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편찬연구소가 2005년 분석한 북한군 남침계획>
“북한의 남침계획에서 고속기동부대인 북한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움직임을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4월 말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는 6ㆍ25전쟁 북한군 남침계획에 대한 브리핑이 열렸다. 군사편찬연구소의 남정옥 박사는 안병한 당시 연구소 소장이 배석한 가운데 윤광웅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6·25전쟁 때의 북한군 남침계획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전쟁 개시 둘째날 603모터사이클연대는 홍천 남쪽과 서남쪽 지역에 투입돼 양평~이천~금량장리 도로를 따라 신속히 진격, 서울 방면에서 남쪽으로 퇴각하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수원 점령을 기도하는 것이 북한의 작전계획이었습니다.”
1950년 북한군 남침계획에 대한 브리핑이 무려 55년이 지난 2005년에 열린 셈이다. 새삼스럽게 6ㆍ25 남침계획에 대한 브리핑이 마련된 이유는 군사편찬연구소가 냉전 종식 후 새롭게 공개된 구 공산권 측 자료를 토대로 북한군 남침계획을 이 무렵 완전히 새롭게 분석해 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브리핑은 윤광웅 당시 장관뿐만 아니라 합참의장·작전본부장 등 당시 국방부와 합참의 주요 핵심 보직자들에게도 순차적으로 실시됐다. 지금도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북한의 6ㆍ25 남침계획은 단순히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도 분석하고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 49년 김일성-스탈린 회담
이 같은 북한군 남침계획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제공한 구소련 외교문서에는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북한의 남침 움직임이 처음으로 구체화된 것은 1949년 3월 5일 김일성-스탈린 회담부터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무력으로라도 통일하겠다며 남침 의사를 처음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스탈린은 주한미군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 선제 공격은 무리라는 입장이었다. 형식도 한국의 선제공격을 유도한 후 받아치는 방식을 권유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한 동의를 받지는 못했지만 방소 기간 중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부대용 무기 도입 등 북한군 증강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약속은 양국의 비밀 조약으로 명문화, ‘전쟁지원의 성격, 소련에서의 북한군 교육 및 경제관계의 발전과 기타 문제들에 관한 조·소협정(朝蘇協定)’이 체결됐다.
이 같은 약속에 따라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를 비롯한 무기들이 속속 도입돼 북한군의 전력이 급격하게 강화되자 김일성은 또다시 전쟁 문제를 거론한다. 1949년 8월 12일과 14일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에게 대남선제공격을 또다시 제안한 것.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38도선은 의미가 없고, 38도선 무력도발을 통해 북한군의 전력우세가 입증됐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김일성은 북한의 평화제의를 한국이 거부하고 있으므로 침공할 명분이 된다고 강변했다. 그리고는 북한군이 침공하면 한국에서 인민 봉기가 뒤따를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소련 측은 여전히 전쟁에 부정적이었다. 스티코프 대사는 1949년 3월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스탈린이 북한의 선제 남침에 반대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스티코프의 반대 의사를 확인한 김일성은 38도선 이남에 있는 삼척을 침공해 해방구역을 만들거나 옹진반도를 점령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스티코프는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남침계획은 미군의 개입을 부를 뿐이라며 다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50년 4월 소련의 동의
1950년 1월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를 만나 재차 남침을 주장하면서 스탈린과의 회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은 마침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했으므로 중국의 마오쩌둥도 북한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북한 측 요청에 소련이 동의함에 따라 1950년 4월 10일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처음으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한다. 구소련 외교문서를 보면 스탈린은 아주 구체적인 지침까지 내리며 남침계획에 개입한다.
