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은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오전에 개성이 함락된 데 이어 포천이 함락되고 밤 10시에 동두천까지 함락되면서 한국군 지휘부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도 참담한 6월 25일이 끝나고 26일 오전 1시가 됐을 때 의정부의 국군7사단 사령부에는 세 명의 장군이 모여 있었다.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2사단 이형근 준장,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붕괴가 시작된 중서부 전선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가 대화의 주제였다.
채 총참모장은 두 명의 사단장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7사단은 1연대와 18연대를 병렬해 덕정에서 38도선을 향하여, 2사단은 5연대로 축석령에서 포천을 향하여 26일 미명을 기해 역습하라.” 현 위치에서 방어전을 펴는 것이 아니라 적을 향해 역습을 가하라는 명령이었다. 나중에 육본 작명 91호로 정리된 역습의 작전개시 시간은 26일 오전 8시, 최종 공격 목표는 38선의 회복이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동두천이 25일 밤 10시 무렵 함락된 후 1연대는 재편성 중이었다. 여기에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18연대를 추가 투입해 7사단장 지휘하에 동두천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포천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더 복잡했다. 7사단 9연대가 포천에서 이탈, 광릉쪽에서 후퇴하기 직전인 25일 오전 11시 수도경비사령부 3연대가 포천 방면에 추가로 투입됐다. 여기에 5연대를 추가 투입해 2사단장 지휘하에 포천 방면으로 공격하라는 것이 육본의 지시였다.
장군들의 논쟁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지시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채 총참모장의 지시에 강하게 반발했다.
“5연대는 실병력이 2개 대대뿐이다. 2개 대대로 역습해도 성공은 보장할 수 없다. 26일 아침 일찍 2사단 16연대와 25연대가 도착할 것이다. 이들 연대의 집중을 기다려 운용해야 한다. 전장에서 병력의 축차 투입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뿐만 아니라 적 전차를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2사단장은 어차피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천연 장애물인 한강선에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 총참모장은 2사단장의 이 같은 반대를 일축하면서 “북한 포병 화력과 전차에 대해 정신적으로 위축되지 마라”고 고함을 질렀다.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적 전차에 육탄 공격을 하라”는 것이 총참모장의 엄명이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군 수뇌부의 의견 대립까지 겹쳐지며 상황은 자못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총참모장의 명령에도 끝내 2사단장이 반대를 계속하자 논쟁은 격렬해졌다. 심지어 당시 논쟁 당사자 중 한 명이 상대방에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믿을 수 없는 풍문까지 전해질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끝내 2사단장이 반대를 계속하자 채 총참모장은 2사단 5연대 2대대장인 차갑준 소령에게 직접 구두로 역습 명령을 하달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의정부에 달려 있다. 지금 포천 방면에서 넘어오는 고개(축석령을 의미) 앞에는 적 전차 30대가 있다. 특공대를 편성, 공격해 이를 격파하라. 귀관이 성공하면 중령으로 특진시킨다.”
사라진 3연대
2사단 예하 부대 중 가장 먼저 투입된 5연대의 2대대는 출발 당시 탄약이 충분하지 못했다. M1 소총의 경우 15~40발, 카빈 소총 15발,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80발 정도씩이어서 한 기수에도 미달하는 양이었다. 협의 끝에 축석령에서 탄약을 추가로 지급받기로 약속받고 2사단 5연대 병력이 의정부를 출발한 것은 26일 새벽 3시였다.
하지만 축석령에 도착한 5연대 2대대 장병들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통보받기로는 축석령에는 3연대 병력이 방어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축석령에서 목격한 장면은 국군9연대와 3연대 패잔병 서너 명이 갈피를 못잡고 서성대고 있는 광경이었다.
당시 군 수뇌부에서는 포천 방어에 실패하고 후퇴한 9연대 대신 새롭게 투입한 3연대가 축석령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송우리에서 패전한 3연대는 지휘체계가 이미 와해된 상황이었다.
