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시작됐던 초반 전투는 6월 28일 서울 함락으로 일단락됐다. 길고도 길었던 나흘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나자 서울에는 태극기 대신 음울하기 짝이 없는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서울만 잃었던 것이 아니다. 김포ㆍ춘천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켜 비록 완전 포위는 면했지만 운명의 나흘이 끝났을 때 우리 육군이 보유한 8개 사단 중 5개 사단이 재편성을 해야 할 만큼 혹심한 피해를 당했다.
○이형근 장군의 의혹 제기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이토록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까. 이 문제와 관련, 이형근 장군은 1993년 이른바 ‘6·25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6·25 전쟁 개전 초 현장 지휘관 중 한 명이자 훗날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던 이 장군은 반드시 풀어야 할 의문이라며 10가지 항목을 제시한다.
첫째, 북한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ㆍ무시했다는 의혹이다. 둘째, 6월 15일 전쟁 발발 열흘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사단장과 연대장을 대대적으로 교체한 것은 의심스럽다는 것. 셋째, 6월 13일부터 20일에 걸친 부대 배치 변경도 의심받는 사건 중 하나다. 이 장군은 이들 조치 때문에 지휘관들이 지형은커녕 부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고 비난한다.
넷째, 6월 24일 0시부터 육본이 비상경계조치를 해제시켜 버린 이유도 의문이다. 다섯째, 경계 해제와 더불어 장병의 절반에게 휴가를 준 것도 이 장군의 의심하는 대목 중 하나다. 여섯째, 24일 육군장교회관 낙성 파티도 의혹의 대상이다.
일곱째, 이 장군은 개전 초반 병력 축차투입(逐次投入)을 통해 불필요한 희생을 불러온 것도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 여덟째, 이 장군은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국군이 반격 중이라는 허위 방송이 나감에 따라 군부는 물론 국민들의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아홉째, 이 장군은 한강교 조기 폭파도 국군의 퇴로를 차단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반역행위라고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이 장군은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을 지고 육군 공병감이 처형된 것에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간첩 있었나?
이 장군의 의혹 제기는 매우 강경하다. 이 장군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심지어 “나로서는 수상하다고 느껴온 사람들이 있지만 심증만 갖고 꼭 집어 거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며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폭탄성 발언까지 남겼다. 일각에서는 이 장군의 이 같은 의혹 제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실 거물급은 아니지만 소부대 지휘관 중에 적과 내통한 인물임이 확인돼 전쟁 중 체포된 인물은 있었다. 서울 주둔 모 연대의 중대장이었던 이모 대위가 대표적이다. 국방부 전편위가 1968년 펴낸 한국전쟁사 2권에 따르면 이 대위는 회기동-청량리에서 방어전 중 적에게 아군 상황을 알려준 혐의로 체포됐다.
이 대위는 부대가 가평ㆍ동작동ㆍ청량리로 이동할 때마다 연락병에게 쪽지를 주며 누군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중대 부관이 의심스러워 쪽지를 펼쳐보자 “돈 얼마를 누구에게 전달하라”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연대 정보과의 조사 결과, 이 대위는 공산당원으로 적에게 부대 규모와 주둔지 이동을 꾸준히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군은 건군 이후 군내 좌익들을 꾸준히 적발했으나 정체를 숨긴 내부의 적들이 심지어 일선의 소부대 지휘관 자리에서조차 암약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의 시각
하지만 이 장군의 의혹 제기는 소부대 지휘관이 아니라 군내 요직자나 그 측근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때문인지 전문가들은 10대 의혹을 인정하는 데 회의적이다.
첫 번째 북한 남침에 대한 경고가 묵살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 측보다는 미군 측의 오판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 개전을 전후해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 장군도 2001년 펴낸 회고록에서 전쟁 전 남북한의 군사력 격차 문제로 미 고문단 측과 논쟁을 벌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사 이동 문제도 공산 게릴라를 상대로 한 토벌전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이 주요 지휘관으로 전진 배치됐다는 점에서 수긍할 요소가 있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비상경계조치 해제도 육본이 아니라 미 고문단 측의 특정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증언이 있다. 전문가들은 미군 측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던 데다 경계태세로 일본 방문 등 휴식을 취할 수단을 제한받자 우리 육본에 비상경계 해제를 권고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오판과 개인 편익을 위한 안이한 생각이 원인이었다는 것.
병력 축차투입의 경우 아쉬운 작전지도라는 점에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진다. 하지만 그 의도의 순수성까지 의심하는 데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리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그런 상황에 몰려 버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허위 방송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책임이 일부 있던 모 육군대령이 6월 28일 방송국에 들렀다가 북한군의 기습에 전사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의혹의 시선으로 보기엔 곤란한 측면이 많다.
