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북한군의 9월 공세

구름위 2013. 3. 1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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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마지막 최후 공세를 감행했다. 사진은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남한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한 북한군 의용병들 모습>                                                                                   

 

 

<낙동강 전선에서 미 24사단을 방문한 워커(오른쪽) 8군사령관이 처치 24사단장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다. 뚝심 있는 명장이었던 워커 장군에게도 1950년 9월 초순은 가장 가혹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8월 20일을 기점으로 북한군의 공세는 점차 잦아들었다. 8월 하순부터 마산 일대에서 북한 6사단과 미 25사단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적의 공격이 아군의 방어를 위태롭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영산 정면에서도 미 24사단 대신 미 2사단이 8월 하순부터 투입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됐다.

 대구 북방에서도 북한군 1개 사단이 영천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대구에 지향되었던 적의 공세는 둔화됐다. 영덕과 포항에서도 전투는 계속됐으나 방어선 자체가 붕괴될 정도의 위기는 아니었다. 여전히 북한군의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전체적으로 북한군의 공격 기세는 눈에 띄게 약화됐다.

 결국 뜨거웠던 8월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국군과 미군이었다.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북한의 선전은 공수표가 됐다. 미군 증원 병력이 연달아 한국에 도착하면서 이제 국군과 미군을 합친 지상군 병력 수는 북한군 2배에 육박했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과 유엔군 총지휘부는 오히려 9월 중순으로 예정된 상륙작전 준비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8월 22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할 미 해병1사단 병력이 일본에 모두 도착했다. 다음날 도쿄에서 열린 미군 고위지휘관회의에서 인천 상륙작전이 최종 결정됐다.

 피아 전력의 차이를 냉정하게 고려했을 때 북한군 입장에서는 방어태세로 전환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유사시에 대비한 철수 계획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일부 미군 장교들도 북한군이 과연 방어태세로 전환할 것인지 여부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약간씩 여유를 갖게 됐다.
 
 ◆ 예상 못한 대공세

 미군 일각에서 ‘전쟁 이래 지속됐던 북한군의 전면 공세는 이제 곧 끝날 것’이란 기대감을 살짝 품을 무렵 뜻밖의 상황이 돌출됐다. 낙동강 서부전선과 서남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이상한 움직임이 노출된 것. 미8군 정보처는 8월 28일 경남 합천 방면에 2개 사단과 20대의 전차가 집결된 것을 포착했다. 이들 북한군이 경남 영산 방면을 방어하고 있는 미 2사단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군 정보 당국의 판단이었다.

 미 25사단 정면의 남강에서는 북한군이 수중교량을 건설하고 있었다. 수중교량이란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식의 도하 수단으로 얕은 물 속 바닥에 도로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어 차량과 병력이 도섭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었다. 미 5공군은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의 움직임이 포착될 때마다 공격을 가했지만, 주로 야간을 이용하는 북한군의 도하 준비 작업과 도하 시도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미군 내에서 “북한군이 국지적으로는 모종의 공세를 감행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와 “북한군의 공세 능력은 사실상 소진됐다”는 상반된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돌연 북한군의 전면 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8월 31일 한밤중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5사단은 북한군 6사단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 25사단의 진지는 차례로 무너져 갔다. 고지에 배치돼 있던 미 25사단 24연대 3대대는 9월 1일 새벽 2시쯤 함안 시내가 불바다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됐다. 북한 6사단의 2개 연대에 의해 경남 함안이 함락된 것이다.

 같은 시각, 미 2사단이 방어하는 창녕ㆍ영산방면에도 북한군 2ㆍ9사단이 도하 공격을 가했다. 소형 보트와 수중교량 등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도하 방법으로 대병력을 도하시킨 북한군은 미 2사단 예하 연대의 진지 틈새를 파고들어 각개 격파를 시도했다. 9월 1일 아침이 됐을 때 미 2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고립된 사단 예하 부대를 2개 그룹으로 나눠 별도의 지휘관을 지명해서 작전을 해야 할 만큼 전황이 악화됐다.

 9월 1일 새벽 워커 장군은 급변한 전황에 충격을 받았다. 혹 북한군이 다시 공세를 재개할지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 공세를 펼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월 31일 밤부터 재개된 북한군의 공세 강도는 8월 공세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이른바 9월 공세의 시작이었다. 

 ◆ 워커의 대응

 워커 미 8군사령관은 항상 그래왔듯이 예비대를 어디에 투입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각 지역에서 방어를 하는 것은 예하 사단의 몫이었다. 워커 장군의 역할은 북한군의 공격이 집중된 지점이나, 아군 방어망이 완전히 뚫릴 가능성이 높은 위험지역을 파악해서, 자신이 보유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 25사단과 2사단을 직접 방문한 워커 장군은 보고받던 것보다 훨씬 나쁜 전황에 할 말을 잃었다. 각급 부대의 주둔지 사이에는 북한군이 침투해 중대ㆍ대대ㆍ연대급 미군 부대 상당수가 북한군에 포위당해 고립됐고, 통신마저 두절됐다. 미 5공군과 7함대 항공모함이 위기에 빠진 미 육군을 구하기 위해 근접항공지원으로 지원해 줬지만 전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워커 장군은 경남 영산 방면이 가장 위급하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미 해병1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미 해병1여단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후방에 빠져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9월 2일 오전 워커 장군은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부참모장 학키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 해병1여단 투입을 공식 요청했다.

