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국군의 지연전

구름위 2013. 3. 1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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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지연전 당시 철수하는 한 국군부대 장병들의 모습.  철모조차 착용하지 못한 국군의 모습이 언뜻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장비가 부실한 악조건 속에서도 국군은 지연전 기간 동안 뚜렷한 전과를 거뒀다.>

 

 

 

<6·25전쟁 당시 육군 병사들의 표준화기였던 M1 소총.>

 

 1950년 7월 미군과 국군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지연전을 펼쳤으나 전선은 점차 후방으로 물러나기만 했다. 7월 3일 한강선이 돌파되면서 서부전선은 딱히 적당한 방어선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7월 4일에는 수원마저 함락됐다. 이에 앞서 7월 2일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다. 특히 강릉을 방어하던 8사단이 영월-제천 선을 따라 내륙으로 철수하면서, 동해안의 방어선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7월 5일부터 미 24사단을 비롯한 지상군이 한국에서 방어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유일한 희망의 불씨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미 24사단이 평택에서 대전까지 축차적으로 방어선을 형성해 혈전을 치를 동안 국군도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쳤다.

 당시 국군은 미군에 비해 장비가 부실했고, 초전의 피해로 사단급 부대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3000~8000명 수준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다. 객관적 조건으로 보자면 국군의 지연전에서 커다란 전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지연전 과정에서 미군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미군을 능가하는 탁월한 전과를 거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50년 7월 6~7일 충북 음성 북쪽 외곽에서 벌어진 동락리 전투와 7월 17일과 20일 경북 상주 화서면에서 벌어진 화령장 전투가 대표적이다.

 

 ▲ 동락리 전투

 개전 초반 북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던 6사단 7연대는 7월 초 원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충북 음성으로 이동하던 북한군 15사단 예하 연대급 부대를 기습 공격, 섬멸에 가까운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이 같은 동락리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별로 없으나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6사단 7연대 2대대장과 예하 중대원들은 1960년대에 남긴 증언에서 “동락리를 마주보는 644고지에 배치돼 있다가 7월 7일 오후 4시쯤 망원경으로 관측 중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 전투의 시초”라고 설명한다. 이후 “대대장의 독단으로 동락국민학교 외곽으로 이동해 5시에 기습 공격을 가해 북한군을 전멸시켰다”고 전투 경과를 설명한다. 혹은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7연대가 2대대의 독자적인 작전이 아니라 연대의 지휘 아래 2ㆍ3대대가 함께 참가한 조직적인 전투의 결과라는 증언도 있다. 7월 6일 동락리 부근에 주둔하던 6사단7연대 3대대가 일시 철수한 후 원 진지 부근으로 복귀했으나, 이를 완전 철수로 오인한 북한군이 경계 대책도 없이 차량 탑승 상태로 이동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는 것이 증언의 요지다.

 3대대가 신덕 저수지 부근에서 북한군 차량 대열에 기습 공격을 가할 때, 마침 2대대도 동락리에서 북한군의 차량 대열을 포착해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 밖에 위 두 가지 증언과 유사하나 시간이나 사건의 선후 관계, 세부 줄거리에서 약간씩 차이가 나는 증언들도 많다.

 이처럼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엄청난 전과를 획득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15사단 예하 연대 군수참모를 포함한 132명을 포로로 잡고 구경 122㎜ 곡사포 6문을 포함한 각종 포 54문, 장갑차 10대와 각종 차량 60대 등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북한군이 남기고 간 전사자의 시신만 1000여 구에 달했으며 급하게 도주하다 버리고 간 권총과 소총은 2000여 자루에 달했다. 이 전공으로 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 화령장 전투

 북한군은 7월 중순 소백산맥 일대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북한군 1사단과 15사단은 보은과 문경 사이의 간격을 통해 소백산맥을 돌파하려 했다. 국군 8사단은 안동 북쪽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남하를 대비하고 있는 중에 17연대도 보은 ~ 상주 사이의 25번 도로를 따라 7월 17일 상주 화령장에 도착했다. 17연대가 수도사단에서 2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된 데 따른 부대 이동이었다.