“공격 세부계획이 반드시 요구된다. 작전은 3단계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제1단계에서 38도선 지역 내 부대를 집결시킨다. 그 다음 북한 정부는 새로운 평화통일 제의를 발표한다. 서울이 이를 거부할 것이므로 바로 그때 공격하면 된다. 옹진반도 타격 구상은 옳다. 계획에 동의한다. 누가 최초로 전투 혹은 군사행동을 시작했는지 진실을 엄폐하는 데 유용하다. 남측의 반격이 있은 후 전선을 확장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전쟁은 반드시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적이 제정신 차릴 틈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 마오쩌둥과도 남침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마오쩌둥도 남침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도시를 포위하되 이를 점령하기 위해 지체해서는 안 되며 병력은 적군을 섬멸하는 데 집중 운용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등 국공내전 때 얻은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공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 6월로 정한 이유
1950년 4월 15일 무렵 스미르노프 소장을 비롯한 소련 군사고문관이 소련으로 모두 철수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 독ㆍ소전의 영웅이자 작전 전문가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예프 중장 등 새로운 군사고문관이 북한에 들어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소련군 집단군급 이상 대단위 부대의 작전부서 장교로 근무하고 3년 과정인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대좌급 20여 명이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에 배치됐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 북한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전쟁 준비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5월 초 소련 고문단의 포스트니코프 장군은 북한군 총참모부의 유성철 작전국장을 호출했다. 포스트니코프 장군은 북한군에 전쟁에 대비한 작전계획이 있는지를 질문했다. 유성철은 북한군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작전계획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제출했지만 소련 고문단 측은 이를 일축했다. 북한군의 병종 간 협동작전 계획이 미비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군의 작전계획이 반격 계획을 기초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고문단은 직접 작전계획을 짜겠다고 제안했고, 북한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북한군 지휘부는 기껏해야 중대 단위 수준의 비정규전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유성철은 소련 측이 작전계획을 직접 마련하겠다고 제안한 후 실제 완성된 계획을 넘겨 줄 때까지 걸린 시간이 단 3~4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소련 고문단은 이렇게 완성된 러시아어로 된 전투명령을 강건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넘겨 주었다. 강건은 극비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유성철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에게 넘겨 번역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5월 29일 무렵 작전계획이 완성된다.
작전계획과 관련해 이슈가 된 것은 두 가지 문제였다. 첫째는 공격 개시일이었다. 김일성은 공격 개시일이 더 늦어질 경우 북한군의 전투 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누설될 수 있고, 또 7월에는 장마로 부대기동이 제한받기 때문에 6월에 신속하게 남침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일부 소련군 고문관들은 북한군을 전방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촉박하다며 7월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주장했지만 상당수 고문관들이 북한 측 제안에 동의하면서 전쟁은 6월로 정해졌다. 이에 따른 보다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6월 15일 무렵 최종 완성되고 16일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고됐다. 남북한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을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저주스러운 계획은 이처럼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점점 그 가공할 실체를 완성해 갔다.
선제타격계획과 반격계획
북한이 1950년 5월 말과 6월 중순에 걸쳐 완성한 남침계획의 원본은 모스크바와 평양에 1부씩 원본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단 원본의 내용을 유출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료는 많다. 특히 러시아군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코로트코프가 1992년 공개한 ‘선제타격계획’(일명 제1타격계획) 작전지도는 원본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 중 하나다. 원본을 직접 보고 손으로 옮겨 적은 것으로 알려진 선제타격계획 작전지도는 3단계에 걸친 북한군의 남침계획이 잘 드러나 있다.