 워커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대비 때문에 자신의 요청이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학키 소장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전에 맥아더 원수가 워커 장군이 요청할 경우 언제든지 해병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학키 소장의 전언이다. 맥아더는 전체 전황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워커 장군은 혹시 자신의 요청이 거절될 경우에 대비해 또 다른 예비대였던 미 24사단에도 밀양 서남쪽으로 이동해 역습작전에 투입할 준비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이때 8군 차원의 유일한 예비대였던 미 27연대 3대대를 25사단장 킨 소장이 임의로 사용해 버려 워커 장군은 전황이 더 악화될 경우 더 이상 사용할 카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워커 장군은 9월 2일 마산과 영산, 창녕 등 경남 서부지역과 서남부 지역에 집중된 북한군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대구 북방의 미 1기병사단에도 역습을 명령했다.
 
 ◆ 절정의 위기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대구 북방에서도 북한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역습을 준비하던 미 1기병사단 7연대는 오히려 북한군 3사단의 포위 기동으로 위기에 빠졌다. 북한군 13사단과 1사단도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경북 영천에서도 적 8ㆍ15사단, 안강ㆍ기계 쪽에서도 적 12사단이 공세를 시작했다. 전체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맥아더 원수의 참모들과 예하 부대 지휘관들은 미 해병1여단을 낙동강 전선에 다시 투입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 해병1여단은 3일부터 경남 영산에 투입돼 북한 9사단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상당수 극동군의 참모들과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맥아더에게 해병대의 원대복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강ㆍ기계 쪽에서 북한군 12사단이 전선을 돌파하면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워커 장군은 밀양 인근에 대기시키고 있던 미 24사단을 경주로 이동시켜 안강ㆍ기계 방면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는 “해병1여단을 원대 복귀시켜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청천병력 같은 지시를 내려 보냈다. 해병1여단이 복귀하면 미 24사단을 경남 영산에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7월 이후 오랜 격전으로 이미 전력이 약화된 미 24사단이 영산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설상가상으로 대구 북방의 미 1기병사단 진지도 무너지고 있었다.

 미 8군에서는 이제 워커 라인을 포기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구의 육군본부도 부산 동래로 이동했고, 미 8군사령부의 이전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우리나라 일부 민간인들은 이제 대한민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하는 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처럼 대한민국도 결국 공산세력에 무릎을 꿇을 것이란 재수 없고 불길한 예측이 군은 물론 민간에까지 넘실거렸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이래 가장 절체절명의 최악의 위기였다.

 

국군, 영천전투 승리로 대반격 `발판'

낙동강 전투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된 1950년 9월 국군의 영천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전적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전선 전면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를 풀어갈 첫 번째 단서는 미 육군 8군사령부와 극동군사령부의 타협에서 시작됐다. 워커 미8군사령관은 미 해병1여단을 원대복귀시키라는 극동군사령부의 요구에 대응해 미 해병1여단을 이틀 동안만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부대와 낙동강 방어를 책임진 워커 사령관의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 극동군사령부가 워커 장군의 타협안을 수락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낙동강 돌출부의 격전

 낙동강 전투 당시 미군 방어지역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영산은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영산면으로 굽이쳐 내려오던 낙동강이 서쪽으로 돌출해 마치 반도처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 때문에 흔히 영산 돌출부 혹은 낙동강 돌출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여러 곳에서 동시 도하할 경우 포위 공격이 가능한 데 비해, 미군 입장에서는 동쪽으로만 아군 지역과 연결돼 있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 때문에 1950년 8월에도 미 24사단이 북한군 4사단을 상대로 힘겨운 혈전을 벌인 곳이었다.

 미 해병1여단은 9월 3일 아침부터 영산 방면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작했다. 영산을 방어하고 있던 미 2사단도 해병1여단과 함께 반격에 동참했다. 미 해병1여단의 주력부대인 미 해병5연대는 미 해병대 중 최상의 전력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인천상륙작전 주력부대인 미 해병1사단의 스미스 소장이 “해병1여단을 원대복귀시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한 이유도 그 같은 해병1여단-해병5연대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같은 위험한 임무를 맡을 부대는 미 해병5연대밖에 없다는 것이 스미스 소장의 믿음이었다.

 그 같은 지휘부의 믿음에 걸맞게 미 해병1여단은 영산 돌출부에서 시원스럽게 반격작전을 감행했다. 9월 4일 미 해병1여단은 북한군 9사단 사령부가 위치했던 장소를 탈환했다. 9월 5일 미 해병1여단은 전진을 계속해 오봉리 능선을 점령했고, 미 2사단 9연대도 영산 돌출부의 중심인 클로버 고지를 장악했다.