 선발대로 이동했던 국군 17연대 1대대는 화령장 도착 직후인 17일 아침 주민들로부터 “북한 부대가 상주방면으로 남하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날 11시 무렵,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 중인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면서 주민들의 제보가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북한군 1개 대대는 이미 남하했고, 북한군 후속부대도 곧 화령장에 도착할 상황이었던 것. 1대대는 병력을 배치하고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날 오후 4시쯤 북한군 15사단 48연대 예하 병력이 출현했다. 마침 북한군은 아군이 배치된 곳의 정면인 송계국민학교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을 취했다. 국군 17연대 1대대는 이날 19시30분 북한군이 경계병도 제대로 배치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자 기습적인 공격을 시작, 적을 격멸했다. 사살한 적만 700여 명에 달하는 대승이었다. 18일에는 17연대 수색대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북한군 전령을 또 생포했다. 이들은 북한 15사단장이 48연대에 보내는 전령이었다. 북한군 전령을 통해 북한군 45연대가 뒤이어 이동해 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17연대는 예하 2대대를 투입해 매복에 나섰다.

 19일 화령장에서 봉황산 동쪽 능선을 넘어 동관리 일대에 17연대 2대대 예하 중대들이 배치됐다. 이날 17연대 2대대는 우마차로 보급물자를 운반하는 북한군의 보급 수송대를 포착해 섬멸했다. 국군 17연대 지휘부는 아군이 북한군 전령을 여러 차례 생포하고 보급 수송대도 공격한 만큼, 북한군이 작전 노출 가능성을 고려해 공격계획을 변경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생각보다 미련했다. 21일 17연대 2대대 배치 지역에 북한군 15사단 예하 전투부대가 또다시 진입해 왔던 것. 매복 중이던 국군 17연대 2대대는 북한군을 기습 공격해 356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했다. 소총·박격포·기관총 등 노획한 화기류만 2.5톤 차량 3대에 가득찰 정도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 결과 북한군은 상주지역으로의 진출이 지연돼 문경지역에서 후퇴 중이던 국군 2군단 퇴로를 차단하려던 최초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으며 국군은 낙동강전선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17연대는 4일간의 매복작전 간 거의 매일 북한군의 전령이나 포로를 잡아 완벽하게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상태에서 연속적인 매복작전에 성공했다. 이 전투로 아군은 낙동강 방어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됐으며, 17연대 전 장병도 1계급 특진이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 유엔군 창설과 국군 재편성

 1950년 7월 북한의 공격 속도를 늦추기 위한 지연전이 한창일 때 국군의 지휘권과 부대 구조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는 제3차 결의를 통해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사령부(FEC : Far East Command)가 유엔군사령부 기능을 겸하게 됐다. 14일에는 미 8군사령부가 정식으로 대구로 이전해 유엔군 지상군을 지휘하게 됐다. 그 직후인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서한을 보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공식 인계했다. 순수하게 작전적 관점에서 볼 때 지휘권 통일의 이점이 컸을 뿐만 아니라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보다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지휘권 이양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를 전후해 우리 군은 육군의 재편성 작업을 진행했다. 7월 5일 정식으로 문서화된 육군 재편계획에 따라 한강방어전을 지휘하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육군1군단으로 개편돼 우리 군에 처음으로 군단급 부대가 탄생했다. 7월 12일에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던 6, 8사단을 지휘하기 위해 국군 2군단이 새롭게 창설됐다.

 재편성 과정에 대해 당시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은 “한 곳에 머물러 재편성할 시간이 없었고, 집결을 명할 통신수단도 없었다”“구두로 전달해 행군 방향을 알려 부대나 장병들이 저절로 모여드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 일이 있다. 백 장군은 “걸어가면서 부대를 재건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병력이 모여줬으니 그러한 마음가짐이 사단의 전력이었다”고 회고한다.

낙동강전투의 서막

<미 육군의 한 부대가 1950년 낙동강 방어선 형성 과정에서 이동하고 있다.>

 

 “각 부대의 장교 편제 정원을 2배로 늘려야 합니다. 한 사람은 인솔을 하고, 한 사람은 뒤에서 몰아쳐야 합니다.”