한강교 조기 폭파 문제도 늦어도 28일 새벽 1시를 전후해 미아리 방어선이 붕괴된 이상 한강교 폭파 결정은 결코 조급한 것이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 북한 전차가 시내 요지 점령 등 비군사적인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직행했다면 새벽 3시 이전에 한강교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이처럼 이 장군이 제기한 의혹을 확인해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의혹이 모조리 우연처럼 발생했다고 보기에는 묘한 구석도 있어서 의심을 완전히 거두기도 어렵다. 이 장군이 던져 놓은 열 가지 의혹이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내부의 적’이라는 소재의 폭발성과 함께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그 질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가부간에 단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북한군의 3대 미스터리-결정적 국면마다 `능력 부족'
6·25 초반 북한군 공격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스터리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6·25 개전 초반 북한군의 남침 과정이 무척 순조롭게 보이지만 막상 공격 시간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대목이 많다는 것.
북한군은 6월 25일 오전 11시 무렵 포천읍을 점령하고도 그곳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의정부에 진입한 것은 26일 정오 무렵이었다. 이미 25일 밤 축석령 고개에는 아군이 사실상 없었지만 북한군은 무려 25시간을 허비한 것.
의정부 진입 이후의 행적도 의문이다. 북한군이 26일 정오 무렵 의정부에 진입했지만 코앞의 백석천을 통과한 것은 27일 새벽 4시였다. 무려 16시간을 날려 버린 것. 우리로선 다행한 일이었지만 북한군은 막상 결정적 국면마다 제자리걸음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그중 결정판은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하고도 7월 1일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아 그들 입장에선 천금 같은 3일을 날려 버린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연 사례들은 개전 초반 북한군의 3대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일차적으로 그만큼 우리 군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분투한 결과 때문이겠지만 북한군 내부에 그만큼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구소련 측의 라주바예프 보고서도 북한군 내부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라주바예프는 당시 북한군 참모부의 준비가 부족하고 추격 작전이 미흡했다는 지적과 함께 “다수 북한군 군관(장교)들의 창의성이 부족해 상급 지휘관이 지시하지 않으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상황이 다수 발생했다”고 비난한다. 교통 혼잡이나 역행군 사례도 확인될 정도로 개전 초반 북한군의 기동에는 문제가 많았다. 우리 군의 10대 미스터리는 여전히 일부 의문이 남아 있지만 북한군의 3대 미스터리는 ‘능력 부족’이라는 네 글자로 모조리 해석 가능한 셈이다.
춘천전투
<6·25전쟁 개전 초기 국군의 주요 대전차무기 중의 하나였던 M1 57㎜ 대전차포. 6월 25일 국군6사단 심일 소위가 북한군 Su-76 자주포를 격파한 무기도 바로 M1 대전차포였다.>
북한군 남침 작전계획의 핵심은 1ㆍ3ㆍ4ㆍ6사단, 105전차여단으로 구성된 북한 1군단이 서울을 3일 이내에 점령하는 동안 2ㆍ12사단과 603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북한 2군단이 춘천ㆍ홍천을 점령한 후 수도권 외곽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 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북한군 2사단으로 하여금 춘천 점령 후 하남 방면으로 공격해 서울을 동남방에서 포위하고, 오토바이 사이드카를 대량으로 보유한 603모터사이클연대는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 수원선을 차단, 2~3중의 외곽 포위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북한군의 복안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 점령 자체보다 국군 부대를 포위 섬멸하는 것에 북한군 작전계획의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 2군단 임무의 중요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전쟁 당시 중동부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던 국군 부대는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사단사령부를 원주에 두고 예하 7연대를 춘천에, 그리고 2연대를 홍천, 예비연대인 19연대를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모진교 피탈
춘천 전투도 초반부터 상황이 유리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6월 25일 오전 개전 직후 북한 2군단 소속 2사단에 모진교를 피탈당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38선 남쪽 300m에 자리 잡은 폭 4m, 길이 250m의 모진교는 화천과 춘천을 연결하는 도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요지 중의 요지였다.
당시 북한 2군단 공병부부장이었던 주영복은 모진교 점령 직후 북한군 분위기에 대해 “당시 북한 2군단 지휘부에서 보고를 듣고 모진교를 정말 점령했느냐, 그것이 폭파되지 않고 남아 있었느냐고 반문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그만큼 북한군으로서도 모진교 점령은 뜻밖의 전과였다. 아군으로서는 모진교 피탈과 함께 폭 47㎞에 달하는 6사단 7연대 방어 정면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위기 상황이었다.
○7연대 하루에 4연승
하지만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우선 연대 예비인 7연대 1대대에 25일 새벽 5시 비상을 발령해 오전 7시 무렵 춘천 시가지 북쪽 소양강 북안의 고지군에 전진배치했다. 모진교를 돌파한 북한군 2사단이 25일 정오쯤 옥산포에 도달했을 때 국군 7연대 1대대의 화력이 불을 뿜었다.
옥산포에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고 후퇴한 북한 2사단 6연대는 25일 오후 2시쯤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 왔다. 자주포를 처음 본 국군 장병들은 전차로 오인하고 사기가 저하됐으나 연대 대전차포중대의 심일 소위가 M1 57㎜ 대전차포로 Su-76 자주포 2대를 격파하면서 적의 공격을 중단시켰다.
