군 전차]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강 방어선은 붕괴되었지만 국군과 북한군이 한강을 사이에 놓고 대치했던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의 5일간은 전쟁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그러한 시간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한강교 폭파로 인해 적진에 고립되며 붕괴되었던 국군 주력 부대들이 천금같은 5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하여 지연전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그 시간 동안 미군이 증원되어 참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 위기에서 빛난 해군의 용전분투
[북한은 38선 돌파와 더불어 해상으로 상륙하여 아군의 배후를 차단하였습니다]
흔히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북한의 도발은 그보다 한 시간 전에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북한은 동해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제549독립연대를 삼척에 그리고 제766유격연대를 안인진리 일대에 상륙시켰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을 상륙시키는 데는 북한 해군의 역할이 컸는데 이러한 와중에 남북한 해군 간에 최초의 해전이 동해에서 벌어졌습니다.
새벽 5시 김상도(金相道) 소령이 지휘하는 YMS-509 경비정은 해군본부로부터의 긴급출동 명령에 따라 묵호항을 출발하여 북상하였는데, 아직까지는 전면전이 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북상하던 509정은 7시 20분경 옥계해상에 이르러 상륙군을 승선시키고 운항중인 북한 해군의 소형 포함(PGM)을 발견하고 즉시 교전이 벌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렸고 화력이 약했던 509정은 북한 포함에 최대한 접근하여 공격을 가하는데 성공하였고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함정을 북으로 패주시켜 해군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교전을 당당히 승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509정이 보인 놀라운 활약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최초 교전 후 묵호항으로 귀환 후 긴급보수를 마친 509정은 급박한 전황 때문에 오전 9시 50분에 대강의 준비를 마치자마자 재 출동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옥계북방 3마일 지점에서 상륙 중이던 북한군을 목격하고 신속히 접근하여 기습포격을 가함으로써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북한군의 상륙을 상당시간 지연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 해군이 보여준 용전분투의 시작이었을 뿐이었고 대한민국을 구한 더 큰 해전이 부산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하와이에서 포를 장착하는 백두산함]
개전 당일 12시경, 전면전 발발 소식을 접한 해군의 진해 통제부(統制府)사령관은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의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에게 즉각 출동을 명령하였습니다. 백두산함은 1949년 변변한 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통탄한 초대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 제독이하 해군 장병들이 봉급의 10%를 갹출하여 마련한 기금과 국민의 성금 및 국고의 지원으로 어렵게 장만한 함정이었습니다. 사실 함정이라고 명명하였지만 15명의 구매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해양대학의 구형 실습선을 구입하여 직접 수리 및 도색을 한 후 진주만에서 구입한 미국 육군의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함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떠나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진해로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한국 해군 역사에 기념비적인 함정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한국 해군의 자랑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진해기지를 출항, 동해안으로 이동 중이던 백두산함은 25일 18시경, 연기를 내뿜으며 남하하고 있던 미확인 선박을 발견하고 해상 발광신호(發光信號)로 국적과 선명을 밝히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남진을 계속하자 백두산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확인에 나서 괴선박의 정체가 약 600명의 상륙군을 탑승시킨 북한의 1,000톤급 무장수송선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백두산함은 일단 현장에서 이탈한 후 통제부의 명령을 받아 26일 0시 10분경 북한 무장수송선의 좌현 3마일까지 접근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고 북한군이 격렬히 대항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해협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아군은 전사와 부상이 각각 2명인 피해를 입었지만 적선을 완파하여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50년 5월 22일 촬영된 백두산함 장병들]
당시 북한 무장수송선은 북한군을 부산일대에 상륙시켜 부산항을 점거하는 것이 주 임무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명선이 조기에 차단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고 백두산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6.25전쟁 당시에, 국군과 북한군 모두 해군의 전력이 작았던 관계로 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이처럼 전쟁 초기에 바다에서도 숨 막히는 위기의 순간은 있었고 이 때 보여 준 아군의 승리가 가진 의의는 그만큼 컸습니다.