 1950년 7월 하순 미25사단 24연대장이었던 존 콜리 대령의 보고 내용은 미군 지휘부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사실상 병사들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고백한 내용이었기 때문. 6·25전쟁 참전 초반 상당수 미군 병사들은 위기가 닥치면 후퇴하려 했고, 그나마 책임감 강한 장교와 부사관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전황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콜리 대령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하던 그 무렵 소백산맥에 걸쳐 있는 전선 여러 곳에는 작은 구멍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전 함락 후 미군은 1기병사단과 25사단을 투입해 충북 영동과 황간에 방어선을 형성했지만 남쪽으로 밀리는 전선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소백산맥 일대의 전투

 미24사단은 대전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후 23일부터 재편성에 들어갔다. 19일 충북 영동에 도착해 24사단 철수를 지원하던 미1기병사단은 23일 김천으로 점진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펼쳤다. 미25사단은 19일 경북 상주에 도착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국군 1사단은 7월 23일 무렵 경북 상주와 북부와 함창 일대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6사단은 7월 중순 이화령-문경새재 등 소백산맥의 주요 교통로를 방어하다 23일 예천, 26일 의성·안계 등으로 점차 물러서면서 끈질기게 지연전을 계속했다. 8사단도 경북 풍기·영주를 거쳐 23일부터는 안동, 26일부터는 의성에서 지연전을 펼쳤다. 그 오른쪽에는 수도사단이 8사단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그나마 8사단과 수도사단은 안동 철수 과정에서 급박하고 무리한 철수 명령 탓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당시 미군이 방어하던 경북 김천 서북방에는 북한군 2ㆍ3사단과 105전차사단, 국군이 주로 방어하는 경북 북부에는 1·8·12·13·15사단, 경북 동해안 방면에는 북한 5사단이 투입돼 있었다. 개전 초반 김포 일대에 모습을 드러냈던 북한군 6사단의 움직임이 식별되지 않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정체불명의 대부대

 이 때를 전후해 전라도와 경남 서부 지역 일대에서도 북한군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미군 정찰기가 대전이 함락되던 7월 20일 무렵 군산에서 남하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대부대를 포착한 것. 미군은 7월 21일과 22일 이 부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지만 기상 조건이 나빠 정찰기가 뜰 수 없었다.

 미군들은 전차와 장갑차로 구성된 육상 기갑수색부대 투입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변변한 기갑 전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갑수색대를 당장 투입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23일 날이 맑아지자 미 공군 정찰기가 다시 전라도 상공을 대대적으로 뒤졌다. 미군이 20일 항공정찰로 포착했던 정체불명의 대부대는 23일에도 전주 주변에서 여전히 남하 중이었다.

 미군들은 이 부대가 북한군 4사단 중 대전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남하한 일부라고 판단했다. 미8군 정보참모부는 “이 부대가 시속 3.2㎞의 속도로 계속 전진한다면 25일에는 경남 서부의 함양 안의-진주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남 서부 지역에는 별다른 부대가 배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했다.
 

 ◆ 상관도 미안했던 명령

 미8군 사령관은 고민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 운용할 수 있는 미군 사단은 아직 3개뿐이었다. 상주의 25사단과 김천의 1기병사단은 핵심지역인 경부축선을 방어하고 있어 다른 곳으로 뺄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24사단뿐이지만 부대 상태가 문제였다.

 7월 초 미 지상군 중 가장 먼저 한국으로 출동했던 미24사단은 대전·영동에서 혹독한 격전을 치른 탓에 전투력이 무척이나 약해졌다. 60%의 장비를 상실했고, 병력도 절반으로 줄어 재편성 중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4일 말하기 미안한 듯 거북한 어조로 24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말했다. “귀관의 사단에 이러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네. 귀 사단은 즉시 서측방으로 이동해 진주와 김천을 잇는 선을 점령하고 군의 좌측 후방을 엄호해 주기 바라네.”

 이에 따라 25일 미24사단은 경남 서부지역으로 이동해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25일 19연대의 주력이 진주에 진출했고, 26일에는 34연대가 거창에 배치됐다. 24사단 사령부는 합천에 자리를 잡았다. 오키나와로부터 긴급 증원된 29연대 1·3대대도 24사단에 배속돼 전투력을 보강했다.

 
 ◆ 진주 함락과 서부전선의 위기

 국군도 위기감을 느껴 25일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해 경남 서부지역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6월 30일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이후 의기소침해 있던 채 소장은 새로운 임무에 강한 열의를 보였다.