3연대장은 부대가 축석령에서 방어전을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통제 불능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고하지 않았다. 또 지휘책임을 맡은 상급 부대도 3연대 상황을 명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유무선 통신이 수시로 불통돼 통신 연락이 되지 않았어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축석령 앞으로 북한군 T-34 전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습이 문제가 아니라 축석령 방어 자체가 가능한지조차 의문스러운 위기상황이었다. 5연대 2대대장은 축석령 고개 좌우에 병력을 배치하고 급편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9연대와 3연대가 그랬듯이 어떤 무기로도 북한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그나마 탄약을 추가 보급하기 위해 축석령 후사면으로 올라오던 아군 보급차량마저 적의 포격에 파괴됐다. 그렇게 5연대의 역습 아닌 역습은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26일 오전 9시 1대대가 추가로 증원되고 포병학교 교도대 소속 M3 105㎜ 곡사포 등 증원 전력이 계속 도착하면서 전선은 위태롭게나마 지탱할 수 있었지만 축석령 함락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7사단의 역습
2사단이 역습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했음에도 이 같은 상황을 전혀 통보받지 못한 7사단은 26일 오전 8시 계획대로 역습을 시작했다. 특히 7사단 1연대는 아군의 역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한 4사단을 기습적으로 공격, 이날 오전 10시 동두천을 점령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적어도 동두천쪽 전선은 25일 오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두천에는 뜻밖에도 북한군 병력이 얼마 없었다. 18연대도 별다른 전투 없이 1연대를 뒤따라 전방으로 진격, 덕정 북서쪽 4㎞ 지점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이 같은 뜻밖의 행운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6일 오후 2시 국군7사단 예하 부대에 청천벽력 같은 철수명령이 하달됐다. 2사단이 방어하던 축석령 방어선이 뚫려 의정부에 북한군이 들어왔으니 1연대와 18연대는 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역습으로 동두천을 점령한 마당에 그 후방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1연대와 18연대의 퇴로가 차단된 것. 언뜻 성공한듯 보였던 역습은 성공이 아니라 파멸을 부르는 전주곡이었다.
■ 역습과 축차투입 명령에 대한 논쟁
채병덕 총참모장의 26일 오전 역습 명령이나 병력 축차 투입 문제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미 고문관으로 채 총참모장을 수행한 하우스만 대위조차도 역습 명령에는 부정적이었다. 장창국 육본 작전국장도 당시 역습 명령은 육본 작전국 차원의 조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채 총참모장의 독단이었다며, 당시 명령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반대로 당시 상황에서 채 총참모장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며 모든 책임을 총참모장에게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도 있다. 일본의 저명한 6·25 연구가인 사사키 하루다카도 채 총참모장을 옹호하는 쪽에 기울어 있다.
6·25전쟁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군사편찬연구소에서도 채 총참모장의 결정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채 총참모장의 결정에 의문은 들지만 2사단이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 3연대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아 파멸을 부른 2사단장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견해를 제기한 연구원들도 있다.
한편 이범석 전 국방부장관, 김홍일 장군 등 군 원로들은 무리한 역습보다 한강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쪽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당시 군 원로들 입장에서도 역습에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는 쪽에 무게를 둔 셈이다.
서울 함락의 서곡
6·25전쟁 개전 초기 육군의 주력 곡사포였던 미국의 M3 105mm 곡사포.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가 의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북한군 전차와 맞섰을 때 사용한 곡사포도 바로 M3였다. <사진출처 wikipedia>
의정부가 함락되기 직전인 6월26일 오전 10시 서울 국방부 청사로 역전의 노장들이 모여들었다.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이자 광복군 참모장과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 광복군 총사령관이자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이청천 장군,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현역 육군 소장이었던 김홍일 장군은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으로 국방부로 들어섰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개최한 군사경력자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들의 면면은 현역 군 지휘부를 압도하는 경력을 가진 역전의 노장들이었으나 채 총참모장은 ‘듣기’보다 ‘말하기’에 주력했다.
군사경력자 회의
회의 첫머리에서 김홍일(외교부장관 역임ㆍ중장 전역) 장군은 “결전을 기도한다면 어느 선에서 결전을 수행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지연전을 실시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어디까지 철수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중한 의견 제시였으나 그 발언의 속내는 한강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자는 이야기였다.
이범석 전 국방부장관도 한강선에서 지연전을 벌이라고 권고했으나 오히려 채 총참모장은 조만간 반격에 성공할 것이라며 장담했다. 당시 채 총참모장은 공식적인 참모 라인이나 원로들의 조언과 건의보다는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였던 이종찬(육참총장 역임ㆍ중장 전역) 수도경비사령관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이 장군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기동력이 부족한 국군이 한강선까지 후퇴해 방어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서울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했을 때 서울 포기는 군과 국민에게 패배감을 안겨 더욱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았다. 채 총참모장은 친구인 이 장군이 자신과 생각이 같은 것에 안심했는지 자신의 작전 지도에 조금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군사자문회의가 끝나고 11시에 열린 국회에서도 신성모 장관은 북진을 장담하며 국회의원들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채 총참모장은 “얼마 후 남쪽의 3개 사단(2ㆍ3ㆍ5사단을 의미)이 도착하므로 반격으로 전환해 (북한군을) 반드시 격퇴한다”며 “안심하기 바란다”고까지 말했다.
포병의 분투
채 총참모장이 군 원로와 국회의원들에게 안심하라고 장담하던 그 시간, 국군 장병들이 안간힘을 다해 지탱 중이던 의정부 전선의 상황은 시시각각 위태롭게 변해갔다.