비슷한 시간, 7연대 2대대는 30명의 특공대를 선발, 천천리 앞 소양강에서 도하를 준비하고 있던 북한군 2사단 4연대를 기습,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북한은 이날 저녁 6시가 되도록 소양강 도하에 실패하자 북한군 2사단 17연대를 투입,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국군 7연대 1대대는 지형상 맞받아 치는 것이 좋다고 판단, 이날 저녁 7시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아군의 거센 반격과 포격에 그대로 노출돼 거의 궤멸 직전의 상황으로 몰렸다. 이처럼 국군 6사단 7연대는 하루 동안 네 번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둬 개전 첫날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 계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소양교 폭파 논란
국군 7연대 1대대는 26일 오전 옥산포 일대의 적에 또다시 공격을 가하는 등 능동적인 기세를 유지하며 북한군의 공격 재개를 지연시켰다. 하지만 연대장은 소양강 북안에서 계속 방어전을 펼치기보다는 소양강 남쪽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좋다고 판단, 26일 오후 3시쯤 1대대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국군 7연대와 19연대는 춘천시가지 북쪽의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며 적의 도하에 대비했다. 26일 오후 8시 사단 공병대대장 박정채 소령은 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소양교 폭파를 건의했다. 하지만 사단장은 소양교 폭파 건의를 기각했다. 육군본부와 통신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전체 전선 상황을 몰랐던 사단장은 다시 반격을 할 때 소양교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연대 홍천으로 투입
27일 새벽 5시 요란한 포병사격을 신호로 북한군은 다시 춘천 정면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결정적 시기에 사단장은 19연대와 1개 포대를 춘천에서 빼내 홍천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사단장은 어차피 춘천은 소양강이라는 천연 장애물로 방어하기에 쉬운 지형인데 비해, 북한군에 먼저 점령되면 사단 주력이 포위망에 빠질 우려가 있는 홍천에 아군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7연대가 27일 오전 내내 북한군과 격전을 치를 즈음 마침내 사단과 육군본부의 통신이 재개됐다. 육본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의정부가 이미 함락됐다”고 전하면서 “6사단도 사단장 판단하에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그제서야 전체 전선 상황을 이해한 6사단장은 7연대에 현 전선을 이탈, 후방 원창고개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국군 7연대는 춘천~홍천 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 특히 29일 원창고개에서 총 5차례에 걸친 북한군 공격 중 4차례의 공격을 저지하는 등 끈질지게 방어전을 펼쳤다.
○말고개 방어전
인제에서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방어하던 2연대는 북한군 12사단의 공격에 맞서 신남ㆍ어론리ㆍ자은리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방어전을 펼쳐 공격 속도를 지연시켰다. 27일 19연대가 증원된 이후 28일 오전 국군 2연대가 국지적인 반격작전을 펼칠 정도로 이 지역의 국군도 왕성한 사기를 자랑했다.
특히 국군 2연대와 19연대는 6월 28일 말고개의 커브길에서 북한군 제12사단 자주포대대의 자주포를 10여 대 파괴, 다시 한번 북한군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처럼 6사단은 인원·장비와 화력 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군 전체 작전계획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춘천 전투의 의미
춘천전투 당시 북한군은 국군 6사단보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면에서 10배 이상 우세했다. 이 같은 압도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국군 6사단이 선전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때문이었다. 우선 임부택 중령 등 지휘 능력이 우수한 지휘관이 지형을 잘 활용해 전투를 진행한 데다 김성 소령이 지휘하는 16포병대대의 신기에 가까운 포병 사격 실력이 결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거뒀다. 여기에 심일 소위, 19연대의 육탄 11용사, 2연대 57㎜ 대전차포중대 요원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장병들이 감투정신을 발휘함에 따라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평이다.
결과적으로 국군 6사단은 개전 초기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켜 적의 포위망 구축 기도를 완전 분쇄했다. 서울 함락 이후 전체적인 전선 조정으로 국군 6사단도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개전 초반 북한군 포위망의 왼쪽 팔을 끊어 국군 주력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 `말고개' 전공 놓고 청문회가 열렸던 이유-“적 자주포 어느 부대가 파괴했나” 격론
1977년 7월 22일 오후 2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난데없이 말고개 전투를 주제로 청문회가 열렸다. 세미나도 아니고 청문회가 열렸던 이유는 6월 28일 홍천 동북방 말고개에서 적의 전차(실제로는 자주포)를 파괴한 것이 과연 어느 부대였는지 너무도 논쟁이 첨예했기 때문이다.
6사단 19연대는 육탄 11용사의 육탄 돌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6사단 2연대는 연대 57㎜ 대전차포중대가 적 전차 파괴의 주인공이었다는 입장이었다.
청문회에서는 양 연대 관계관과 참전용사를 비롯해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실장, 합참 작전과장, 육군사관학교 전사교수, 육군 작전참모부 기갑과장, 육군병기감실 야전정비장교 등 진실을 가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문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두 시간에 걸친 엄청난 격론 끝에 당시 청문회에서 내려진 공식 결론은 2연대와 19연대의 공동 공적이라는 것. 의도하지 않게 비슷한 시간에 동일한 표적의 적에게 공격을 가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