 미군과 국군의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던 26일 경남 하동이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하동은 섬진강 동쪽 서부 경남의 관문이었다. 미24사단 예하 19연대장이었던 무어 대령은 하동을 공격해 북한 4사단으로 추정되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방어 병력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방어하기 보다 제한적인 역습을 감행하는 것이 시간을 버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19연대에 배속돼 있던 미29연대 3대대는 채병덕 소장과 함께 하동으로 출동했다. 마땅히 지휘할 병력도 없던 채 소장은 미군의 길안내를 자임했다. 하지만 미군과 채 소장은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채 소장은 전사했고, 미29연대 3대대 지휘부도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전사자는 313명, 포로도 100명이 넘어 29연대 3대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하동을 통과한 북한군은 31일 미19연대가 방어하던 진주를 공격, 점령했다. 진주가 함락된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적의 정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 북 6사단의 우회 기동

 진주가 함락되기 며칠 전인 7월 28일 무렵부터 미8군에서는 서부 경남 전방의 적 정체에 대해 약간씩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적 정체가 북한 4사단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움직임이 너무도 광범위했다. 31일에서야 미군은 경남 서부에서 전진해 오는 적 부대가 북한 4사단과 6사단, 2개 사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6사단 출현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7월 중 군산·전주를 거쳐 남하하던 정체불명의 부대가 북한 6사단이었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다. 북한 6사단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전주·정읍·광주를 거치는 코스로 크게 우회해 경남 서부지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미군은 경악했다. 경남 서부에 북한군 1개 사단이 아니라 2개 사단이 있다면, 이미 전력이 약해진 미24사단만으로 방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4·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는 나름의 정예부대였다. 특히 구 중공군 출신이 많은 6사단은 전투 경험이 경계 대상이었다.

 이미 진주까지 진입한 6사단이 마산으로 공격해 오면 부산 함락도 시간 문제였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은 북한군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미군의 전력을 증강시켜 9월 중순부터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부산이 함락될 수도 있는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미8군뿐만 아니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 워싱턴의 합참에까지 경악과 낭패감이 퍼져 나갔다.

 워커 사령관은 8월 1일 결단을 내렸다. 경북 상주의 25사단을 빼서 경남 마산에 투입하고, 소백산맥에 걸쳐 있던 방어선을 대폭 축소해 낙동강 이동과 대구 북쪽부터 포항 북쪽의 산악지대를 연결하는 선에 부대를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마산 위기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심 끝에 1950년 8월 1일 25사단을 경남 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사후 처리는 첩첩산중이었다. 정면의 적과 전투를 벌이면서 철수와 이동을 하는 것은 쉬운 임무가 아니었다.

 소백산맥 일대의 국군과 미군들을 낙동강선으로 조직적으로 철수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미 25사단의 이동 자체도 문제였다. 일단 상주에서 방어 중이던 미 25사단이 경남 해안지역으로 철수한다는 사실이 적에게 알려진다면, 북한군이 이를 노리고 집중 공격을 감행할 위험도 있었다.

 미 25사단이 이동하기 위한 주된 교통수단은 철도였다. 하지만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미 포화상태인 철도로 1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통째로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란 점도 문제였다. 더구나 당시 철도와 교통로에는 군수물자를 싣고 전방으로 향하는 열차와 군용차량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거슬러 미 25사단이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자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교통 혼잡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았다.

 이런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 국군 사단들은 미군보다 더 북쪽이나 동북쪽에 배치돼 있어 마산까지 이동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국군 사단들이 전반적으로 차량이 부족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미 25사단을 투입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상주 방면 미 25사단 정면의 적인 북한 15사단은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북한 15사단은 동락리 전투와 화령장 전투에서 국군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미군 포병의 집중 사격까지 받아 전투력이 약화돼 있었다. 워커 장군은 이러 장단점을 고려한 끝에 미 25사단을 경남 해안지역에 투입할 부대로 정한 것이다.

 
 ◆ 미 25사단 마산 투입 

 워커 장군은 일단 철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지역에 도착하는 모든 열차를 징발해 왜관으로 보냈다. 긴급 임무를 수행하는 일부 열차를 제외하고는 모든 열차가 미 25사단 이동에 투입됐다. 도로 사용에도 미 25사단에 우선권을 부여했다.

 미 25사단의 이동 사실이 북한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또한 미 25사단이 이동할 때 미 1기병사단이 엄호를 제공해 적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북한 게릴라와 좌익들의 철도 공격을 막기 위해 미 공군과 한국 경찰까지 총동원돼 이동 경로를 경비했다.

 8월 1일 오후 2시 마침내 미 25사단에 철도로 경남 삼랑진으로 이동, 적의 전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2일 이른 새벽 무렵에는 미 25사단에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라는 수정 명령이 하달됐다. 마산이 함락될 위험성이 높아 그 후방인 삼랑진에 일단 이동할 작정이었지만, 미 24사단이 그 시간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함에 따라 목적지를 마산으로 변경한 것이다.