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6.25전쟁 개전 당시에 남북한 간의 전력은 많이 벌어져 있었고, 이런 차이는 개전 초에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군은 경우는 일방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컸습니다. 당시에 북한군은 200여기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일명 건국기(建國機)라고 불린 T-6 훈련기 9기를 포함한 2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지만 전투기는 단 1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이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T-6 건국기]
6월 25일, 북한 지상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6시간 후인 10시경이 되자 북한군의 IL-10 전투기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정찰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시경에는 YAK기 4기가 용산 상공에 나타나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와 함께 폭탄을 투하하면서 6.25전쟁 최초의 공습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인 16시경에는 5기의 YAK기가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공습하였는데, 이때 국군의 T-6연습기 1기가 파손되었고 한국에 체류하던 미국인을 소개시키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긴급 투입되어 있던 미 공군 소속의 C-54수송기 1기가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공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막을 방법이 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공대공 전투를 벌일 전투기가 없어서 개전 즉시 제공권을 북한 공군에게 내줄 수 박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공군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전투기능이 없는 훈련기들 밖에 없었지만 한국 공군은 이들을 출동시켜 전선을 정찰함과 동시에 육군 작전을 육탄으로 지원했습니다. 조종석 밖으로 손을 내밀어 폭탄 274개와 수류탄 500개를 북한군 행렬에 투하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처럼 맨주먹으로 근근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군의 활약은 3일 천하(파괴된 북한의 IL-10)]
하지만 이와 같이 일방적이었던 북한 공군의 우세는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군의 전력이 갑자기 커져서 북한 공군을 막아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의 조기 참전 결과였습니다. 육군이나 해군과 비교해 신속한 이동과 전개가 가능한 미 공군이 한반도로 긴급 투입되면서 곧바로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전 4일 경과하였을 때 38선 이남에서 북한 공군기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오히려 38선 이북의 북한 후방에 위치한 공군기지는 물론 적의 요충지가 공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지상에서는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하고 있던 6월 29일의 경우만 보아도 미 제5공군 제3폭격비행단 소속 B-26 경폭격기 18기가 적의 심장인 평양을 폭격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작전으로 미 공군은 8월 10일까지 북한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후방차단과 근접항공지원(CAS)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공군의 F-51전투기]
이와 더불어 6월 27일, 한국 공군은 미 극동 공군의 협조로 조종사 10명을 선발하여 일본 주둔 미 공군 기지에서 단 며칠간의 훈련을 받고, F-51전투기 10기를 인수해 대구기지로 귀환했는데 이때부터 한국공군도 전투기를 운용하게 되었고 7월 3일부터 한·미 공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초에 일방적이었을 만큼 많은 전력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공군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고 그러한 용기는 도움을 받아 곧바로 힘으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화된 힘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9. 침략자의 실책
3일 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은 개전 초기의 주도권을 북한이 확실히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치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서울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빼놓고 단지 전투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서울 점령이 북한에게 그리 만족할만한 전과를 올려주지 못했음은 이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전차]
우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운용술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북한 전차에 밀려 국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사실 북한군도 그들의 승리를 이끌어 준 전차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천혜의 교통로인 경원축선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공격할 주 공격로로 경원축선의 동두천-의정부 도로와 포천-퇴계원 도로, 두개를 선정하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포천-퇴계원의 도로상으로 전차가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은 탱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105전차여단 예하 109전차연대는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다시 포천으로 역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포천-퇴계원간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정부-창동의 좁은 통로에 2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전차연대가 몰리면서 교통체증을 겪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은 6월 26일 13시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도 미아리 방어선까지 15킬로미터를 더 진출하는데 무려 35시간이나 소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울 점령이 최소한 하루 이상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소속 T-34]
하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6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인 북한 제1군단이 서울에서 3일간을 지체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애당초 한강 이남에서의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부터 남한의 민중봉기를 기다렸다는 설, 심지어 북한이 자축연을 벌이면서 아무 생각 없이 3일간을 허비했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더구나 북한의 서울 점령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도 남아있어서 도강의지만 있었다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이미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로 향하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 제6사단이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 소련 고문단이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북한이 한강을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 도강 할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한 국군 제6사단의 용전과 김포반도에서 급조된 병력으로 긴박하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하를 막았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대 포위 섬멸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실책이면에는 국군의 투혼이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겉으로 드러난 승리 이면에 숨어있던 실책이 있었고 이것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런 실책을 범하게 된 데는 단지 그들의 착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침략자를 피로 막아낸 국군의 놀라운 투혼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1950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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