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미군의 전개

구름위 2013. 3. 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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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미 육군24사단 소속 포병들이 금강 방어선에서 곡사포 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6월 30일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육군 원수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8군사령관인 워커 장군을 통해 미24사단에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또 미 육군 25사단 27연대를 주축으로 한 1개 연대전투단을 출동 준비시키도록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 극동사는 전쟁 상황을 다소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극동사가 만들었던 작전계획 ‘블루하트’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1개 사단과 1개 연대급 전투단을 한반도로 투입, 차령산맥이나 소백산맥 적당한 선에서 지연전을 펼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단 북한군의 공격 속도가 둔화되면 7월 22일께 인천에 미 육군 1기병사단과 해병대를 투입해 적 후방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 블루하트 작전계획의 핵심이었다.

 다만 미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전에 너무 후방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1개 대대라도 먼저 출동시키려 했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2사단 21연대 1대대였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사단에서 가장 정예부대로 평가가 높던 21연대 1대대를 선발대로 결정했다.

 21연대 1대대에 105㎜ 곡사포 1개 포대를 증강시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Smith TF)를 편성했다. 스미스라는 이름은 대대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고, 특수임무부대(TF)라는 명칭은 보병에 기갑ㆍ포병부대를 배속해 새롭게 전투 임무에 맞는 부대를 편성했다는 뜻일 뿐 특수부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스미스 TF는 원래 항공편으로 수원으로 바로 투입하려 했지만, 부산에 도착한 후 열차로 상경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군이 실제로는 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수원을 이미 북한군에게 공격당한 지역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 죽미령 전투 

 선발대로 정해진 스미스 TF는 7월 2일 대전에 도착했으나, 오산 북방 4㎞의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것은 7월 5일이었다. 몇 차례의 진지 변경으로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을 보잘것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훈련도 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군대로 오판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세계 최강의 미군이 나타나기만 해도 북한군은 철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4사단 16연대와 18연대 등 2개 보병연대와 105전차사단 107연대 소속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6시간 15분 동안의 혈전 끝에 스미스 TF의 진지를 유린했다. 스미스 TF는 북한군 전차 4대를 격파하고, 2대를 반파시키는 전과를 거뒀지만 절대적인 병력 규모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죽미령 전투를 전후해 미 육군 각급 부대가 차례로 한반도로 출동하기 시작했다. 7월 1일 사세보에서 승선한 미 2사단 34연대는 2일 밤 부산에 상륙해 열차 승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7월 4일 아침이 돼서야 미 34연대 1대대가 열차로 북상을 개시했고 연대 주력은 저녁 때에 부산을 출발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34연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때 평시 주둔지용 물자를 너무 많이 갖고 와서 전시 임무에 맞는 물자를 선별하는 작업도 지연됐다. 한국도 전쟁 준비가 안된 상태였지만, 미군도 별다를 것이 없었던 것.
 

 ◆ 1차 증원요청

 미군이 죽미령에서 처음으로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하던 무렵 맥아더 원수는 워싱턴의 합참 연락장교를 시켜 미 2보병사단, 미 82공수사단의 1개 연대전투단, 1개 해병연대, 해병 공병부대, LST 등 상륙전 요원의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블루하트 계획을 처음 세웠던 때의 판단과 달리 북한군 전력이 실제로 더 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미 25사단의 1개 연대 외에 나머지 2개 연대까지 추가로 한반도에 투입시키고, 인천상륙작전에 사용할 1기병사단도 방어전에 투입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7사단은 일본 자체 방위를 위해 일본에 남겨 둬야 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부대는 미 본토에서 추가로 증원받아야 한다는 것이 맥아더의 판단이었다.

 이와 함께 극동사는 북한군 전력의 핵심은 T-34 전차라고 판단하고 7월 3일 개발이 막 끝난 3.5인치 로켓포의 한반도 배치를 워싱턴에 요청했다. 이와 함께 일본 주둔 미 8군이 보유하고 있는 M-24 경전차로는 T-34 전차에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다 성능이 강한 중전차를 보유한 12개 전차 중대 증원을 요청했다.

 이 같은 맥아더 원수의 요구에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의구심을 표명했다. 맥아더의 증원 요청이 제2차 세계대전 스타일의 상륙전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마침 “핵무기가 개발된 만큼 제2차 세계대전식의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상륙전에 포인트를 둔 맥아더 원수의 증원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판단에 따라 7월 6일 미 합참은 맥아더 원수에게 증원 병력을 요청한 취지와 필요한 병력 규모를 다시 질문했다. 이 같은 질문에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 극동사는 7월 7일 추가로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완전히 편성된 4~5개 보병사단, 1개 공수연대, 3개 중전차대대, 포병과 근무부대를 포함한 3개 대대 전투단을 요구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사단은 2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된 감편 사단이었으므로 이 같은 요구는 주일미군만으로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 계속되는 증원요청

