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결단으로 마산 위기는 수습됐지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50년 8월부터 낙동강 주변 일대로 전선이 점차 고정되면서 전투의 강도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6월 25일 개전 이후 계속되던 혼전(混戰) 양상은 이제 열전(熱戰)으로 표변해, 산을 녹이고 강을 마르게 하는 수준의 격전이 벌어졌다.
◆ 전선의 최후 조정
낙동강전투 준비단계에서 워커 미8군사령관은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군부대를 왜관 북쪽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워커 장군이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왜관 북쪽이 미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서부 지역과 국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고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지역의 국군이 무너지면 미군마저 덩달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워커 장군의 부탁을 받은 정 총참모장은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1사단을 추천했다. 이에 따라 국군1사단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왜관과 대구 북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맡게 됐지만 문제는 너무도 넓은 방어정면 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1사단이 맡은 방어 정면은 폭이 42㎞로 다른 국군 방어 정면의 2배가 넘었다. 장비나 훈련 수준, 병력 규모면에서 더 우월했던 미 육군 사단의 방어 정면에 비해서도 더 넓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원래 취지는 하천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해 도하를 방해하는 것이었지만, 국군1사단은 제대로 된 하천 방어를 수행할 여건이 못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 탓에 국군1사단은 낙동강 강안에서 결전을 시도하기보다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면서 융통성 있게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백선엽 1사단장은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해 낙동강 강안이 아니라 대구 북방의 산악지대에 최후 방어전을 펴기로 결심했다. 백 사단장의 결심은 상부로 보고됐다. 마침 육군본부도 국군의 방어정면이 지나치게 넓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 총참모장이 지휘하는 육본은 8월 11일 국군의 전선을 낙동강 강안이 아니라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으로 연결하는 후방으로 축소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낙동강 강안에서 더 후방인 대구 북방 수암산~유학산 일대를 연결하는 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정하고 8월 13일 무렵 계획된 방어선에 병력을 배치했다.
◆ 절정의 위기
그때부터 국군1사단이 방어하는 대구 북방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특히 북한군 3ㆍ13ㆍ15사단 등 3개 사단이 다부동을 중심으로 대구 북방 산악지대로 공격해 오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1사단의 방어전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진지 전환 과정에서 1사단 일부 부대가 후방으로 집결한 후 다시 유학산 등 주저항선으로 투입될 때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이에 따라 1사단은 사전에 주저항선으로 선정됐던 주요 고지군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선점해 버린 유학산 등지를 탈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떠맡게 됐다.
328고지ㆍ유학산 등에서 서로 뺏고 뺏기는 격전이 8월 중순 내내 반복됐다. 대구 북방에서 북한군 공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미군은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해 낙동강 건너 왜관 일대에 융단 폭격을 실시했다. 대구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압력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7연대 등 예비대가 다부동으로 투입됐다.
8월 18일 새벽에 대구 북방 가산 방면에서 침투한 일부의 북한군이 대구역 부근으로 박격포 사격을 가했을 때는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했고, 시민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국군1사단은 미27연대와 함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격전을 치렀다.
수암산ㆍ유학산에서 밀고 밀리는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전선은 간신히 지탱됐으나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미23연대와 국군8사단 10연대도 대구 북방으로 추가 투입됐다. 사실상 사단급 전력이 추가될 만큼 대구 북방의 전투 양상은 격렬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 많았으나 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은 그때마다 지휘력을 발휘, 결국 전선을 지탱하는 데 성공했다. 8월 20일 마침내 북한군의 공격이 다소 약해졌다.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뚫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유학산 일대에 포진해 있던 북한 15사단이 돌연 영천 방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북한군 3사단과 13사단이 대구 북방에 여전히 남아 공세를 지속했지만 8월 중순 때만큼 기세를 올리지는 못했다.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고,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이 국군에 귀순한 것은 다부동전투의 무게 추가 아군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 한국의 베르덩
8월 말 미군 사단이 다부동에 투입되고, 1사단은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다부동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다부동전투 기간 중 국군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해 대구 시내에서 급하게 모집한 신병과 학도병으로 전력을 보충했다.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할 정도로 당시 전선 상황은 처절했다. 미군들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베르덩 전투에 빗대 다부동을 한국의 베르덩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8월 한 달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 일대에서 1만여 명이 전사했다. 인민군도 3만여 명이 전사해 다부동 일대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코를 잡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8월 말 국군 1사단 대신 투입된 미 1기병사단이 다부동 진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냄새가 얼마나 진동했던지 미군 측 일부 장병들은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틸 정도였다. 그런 처절한 격전과 희생 끝에 국군 1사단과 미군 증원부대는 대구 사수에 성공한 것이다.