 미 25사단 주력은 8월 2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 3일 저녁 무렵엔 목적지인 마산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상주에서 왜관까지는 차량으로, 왜관에서 마산까지는 철도를 이용해 명령 하달 후 36시간 만에 총 240㎞를 이동,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워커 장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유사 이래 가장 극적인 기동으로 부산을 구했다”고 기뻐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조차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24사단의 마산 재배치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낙동강 전선 형성

 8월 1일 소백산맥 일대의 나머지 미군과 국군 사단들도 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방어선 형성은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8월 1일부터 3일까지는 낙동강 외곽선(X선)에서 적을 지연하면서 새롭게 진지를 편성할 낙동강 방어선(Y선)에 대해 정찰 작전을 펼쳤다.

 북한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철수와 방어선 형성의 와중에 적극적인 위력수색을 실시하기도 했다. 특히 미 27연대 1대대는 8월 2일과 3일 위력수색 중에 북한군과 두 차례나 교전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미 25사단이 새로운 진지에 포진할 시간을 벌었다. 미 1기병사단도 왜관으로 철수하고, 8월 4일까지는 낙동강 위의 주요 교량을 모조리 폭파했다.

 육군본부도 8월 2일 예하 국군 사단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육군 2군단 예하 1ㆍ6사단의 철수작전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옥에 티는 안동 일대에 포진한 육군 1군단의 철수였다. 영어로 된 철수 명령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명령 하달과 접수가 지연된 탓에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야간에 급박하게 철수작전을 강행하다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던 것.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8월 4일 무렵에는 경남 남해안부터 마산~창녕~대구~왜관~의성 낙동리~안동 남쪽~영덕~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선에 새로운 방어진지 편성이 완료됐다. 낙동강 방어선, 이른바 워커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일단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인 낙동강은 강폭이 400~800m에 달해 강행 도하가 쉽지 않은 천연의 장애물이었다. 안동 동쪽으로 동해안까지, 창령 남지면부터 남해안까지는 강이 없었지만 험준한 산악지역을 이용해 방어선을 편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 마산 위기의 파장

 이렇게 워커 장군은 마산에서 촉발된 위기를 방어선 재편성과 미 25사단 투입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미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부산이 위협을 받으면서 반격작전 때 상륙작전부대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미 2사단과 해병대 임시1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월 중순께로 예정돼 있던 반격작전 때 투입할 2개 사단을 새롭게 마련해야 했다. 그 후보로 정해진 부대는 일본 주둔 미 7사단과 미 본토 주둔부대로 유럽 파견을 앞두고 있던 미 3사단이었다. 마산의 위기가 미군의 반격작전 등 전체적인 전쟁 수행의 기본 틀을 바꾸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마산 위기는 북한군과 미군에게 승패의 운명을 가르는 갈림길이기도 했다. 금강을 건너 호남을 휩쓸고, 마산으로 몰아닥친 북한 6사단의 기동은 화려했지만, 속도 면에서 실속이 없었다. 만약 북한 6사단이 호남의 항구 도시들을 일일이 점령하지 않고 바로 마산으로 직접 공격했다면, 2일 정도 더 빨리 도달하는 것도 가능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낭비한 이틀 때문에 마산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미 육군의 6ㆍ25 공식 전사에서는 워커 장군의 발언을 인용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틀을 낭비한 탓으로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 워커 라인의  뿌리

 낙동강 방어선, 다시 말해 워커 라인은 마산 위기로 급하게 형성된 방어선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유엔군과 국군 지상군을 지휘하게 된 워커 미 8군사령관은 이미 7월 17일부터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아직 대전이 함락되기도 전이었지만 노련한 워커 장군은 금강방어선은 물론이고, 소백산맥의 방어선도 결국에는 뚫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이미 국군 수뇌부에게도 사전 통보가 돼 있었다. 7월 18일 워커 장군은 정일권 육ㆍ해ㆍ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과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왜관 상공을 비행하다 낙동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차후의 방어지역으로 이미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생각으로만 진지를 정해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진지 공사를 해둔 것도 다행이었다. 우리 정부의 협조 아래 미군은 이미 7월 하순부터 낙동강 방어선 곳곳에 교통호와 각종 진지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에서 혈전이 벌어질 때도 데이비스 라인을 후방에 미리 마련해 전황 악화에 대비했다.

 금강에서 싸우면서 낙동강에 미리 방어선을 마련하는 식의 사전 준비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현행 작전뿐만 아니라 차후 작전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고, 그처럼 노련한 지휘는 국군과 미군이 다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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