26일 아침 충주 등지에서 북상한 2사단 16연대가 의정부에 도착했다. 16연대 병력은 포병학교 교도대대 2포대와 함께 의정부 금오리와 축석령 사이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축석령을 넘어 북한 T-34 전차가 전진해 오자 교도대대 2포대 장병들은 M3 105㎜ 곡사포로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결국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2포대장 장세풍 대위와 함께 2포대의 6번포를 끌고 나와 근거리 직접사격으로 T-34를 상대하려 했다. 별다른 방호력이 없는 포병이 근거리 직접 사격으로 적 전차를 상대한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초월할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북한 전차가 산모퉁이를 돌아 측면이 노출됐을 때 김 소령과 장 대위, 2포대 6번 포대원들은 1탄을 발사했다. 소총 영점사거리도 안 되는 근거리에서 포탄을 맞은 적 전차는 궤도가 파괴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지만 후속하는 북한 전차의 사격으로 김 소령과 장 대위은 그자리에서 모두 전사했다. 26일 9시 무렵의 일이었다.
기동 불능이 된 적 전차는 1대에 불과했으나 북한 T-34 전차들은 전진에 부담을 느꼈는지 후방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북한 전차가 다시 의정부 금오리에 출현한 것은 26일 정오 무렵이었다. 결국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그리고 6번포 포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은 단 3시간이었다.
전체 전선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단순히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군 장병들이 이처럼 곳곳에서 분투하며 목숨을 담보로 지켜낸 그 소중한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뒷날 지연전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2사단과 7사단의 철수
26일 정오 무렵 의정부 금오리의 국군7사단 9연대 막사에 자리 잡고 있던 2사단 지휘부에도 적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 앞에 노출된 2사단 지휘부는 결국 후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형근 2사단장의 지프에도 적탄이 명중되어 사단장부터 병사까지 도보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도로에 적탄이 집중되어 논두렁을 오르내리며 후퇴하는 장병들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웠다.
이 무렵 의정부 시내에 자리 잡고 있던 7사단 사령부에도 적 포탄이 떨어졌다. 7사단 사령부는 의정부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7사단 1연대 막사로 이동해 포탄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동 중에 의정부 여기저기에서 적 전차와 마주쳤다. 후방에서도 북한군이 추적해 왔다. 결국 7사단도 의정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비슷한 시간 국회 보고를 마치고 용산의 육군본부로 돌아온 채병덕 총참모장은 역습 작전의 성패부터 질문했다. 7사단의 동두천 역습과 2사단의 포천 역습 작전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던 채 총참모장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정부 함락’이었다.
백석천 방어전
26일 오후 2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선 상황을 시찰하려 했다. 하지만 이동 병력과 피란민으로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이 발생한 상태였다. 채 총참모장은 철도 궤도 위를 다닐 수 있는 특수 개조 차량을 타고서야 의정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채 총참모장은 의정부 입구에서 후퇴하던 이형근 2사단장과 마주쳤다. 명령 없이 후퇴한다고 생각한 채 총참모장은 그 자리에서 2사단장을 해임하고 유재흥 7사단장으로 하여금 통합지휘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막 전방에 도착한 2사단 25연대 병력을 26일 오후 3시 의정부 남쪽의 백석천에 배치했다. 이어 16연대 일부 병력도 재편성을 거쳐 의정부 남쪽 일대에 포진했다.
북한 T-34 전차가 백석천에 처음 나타난 것은 26일 오후 5시였다. 하지만 아군이 쏜 2.36인치 로켓으로 백석교 교량 위에서 T-34 전차 1대가 주저앉자 북한군 전차들은 다시 의정부 시내로 되돌아갔다. 북한군이 공세를 재개해 백석천과 호원동을 돌파한 것은 27일 새벽 4시였다. 이어 북한군 4사단과 105전차여단은 서울 창동(당시는 경기도 양주)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27일 새벽 4시30분, 개전 후 약 48시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 백석천 16시간의 미스터리-`부대통제 미비 등 북한군 대혼란' 추정
26일 오후 5시 백석천 교량에 진입한 적 T-34 전차를 파괴한 것은 국군 2사단 25연대 2대대 5중대 화기소대 소속의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분대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상황에서 이 무명의 분대장은 갑자기 부하로부터 2.36인치 로켓을 뺏어 들고 교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사격을 가해 로켓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다.
교량과 전차가 동시에 부서지면서 그 자체로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다른 전차의 사격으로 이 무명의 분대장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으나 백석교가 차단되면서 북한군 T-34 전차는 남하를 포기하고 의정부 시내로 되돌아갔다. 이후 백석천이 돌파된 것은 16시간이 경과한 후인 27일 새벽 4시였다.
과연 북한이 작은 하천에 불과한 백석천을 돌파하는데 16시간이나 허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교량 파괴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러가지 추정이 나오고 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최용호 박사는 “당시 북한군이 교통 체증과 부대 통제 미비로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며 북한군 내부에 모종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