◆ 낙동강 방어전의 기본 개념
1950년 8월 중순부터 전투 양상은 지연전이 아니라 고수 방어 위주의 전투로 바뀌었다.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싸움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유엔군의 지상군 지휘관으로 국군과 미군을 사실상 지휘하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이미 7월 하순부터 “버티든가 아니면 죽든가”(stand or die)라며 현 전선 고수를 외쳤지만, 그 같은 워커 장군의 의지가 현실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8월 중순부터였다.
북한도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8월에 접어들면서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광신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중장비를 탑재할 수도 없는 작은 목선으로 도하작전을 감행하는가 하면, 인해전술을 연상케 하는 보병의 제파식 연속 돌격을 감행하는 등 북한군 공격 양상도 격렬하게 바뀌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처지에서 전선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국군 부대의 경우 당시 대구 북방에 1사단, 경산과 영천에 6사단과 8사단, 안강과 기계에 수도사단, 포항에 3사단이 각각 배치돼 있었다. 미군도 별다를 것이 없어서 대구 서쪽에 1기병사단, 현풍과 창령에 미24사단, 마산에 미25사단 등 단 3개 사단만 배치돼 있었다.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미국 장교 중 일부는 유사시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 예비부대로 미 해병대 1여단과 미2사단, 일부 연대급 부대가 후방에 대기하다가 전선에 구멍이 나면 바로 출동해 구멍을 메워 전선을 수습하는 것이 낙동강 방어전을 총지휘한 워커 미8군사령관의 기본 방어개념이었다.
낙동강 서남부 전선 격전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미 8군사령관 워커(왼쪽) 장군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전선을 시찰 중이다. <자료사진>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 상황도. 지도 윗부분의 미 35연대는 진주 고개까지 진출하고, 아랫부분의 미 해병5연대도 사천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지도 중앙의 봉암리 일대에서 미 육군5연대 전투단은 포위 공격을 당해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그림 군사편찬연구소 작성>
1950년 8월 한 달 동안 북한군이 가장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공세를 가한 곳은 바로 대구였다. 당시 대구 북쪽에서 공격해온 북한 사단은 1ㆍ13ㆍ15사단 등 3개 사단이었고, 대구 서쪽에도 북한군 3사단과 10사단 일부가 공격을 해 왔다. 후방의 김천 일대에는 북한군 2사단까지 포진하고 있어 이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 사단은 총 6개에 달했다.
이 많은 적을 상대하는 아군은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등 2개 사단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병력을 집중한 곳은 대구가 아니라 마산이었다. 미 25사단을 주축으로 한 미군 병력과 북한 6사단을 주축으로 한 북한군 병력 비율은 3대1로 미군이 절대적 우위를 자랑했다. 미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만4000여 명에 달하는 데 비해 북한군 6사단의 전력은 7500명 내외였다. 여기에 제공권과 제해권까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역습 결정
일반인의 상식에서 본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8월 초 마산에 급하게 투입된 미군 전력 일부를 다시 빼서 대구에 투입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8월 6일 병력 배치를 그대로 두고, 마산에서 진주 방향으로 역습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미군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방어하기 급급한 마당에 역습은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 일부 참모들은 장비가 부실한 한국군 쪽을 증원하지 않고 마산에 미군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이미 위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대구에 병력을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온갖 반대 주장에도 불구하고 워커 장군과 미 8군 작전참모 대브니 대령은 진주와 사천 방향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워커 장군은 “방어밀도가 약한 곳에다 증강하고 싶은 생각은 태산 같지만, 그것은 결국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과 같다”며 “최후에 공세로 이전할 때를 대비해 사전에 공격 경험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 같은 워커 장군의 결심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미8군은 두 개의 작전계획을 검토했다. 1안은 8월 초순에 미25사단을 투입, 진주를 향해 공격하는 방안이었다. 2안은 미 본토에서 전개되는 미 2사단이 도착하는 8월 중순에 진주를 공격한 후, 전남 순천을 거쳐 전북 전주, 충남 논산으로 계속 공격하는 야심만만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8월 중순까지 기다리기에는 무언가 당장 전쟁 흐름에 변화가 필요했다. 또한 과연 미군 2개 사단만으로 이 정도의 대규모 공세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1안이었다.