6ㆍ25전쟁 중 북한 주재 소련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을 지낸 라주바예프 장군의 보고서에도 이른바 북한군 ‘반격계획’으로 명명된 작전계획 개요가 수록돼 있다. 2001년 군사편찬연구소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된 이른바 ‘반격계획’은 큰 틀에서는 ‘선제타격계획’과 유사하다. 하지만 2단계 이후의 작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는 등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약간씩 다른 작전계획이 남아 있게 됐는지, 두 계획이 정확하게 어느 단계ㆍ어느 시점에서 작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6월 15일 무렵 옹진반도 점령으로 국지전을 유발한 뒤 며칠 시차를 두고 전면 침공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가 6월 21일 무렵 전체 전선 동시 침공으로 작전계획을 급하게 수정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북한의 남침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작전계획의 작성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위기의 서부전선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침 행렬>
6월 25일 새벽 6시 개성 시내에 자리 잡고 있던 개성역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에 난리통’이었다. 새벽 4시부터 전방에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피란길에 나선 주민들, 휴가나 외출을 중지하고 복귀하는 1사단 12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로 인해 역 구내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한 열차가 개성역 구내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무런 경계감 없이 열차로 접근하는 민간인과 군인들은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갈색 군복을 보고 기겁했다. 열차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북한군 6사단 소속 병사들이었기 때문.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는 이미 차단돼 있었으나 북한군은 야간에 비밀리에 연결, 열차를 타고 개성 시내에 돌입하는 한바탕 쇼를 연출한 것이다. 이미 1사단 12연대 전방 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가운데 개성 시내에까지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나타나자 개성 일대의 상황은 대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개성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은 주로 구 중공군 출신들로 편성된 사단이었다. “북한 6사단이 열차를 타고 전선을 돌파하는 기묘한 발상을 해낸 것은 특이한 전술을 자주 구사하는 중공군 스타일 같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고지군 피탈
국군1사단 12연대 2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개성 북방의 전선은 이미 개전 초반 송악산 남쪽의 365고지와 470고지가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일찌감치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육탄 10용사’의 신화가 서려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군은 개성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핵심 요지였다.
송악산 남쪽 470고지에 배치돼 있던 국군1사단 12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은 개전 시작과 함께 집중적인 포격을 받은 데다 정면과 동쪽에서 동시 공격을 받았다. 통신은 단절되고 안개로 시야까지 제한되고 중대장마저 전사하자 6중대는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개성 북방의 고지군이 개전 초반에 북한에 점령되자 개성 시내의 움직임은 완전히 북한에 노출됐다. 12연대 2대대 소속의 다른 중대들도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로 밀어붙이는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북한군이 개성 시내에 포병 사격을 가하면서 시내 이곳저곳에서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개성 시내가 북한군에게 완전히 함락된 것은 6월 25일 오전 9시 30분쯤이었다.
황해도 연안에 배치돼 있던 국군1사단 12연대 3대대의 상황도 고약하긴 마찬가지였다. 개전과 함께 병력이 배치된 초소는 포연에 휩싸여 버렸다. 예성강 강변과 백천역 인근에 배치돼 있던 12연대 3대대 9중대의 유일한 수송차량은 새벽 5시 20분에 떨어진 포탄으로 파괴됐다.
여기저기서 마구 떨어지는 포탄으로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12연대 3대대 9중대장 조진석 중위는 그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9중대 본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백천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인민군이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으니 경찰과 국군은 모두 함께 항복하자”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평소 자주 통화하던 백천경찰서장의 목소리와 다른 것을 알게 된 조 중위는 “당신 누구냐”고 되물었다. 상대방은 “과거 경비대에 있었던 사람” 운운하며 횡설수설했다. 이미 백천경찰서를 점령한 북한군이 아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걸어온 것이었다.
포위당하기 직전의 상황임을 직감한 조 중위는 대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려 했으나 유·무선 통신은 이미 모두 단절됐다. 청단읍을 방어 중이던 3대대 10중대와 연안읍을 방어 중이던 3대대 11중대도 개전 초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일찌감치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해졌다. 연대본부와 연락이 끊긴 상황에서 3대대는 가급적 주민들의 철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지연전을 고려했으나 부대의 철수 자체가 불투명한 위기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 연대 본부의 상황
개성 남쪽 강릉동에 자리 잡고 있던 12연대 본부와 1대대의 상황도 암담했다. 1대대 병력의 대부분은 휴가와 외출 중이었기 때문이다. 개성 시내의 사택에 있던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부대로 복귀한 후 잔류 병력을 모아 하각동의 구릉에 배치했다. 급하게 편성된 병력은 남하하는 북한군 기마대를 맞아 1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격퇴시켰지만 2ㆍ3대대가 이미 붕괴된 상황에서 개성 지구의 방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부하들은 전성호 대령에게 “우선 연대장님 가족과 군인 가족들을 피신시키도록 차량을 냅시다”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다 귀국, 국군에 몸 담은 전 대령은 “개성 시민의 피란 대책도 세우지 못했는데 부족한 차량을 동원해 가족들을 피신시킬 권한은 없다”는 말로 부하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연락이 끊긴 12연대 2대대와 3대대를 걱정하며 전방 상황을 관찰하던 전성호 연대장은 개성 고남리에서 2대대 병력들과 극적으로 만났다. 마침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병력들을 수습해 후방으로 철수하다 연대 지휘부와 마주친 것.
