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정한 트루먼(왼쪽) 미 대통령과 군사지원 범위 확대를 끈질기게 주장한 맥아더(오른쪽) 원수.>
“한국 중심의 전쟁 계획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또 지금까지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지도 못했다.”
루이스 존슨 미 국방장관이 미국 현지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오후 7시 40분 백악관 블레어하우스 회의에서 했던 발언이다. 전쟁계획조차 없다는 미 국방장관의 발언 이면에는 당시 미국이 느낀 당혹감과 미군의 열악했던 전쟁 대비 태세가 함축적으로 깔려 있었다.
500여 명의 고문단을 제외한 주한미군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고 주한미군사령부가 기능을 정지한 시점은 1949년 6월 29일이었다.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 지 1년 만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주말의 급보
언론보도와 군사고문단의 보고, 무초 주한 미 대사의 전문 보고 등에 의해 북한의 남침 소식이 워싱턴에 처음으로 전해진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25일 오전 9시 30분, 미국 현지시간으로 24일 토요일 오후 8시 30분쯤이었다.
주말이라 상당수의 당국자는 아예 워싱턴을 떠나 있는 미묘한 시간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에 있는 그의 사저를 방문하는 중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메릴랜드 주의 교외 농장에서 휴식 중이었고,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도 체사피크 만 해안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무초 주한 미 대사의 전문이 국무부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간 24일 밤 9시 26분이었다. 주한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의 보고 내용은 현지시간 24일 밤 10시 45분에 미 육군 작전참모부로 전달됐다. 군 계통의 보고가 외교관의 보고보다 1시간 20분 늦게 도착한 것이다.
▲트루먼의 결단
미국 시간 25일 오전 11시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딘 러스크 국무부차관보 등 미 육군과 국무부의 주요 관계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향후 미국의 대응조치를 논의했다. 우선적으로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부의 해ㆍ공군 전력을 투입,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의 안전한 철수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주한 미 고문단이 요구할 경우 극동군사령부가 추가 군사장비를 한국에 보내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25일 오후 1시쯤 애치슨 장관은 북한의 적대행위 종결과 철수를 요구하는 유엔 결의안 초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워싱턴으로 복귀하는 비행기 안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과 독일의 침략을 방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번진 사례를 되새겼다. 그때 이미 트루먼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한국을 침략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25일 저녁 7시 45분부터 백악관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 존슨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 외교-안보 수뇌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26일 오전에 열렸던 육군-국무부 사이의 회의 결과를 우선 추인했다. 해ㆍ공군 전력을 동원해 미국인의 철수를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지원은 허용하지 않았다.
▲워싱턴과 도쿄의 온도 차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결심하긴 했지만 미국이 다른 지역, 특히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을 받을 정도로 대규모 군사 개입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 박자 늦은 워싱턴 상황과 달리 미 극동군의 실제 상황은 훨씬 긴박했다. 백악관회의에서 해ㆍ공군을 동원한 미국인 철수 지원을 추인하기 전에 이미 미 극동공군은 행동을 개시했다. 미 극동공군 소속 F-82 전투기가 김포비행장 상공에서 북한 YAK-3 전투기를 격추하면서 첫 전과를 기록한 것.
미국 시간 26일 밤 9시,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충격적인 보고를 워싱턴으로 보내 왔다. “한국군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는 한국시간으로 27일 오전, 의정부를 함락한 북한군이 창동으로 쇄도하는 상황이었다. 맥아더의 메시지에 담긴 의도는 분명했다. 미군 개입의 범위를 확대하자는 것.
마침 이 시간 백악관에서는 또다시 외교-안보 수뇌가 참석한 2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맥아더의 전문으로 보아 더 이상의 작전 제한은 무리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38선 이남에서 극동 해ㆍ공군의 작전에 제한을 풀기로 했다.
이제는 미국인 철수 지원과 상관없이 38선 이남의 모든 북한 군사목표에 대한 전면 공격이 허용됐다. 동시에 미 합참은 미 해군7함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사령부에서 도쿄에 있는 극동사령부로 이양했다.
▲작전 범위 단계적 확대
한국의 서울이 함락된 후 미국 시간 29일 오후 5시 미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통해 미국은 필요할 경우 38선 이북이라 할지라도 군사목표일 경우 해ㆍ공군에 의한 공격을 할 수 있게 정식 허용했다. 그러나 부산ㆍ진해 지역의 항구와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육군 전투부대의 투입을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극동군사령부의 움직임에 비해 여전히 너무 느린 것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백악관과 합참이 승인하기 하루 전인 미국시간 28일 극동공군이 38선 이북의 북한 비행장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이미 허가한 상태였다.
맥아더는 한국 시간 29일 수송기를 타고 한국을 방문, 한강전선을 시찰했다. 한강전선에서 한 한국군 병사를 만나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바로 이때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일화는 한국군의 방어 결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지만 미국의 참전 범위 확대는 이 같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극동사령부와 백악관의 시각 차이를 조정해 가는 보다 거대한 틀 위에서 진전되고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 방문 결과를 근거로 미국 시간 29일 밤 10시 30분 “현재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상실될 지역을 회복할 능력은 미군 지상군 부대의 투입 여부에 달려 있다”는 비밀보고를 워싱턴에 보냈다. 지상군 없이 해ㆍ공군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맥아더가 보낸 전문의 요지였다.
이 같은 견해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미국 시간 30일 새벽 4시 콜린스 육참총장과 딘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 맥아더 사령관은 텔레타이프로 원격 회담을 시작했다. 맥아더는 지상군 파견을 승인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콜린스 육참총장은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할 것”이라며 즉답을 회피했다.
결국 페이스 미 육군장관은 새벽 5시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에게 맥아더의 요청을 보고하고 1개 연대 전투단의 파병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트루먼은 즉시 승인을 했으나 2개 사단의 추가 파병 검토에 대해서는 결심을 유보했다.
이 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기 위한 회의는 미국 시간 30일 오후에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대 규모에 국한된다”는 전제 아래 마침내 “30일부로 육군 병력의 투입 제한 조치를 해제한다”고 결정, 미 지상군 투입을 마침내 승인했다. 맥아더 원수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미국 안보 수뇌부는 6ㆍ25전쟁 개전 5일 만에 육ㆍ해ㆍ공, 38선 이남과 이북의 제한이 없는 완전한 군사적 지원을 마침내 허용한 것이다.
■ 한국방위 지지 유엔 결의 과정-2차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사실상 병력 파견 결의
유엔 긴급 안전보장이사회가 처음 열린 때는 25일 오후 2시였다. 미국 대표는 “북한의 행동은 평화에 대한 파괴 행위”라며 “북한군이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결의안 초안을 낭독했다. 또한 한국 대표가 안정보장이사회에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장면 주미 대사는 “북한의 우리에 대한 침략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라며 “한국정부 수립에 유엔이 큰 역할을 했는데 세계평화 유지에 기본 책임을 지닌 유엔 안보리가 침략을 적극 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는 요지의 성명문을 낭독했다. 긴급 안전보장이사회 결과 미국의 결의안은 유고슬라비아의 반대 1표를 제외한 9표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보다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유엔회원국에 권고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은 미국 시간 27일 오후 3시에 열린 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됐다. 사실상 병력 파견을 결의한 이 같은 결의안은 소련의 불참과 유고슬라비아의 반대 1, 인도와 이집트의 기권에 따라 찬성 7표로 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