미 해병1여단과 미 2사단의 반격으로 낙동강을 건너온 북한군 9사단은 거의 괴멸됐다. 약속했던 이틀이 지나자 미 해병1여단은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해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운명의 영천 대회전

 영산의 위기가 끝나갈 무렵 영천에서 새로운 위기가 시작됐다. 12사단이 안강에서 경주를 공격해 경주-영천 사이의 도로를 위협하는 가운데 북한군 15사단이 영천 방면으로 치고 내려온 것이다. 9월 5일 적 15사단은 국군 방어선을 뚫고 영천 동북쪽의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했다.

 9월 6일 새벽 3시에는 적이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했다. 낙동강 방어전이 시작된 이래 국군 방어지역에 이 정도의 구멍이 난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대로 영천이 적 수중에 떨어진다면 영천 왼쪽의 대구나 영천 오른쪽의 안강~경주~포항방면 전선이 연쇄적으로 봉괴될 것이 뻔했다.

 전선 붕괴 직전의 위기에서 유재흥 국군 2군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우선 국군 8사단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 15사단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그리고는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1개 연대씩의 병력을 차출해 7사단과 함께 영천을 공격하도록 했다.

 자신이 맡은 방어지역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마당에 1개 연대를 추가 차출당하게 된 1사단과 6사단은 망설였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이 벌어졌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화력전, 밤에는 백병전 식의 처절한 전투가 3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9월 9일 국군 2군단은 8사단 16연대와 21연대, 7사단 5연대와 8연대,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 등 영천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6개 연대를 모조리 공격에 투입했다. 북한군을 완전히 감싸며 포위망을 구축한 국군 2군단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국군은 일거에 영천을 완전 탈환하고 영천 북쪽까지 밀고 올라갔다. 적 15사단은 4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는 등 사실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와해돼 버렸다. 이처럼 낙동강전선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 순간을 극적인 승리로 전환시킨 영천 전투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영천 위기가 수습된 후 9월 12일 미 1기병사단 7연대 3대대의 역습이 성공하고, 국군 1사단도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탈환함에 따라 대구의 위기도 안정됐다. 이에 앞서 경주방면과 동해안에는 새롭게 투입된 미 24사단이 방어전에 힘을 보탰고, 국군 수도사단과 3ㆍ8사단이 선전함에 따라 9월 13일 무렵에는 동부전선도 원래의 방어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바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낙동강 전투 당시 미군 포병이 곡사포 사격을 통해 보병을 지원하고 있다. [자료사진]

 
▲ 북한군 작전계획 논란

9월 공세를 끝으로 6ㆍ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역할은 수동적인 조연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한 북한은 1950년 9월을 마지막으로 이제 전쟁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지위로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9월 공세가 전쟁 흐름을 좌우한 극적인 고비였던 만큼 북한군 작전계획의 타당성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다. 소련과 중공 측 군사전문가 중 일부는 낙동강전투 당시 북한군이 승산 없는 무리한 공격으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대반격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중국은 맥아더 원수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휘 사례를 분석, 미국이 상륙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북한에 미리 경고를 한 사실도 있었다. 상륙작전에 대비해 철수 계획도 마련하고, 상륙작전 반격 전력도 확보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9월 공세 당시 북한군 작전계획 자체만 봐도 지나치게 단순하고 무모했다는 비판도 있다. 좁은 지역에 국군과 미군이 집결해 방어선을 뚫기 힘든데 너무 정면공격만 했다는 것. 이를테면 국지적인 후퇴로 전선을 흔들어 국군과 미군이 틈을 노출시킬 때 다시 반격을 가하는 등 조금 더 융통성있는 작전이 필요했다는 의견인 셈이다.

 혹은 9월 공세 당시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균등한 전력을 투입해서 공격한 것이 실패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8월 공세 때는 대구에 공세가 집중된 것에 비해 9월 공세 때는 영산ㆍ마산ㆍ대구ㆍ영천으로 전력이 분산돼 어느 곳도 돌파구를 만들기에는 공격 전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인 셈이다.

 물론, 북한군 입장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북한군 입장에서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 오히려 미군에게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또한 기동력이 좋은 미군은 북한군 전력이 집중된 곳에 아군 전력을 집결시켜 반격시킬 수 있으므로, 북한이 전력 집중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풀이한다. 이런 마당에 후방으로 전력을 재조정해 상륙작전에 대비하는 것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공군 전력이 부족하고 기동력이 떨어지는 북한 입장에선 9월 공세 같은 단순하고 무모해 보이는 공격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는 결론이다.

 9월 공세와 관련해 대구 서남쪽의 현풍 건너편 낙동강 대안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10사단의 미스터리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9월 공세 때 전선 전면 붕괴의 위기가 몇 번이나 벌어졌음에도 북한 10사단 주력이 끝내 낙동강을 건너지 않은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전사 연구가들은 현풍의 전략적 위치로 보아 적 10사단이 도하를 했으면 대구와 창녕 양쪽의 전선을 두 토막 내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북한 측은 이와 관련해 북한 10사단이 미군을 묶어 두는 견제의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10사단 도하에 대비해 미군의 사단급 부대가 현풍에 주둔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 측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북한은 10사단에 견제의 역할을 맡기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결정적 순간 1개 사단을 그냥 놀리는 결과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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