 스미스 TF에 뒤이어 미 24사단 34연대가 7월 6일부터 8일까지 평택에서 천안에 이르는 국도 축선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더구나 천안전투에서 새로 부임한 34연대장 마틴 대령과 34연대 3대대 작전장교 시거 소령이 전사했다. 34연대 작전과장 딘 소령도 포로로 잡히는 등 34연대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미 육군의 연대급 부대로도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극동사의 지휘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7월 9일 맥아더 원수는 미 합참에 세 번째의 증원을 요청했다.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의 기갑장비는 매우 우수해 과거의 독일군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며 “북한 보병도 자질이 우수하다”고 재평가를 내렸다. 소련식과 중공군식을 혼합한 북한군의 전투 방식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지금까지 요구한 병력 외에 추가적인 4개 사단을 포함한 1개 야전군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이 같은 맥아더의 요구에 이번에는 워싱턴이 충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력 규모를 감축했기 때문에 막상 미군에는 병력 여유가 많지 않았다. 사실상 유럽 지역 주둔 병력까지 빼내야 맥아더가 요구하는 병력을 충족할 수 있었다.

 미 합참은 “병력도 없고, 유럽 주둔 병력을 손댈 수 없으며, 수송선도 부족해 수송 능력 측면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며 맥아더의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맥아더는 유럽만 생각하고, 아시아를 경시하는 오판이라고 생각했다. 개전 초부터 맥아더의 판단과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의 판단은 계속 엇나갔고 이 같은 균열은 훗날 더욱 큰 논란의 출발점이 됐다.


 ◆ 미군의 배치와 북한군의 대응

 미 24사단의 잔여부대는 7월 4일까지 부산에 모두 도착했다. 추가 증원 요구에 따라 한반도에 파병이 결정된 25사단은 7월 10일과 15일 사이 부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렇게 미군이 도착하는 중에도 방어선은 차례로 붕괴됐다. 7월 8일부터 12일까지는 전의와 조치원이 함락됐다. 17일에는 대전이 북한군에 포위 공격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북한군 일부 병력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북 일대로까지 진입했다.

 반대로 미 지상군의 참전은 북한군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죽미령전투부터 북한군이 연이어 승리하기는 했으나 미 지상군이 이렇게 신속하게 개입하는 것은 그들의 예상 밖이었다. 북한군은 예비 전력을 확충해 해안 방어를 강화하고 공격 속도를 높여 미군이 전개를 마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대전 전투

<1950년 7월 대전전투 직전 미 24사단 보병이 조치원에서 박격포를 사격하고 있다. 미 24사단 등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들은 장비와 훈련 부족으로 6·25전쟁 참전 초반 큰 어려움을 겪었다.  - 미 육군 자료 사진>

 

   사단장 1명 실종, 보병연대장 3명 중 전사 1명·중상 1명, 보병대대장 8명 중 전사 2명·포로 1명·중상 2명, 연대작전장교 포로 2명. 이 참담한 리스트는 1950년 7월 대전 전투를 전후한 시기 미 육군 24사단의 지휘부 손실 내역이다.

 미 육군 창군 이래 사단급 부대의 고급 지휘관이 가장 큰 손실을 당한 전투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당시 미 24사단이 입은 피해는 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 금강방어선의 붕괴

 7월 초순부터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부터 국군과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1·6·8사단 등 국군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역 일대의 소백산맥 주변의 산악지대를 맡는 동안 미 24단을 주축으로 한 미군은 경기 남부와 충남 일대의 평야지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당시 방어작전의 큰 흐름이었다.

 장비와 병력 모두가 부족했던 국군이나 상대적으로 방어 정면이 넓었던 미군이나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7월 지연전 상황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고전했던 쪽은 미군이었다. 7월 8일부터 12일 사이 미 24사단은 전의와 조치원에서 연달아 후퇴했다.

 미국은 다음 방어 목표 지점으로 금강을 선택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천 장애물은 지연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군은 23번 국도가 통과하는 공주 정면과 1번 국도가 통과하는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두 곳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차단하려 했다.

 이를 위해 공주에는 미 24사단 34연대,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일대에는 미 24사단 19연대가 배치됐다. 금강을 건널 수 있는 중요한 교량은 모조리 폭파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는 것이 미군의 기대였다.

 하지만 7월 14일 북한군 보병들이 작은 보트를 이용해 금강을 도하하면서 미군의 기대는 초반부터 무너졌다. 마침 근처에 배치돼 있던 미군 보병중대가 북한군의 도하를 목격했으나 무전기가 방전돼 상급부대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대평리에 배치된 미 19연대도 7월 15일 북한군의 도하를 1차 저지했지만 16일 새벽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다. 미군의 조명탄 조명이 약 20분 동안 멈춘 시간을 이용해 북한군이 도하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 대전전투

 이처럼 금강방어선이 허무하게 붕괴하자 미군은 대전 갑천에서 2개 연대를 투입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펼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34연대가 대전 갑천, 21연대가 마달령, 19연대가 영동에서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기로 했다.