▶공격 vs 공격
워커 장군은 8월 6일,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25사단에 미 해병1여단과 전차대대를 배속시켜 킨 특수임무부대(TF)를 편성했다. 미 육군 25사단을 토대로 전력을 강화시켜 병력만 2만4000여 명에 달했던 킨 특수임무부대의 주임무는 진주와 사천을 향해 공격해 진주 입구의 진주고개~사천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부산 교두보를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또 북한군 6사단이 수세에 몰리면 대구 주변의 북한군이 마산 방면으로 이동해, 대구 방면 북한군 압력이 약해질 가능성도 작전의 기대 효과 중 하나였다.
8월 7일 아침 6시 30분 킨 특수임무부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킨 특수임무부대 예하 5연대전투단 2대대는 공격하자마자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미군이 역습하는 상황에서 북한군도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으로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마산과 진주 사이에서는 어느 한쪽이 공격을 하고, 한쪽이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모두 공격에 나서 정면 충돌했다.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가(Who attacks Whom)’라는 의문이 나올 만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전투 초반 미 육군 5연대전투단이 잠시 고전을 했지만, 상황은 그럭저럭 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8월 11일 무렵 전반적인 전투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가 뚜렷해졌다. 고성을 거쳐 사천을 향해 공격하고 있던 미 5해병연대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부터 공중지원을 받아 8월 11일 고성 서쪽 7㎞ 지점까지 진출했다. 미 육군 35연대도 이날 진주의 문턱인 진주고개에까지 진출, 진주 점령을 코앞에 둔 상황처럼 보였다.
▶포병의 무덤
그러나 마산과 진주 사이의 봉암리에 위치하고 있던 미 육군 5연대전투단의 상황이 문제였다. 8월 11일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포진한 북한군은 미군을 점점 옥죄어 왔다. 5연대전투단은 킨 소장에게 주변에 북한군 대부대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킨 소장은 미군이 주요 교통로를 장악한 상황에서 주변에 북한군 대부대가 있다는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 저녁 무렵 킨 소장은 5연대전투단 주력 부대에 봉암리 계곡 일대의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지시했다. 연대장은 사단장의 지시대로 이행할 경우 포위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단과 통신이 잘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단장이 전체 작전 상황을 고려해 지시한 것으로 생각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8월 12일 한밤중 북한군의 총성이 봉암리 일대 계곡에 몰아쳤다. 완전히 포위됐음을 깨달은 미 5연대전투단은 새벽 4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 육군 5연대본부, 90포병대대, 159포병대대, 555포병대대와 근무ㆍ의무중대 등 근접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포병부대들이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대본부 병력들은 간신히 고개를 넘었으나 포병부대가 출발하자 3개 방향에서 북한군 6사단 예하부대가 집중 공격을 가해 왔다.
결과는 참혹했다. 미 555포병대대는 사상자 180명과 105㎜ 곡사포 8문, 미 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 155㎜ 곡사포 6문을 잃었다. 미군들은 미 포병 3개 대대가 큰 피해를 입은 봉암리 계곡을 ‘포병의 무덤’ ‘피의 협곡’이라 부를 정도였다. 마침 포항 방면에서 격전이 벌어져 예비대가 필요했고, 공격도 순조롭지 못하자 마침내 워커 장군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역습작전을 중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했던 미군의 최초 공세는 이처럼 작전 성공의 문턱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 성공인가, 실패인가
킨 특수임무부대가 전체 병력 규모와 장비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봉암리 등지에서 북한군에 포위를 당했던 이유는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미군의 전술적 실패는 산악지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은 훗날 반격작전 시에도 도로 위주의 기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중공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킨 특수임무부대는 7일간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목표 중 하나인 진주고개를 탈환했으나, 작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정면의 북한군을 완전히 돌파하지 못했고, 방어선을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시키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미 육군에서도 전통적으로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은 실패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연구원 등 우리나라의 전사 전문가들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을 단순히 실패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마산 방면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시켜 마산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장병들에게는 공격전투의 경험을 쌓게 해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전술적인 수준에서는 실패한 작전이지만 작전적 수준에서는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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