현장에서 급하게 대책을 논의하던 12연대장과 2대대장은 역습을 결정했다. 철수하는 병력을 모아 개성 시내를 향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2대대장은 일부 수습된 병력으로 특공대를 통합 지휘해 이날 오전 10시 개성 남대문으로 돌입했다. 특공대는 때마침 남하를 준비하던 북한군 행렬에 기습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워낙 전력 차가 심한 상황에서 공격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2대대 잔여병력으로 편성된 특공대도 다시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난의 철수 작전
2대대의 역습이 실패하자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마침내 임진강을 건너 문산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후송이 불가능한 탄약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군수주임으로 하여금 연대 탄약고를 폭파시키도록 명령했다. 12연대 본부와 1대대 장병들은 연대 탄약고가 폭발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개성 시내 방향으로 역습을 시도했던 2대대는 임진강 쪽으로 갈 여유도 없었다. 임진강 철교 쪽으로 이미 북한군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대대는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수류탄으로 박격포 포신을 파괴하고 기관총을 완전 분해한 뒤 도로변에 파묻었다. 2대대 병력이 해안가인 영정포에 도착한 것은 6월 25일 오후 5시. 건너편의 김포로 도하에 성공한 것은 이날 저녁 7시의 일이었다.
3대대의 철수 상황도 혹독했다. 대대본부는 같은 날 오후 1시 석포에서 2척의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했다. 9중대도 백천 남쪽을 거쳐 석포까지 철수한 다음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했다. 11중대는 남쪽 해변에 집결해 대형 목선 1척으로 교동도로 철수했다. 그나마 탑승 공간이 충분하지 못해 일부 병력은 저녁 7시 55분에 용매도를 거쳐 인천으로 철수했다. 거의 중대 단위로 감행된 처절한 철수 행렬이었다.
■ 12연대가 고전한 이유 -1개 연대가 63km 정면 방어
사실 1사단 12연대는 애시당초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94km에 달하는 1사단의 방어정면 중 12연대가 담당한 정면이 무려 63km에 달했다. 1개 연대가 사단 방어 정면의 ‘3분의 2’를 담당한 셈이다.
개전 당시 12연대는 3대대를 예성강 서쪽의 황해도 연안군에 배치하고, 2대대로 하여금 개성 북방을 담당하게 했다. 1대대는 후방 개성 강릉동에 배치돼 있었다. 3대대의 방어 정면은 약 50km, 2대대의 방어 정면도 약 20km에 달했으니 사단으로도 방어하기 힘든 지역을 대대급 부대들이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나마 청단 서쪽 11㎞의 외곽을 벗어난 지역은 아예 병력이 전혀 배치되지 않은 경비상의 공백지대였다.주요 교통로와 주변 일대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주요 감제고지에만 병력이 점점이 배치돼 있었을 뿐이므로 지금의 삼엄한 전방 방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적이 대규모 병력으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한다면 방어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1사단도 이런 점을 감안해 12연대는 유사시 후방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작전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결국 1사단 12연대에 남은 유일한 임무는 무사히 축차적으로 철수하는 길뿐이었다. 이처럼 6ㆍ25 개전 초반 패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개별 전투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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