 대전을 방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단지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대전을 방어하는 34연대는 7월 19일까지 철수하기로 정해졌다.

 하지만 7월 18일 대전을 찾은 워커 미 8군사령관이 미 24사단장 딘 소장에게 “24사단이 피해를 많이 입었으니 미 1기병사단을 대신 투입하겠다”며 “1기병사단이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이틀만 더 방어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워커 장군의 발언 의도는 “1기병사단이 대신 투입될테니 조금만 더 버티라”는 것이었지 “20일까지 대전을 무조건 사수하라”는 취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충직한 군인이었던 딘 소장이 워커 장군의 발언을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서 대전전투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시간을 더 벌기 위해 19연대 2대대를 차출해 34연대에 배속하는 등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7월 19일 북한군 3사단, 4사단, 105전차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7월 20일 새벽 3시 무렵 북한군 T-34 전차들이 유성과 대전 시가지 사이의 미 34연대 1대대 방어진지를 돌파하자, 미 1대대장은 연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그 와중에 19연대 2대대도 대대장 독단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7월 20일 오전에는 유성과 대전 사이의 전방 방어선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하지만 34연대 지휘부는 북한군의 위장 허위 통신으로 34연대 1대대가 갑천 일대의 진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을 것으로 오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대전 시가지에 있던 24사단 지휘부도 시내에 나타난 T-34 전차를 보고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24사단장 딘 소장은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직접 신형 무기인 3.5인치 대전차로켓을 들고 북한 전차 사냥에 나섰다.

 사단장이 3.5인치 대전차로켓으로 직접 북한군 T-34를 파괴하고, 부하들이 기념문구를 페인트로 적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통신이 두절됐지만 전방에 있는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보고도 없이 후퇴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 북한군이 출현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20일 오후 5시 30분 24사단장 딘 소장은 예하 34연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이때는 북한군이 금산과 옥천으로 빠져나가는 대전 외곽의 도로들을 모조리 차단한 상황이었다. 34연대의 철수를 보호하기 위해 21연대가 마달령에 배치돼 있었지만 산악지역 곳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북한군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대전전투에서 영웅적으로 활약했던 딘 소장이 탄 차량이 길을 잘못 들어 낙오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대에서 낙오된 딘 소장은 부상 장병들을 돕다 경사지에서 추락, 부관 한 명 없이 적 후방에 홀로 방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탈출을 위해 분투하던 딘 소장은 한 한국인 부역자의 신고로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는 치욕까지 당했다.

 ▶ 전투의 명과 암

 7월 초 미 지상군의 참전 이후 보름 동안 미24사단은 혈전을 치르며 시간을 벌었다. 그때 확보한 소중한 시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발판으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격을 실시할 수 있었으니 미 24사단의 혈투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미 24사단의 지연전을 영광으로 돌리기에는 상처가 너무도 컸다.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연대장·대대장 여러 명이 전사하고 실종됐다. 한국에 처음 전개될 당시 24사단의 병력은 1만5000여 명에 달했지만 대전전투 종료 후 영동에 집결한 24사단 병력은 8660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애당초 미 24사단이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맡은 탓이 컸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미 24사단의 준비 부족도 문제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군의 병력 규모와 장비를 급격하게 축소했다. 경험 많은 장병들이 대규모로 전역하면서 위관급 이하 장교와 일반 병사의 훈련 수준도 빠른 속도로 저하됐다.

 6·25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있던 미8군의 장비 수준은 특히나 열악했다. 미 24연대의 통신 장비는 기준 수량의 60%에 불과했고, 그나마 보유량의 80%는 고장난 상태였다. 35연대 1대대의 경우 기관총의 예비 총열이 하나도 없었다. 박격포 조명탄의 50~60%는 불발탄이었다.

 1961년 출간된 미 육군의 공식적인 6·25전쟁사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는 한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해, 대전전투 전후의 미군 상황에 대해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싸우기만 하면 패전하기 일쑤니 미군의 전통과 역사를 모독했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상실케 했다”고 혹평했다.

 심지어 이 책은 “일본 점령 근무 중인 사단이 철저한 훈련을 하지 않았으며 전투장비의 보충과 정비를 게을리했으며 실전적인 전투훈련을 하지 않았다”며 “(미군들의 상태가) 비소를 마신 파리와 같았다”는 극언까지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은 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지 겨우 5년이 지나 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건설했다.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미군은 불과 5년 만에 “훈련 부족”과 “장비부족”이 문제가 돼 “미군의 전통을 모독”하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아무리 세계 일류의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평시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전시에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무서운 교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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