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전설로 남은 이야기, 장진호 전투

구름위 2013. 3. 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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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내내 열심히 싸우지 않았던 부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멋진 승리를 거둔 부대도 있지만 비참한 패배를 당한 부대도 있었고, 전선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치룬 전투부대도 있지만 후방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묵묵히 지원 임무에 투입되던 부대도 있었습니다. 비록 국적과 단대호로 구분되기는 하였지만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이처럼 모든 부대들은 땀과 눈물 그리고 귀중한 피를 받쳐가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선혈들의 노고로 대한민국은 지켜졌습니다.]



 당시에 활약한 아군 지상군 사단급 부대만 하더라도 국군이 휴전직전 창설되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부대들까지 합하여 18개 사단, 미군이 9개 사단, 영연방군이 1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그 어느 행위보다도 결과가 중요하다보니 굳이 순위를 가르려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상적인 전과를 올린 부대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6ㆍ25전쟁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쟁 기간 중 가장 격정적이었던 1950년에 세계 전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부대가 있는데, 바로 미 해병 1사단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 부대 중 본토에서 가장 먼저 달려 온 부대였는데, 낙동강방어전,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및 흥남철수처럼 1950년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굵직한 전투에 모두 등장하여 너무나 인상적인 전과를 남겼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미 해병 1사단 장병]



 적의 배후를 강타하여 서울을 탈환한 인천상륙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의 명성을 길이 빛내준 기념비적 전과였습니다. 하지만 전사에 간략하게 패배로 기록된 장진호전투가 세계 전쟁사의 전설로 남는 뛰어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패배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광으로 남을만한 전투라는 정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장진호전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내용과 결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할 수 있습니다.

 1950년 10월 26일, 동해안의 요충지인 원산에 미 해병 1사단이 상륙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전과였습니다. 기뢰에 막혀 한 달 동안 바다 위를 맴돌 때, 원산을 국군 1군단이 점령하고 지나간 이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함경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전진하기로 예정되었던 미 해병 1사단에게 후속할 미 3사단이 원산에 상륙하면 전선을 인계하고 장진호로 진격하라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의 원산상륙 모습, 하지만 무의미한 작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명령을 받은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는 갈수록 험해지는 한반도북부의 지형과 급격히 추워지는 기후상태를 고려할 때, 보급로를 안정화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스미스는 명령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배후를 단속한 후 앞으로 나가다 보니 진격이 소걸음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조속한 진격을 명령한 미 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를 화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달력의 날짜는 11월 초였지만 이미 함경도 산악지대는 폭설이 내리는 한 겨울로 급변한 상태였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험 많은 예비역들이 포함되어 편성된 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은 타 미군 보병사단에 비해 월등히 좋았고, 이 때문에 낙동강방어전과 인천상륙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동계 전투 경험은 전무 하였고 이런 고산준령의 산악지대에서의 전투도 상당히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장진호 철도를 따라 내륙으로 진격하여 들어가는 미 해병 1사단]



 이와 같이 낯선 곳을, 낯선 날씨에 진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었으므로 스미스는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따라서 군단장 알몬드가 아무리 채근하고 독촉해도 진격로 주요 거점마다 병참기지, 비행장 등의 지원 시설을 갖추어 배후의 안전을 확보한 후 앞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미스의 이러한 판단은 얼마가지 않아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1월 중순이 되었을 때 미 해병 1사단의 선도 부대는 인공호수인 장진호 인근의 하갈우리(下碣隅里)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미 10군단의 여타 부대에 비한다면 상당히 늦은 진격 속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으로 말미암아 전선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는데, 가장 크게 문제가 발생한 곳이 미 8군 우익을 담당한 국군 2군단 지역이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의 진격속도는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만일 이곳이 붕괴된다면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발생하여 전선이 단절될 우려가 컸고,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 있던 미 해병 1사단에게 장진호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방향으로 진격하여 미 8군과 연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너무 앞만 보고 공격만 하다가 벌어진 전선의 간격을 막기 위해 내린 고육책이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7연대가 유담리로, 5연대가 무평리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나, 11월 27일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교전이 아니라 매복하고 있던 10배 가까운 적들이 쳐 놓은 포위망 안에 미 해병 1사단이 들어와 있던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정찰대에 의해 확인되자마자 사방팔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쳐 놓은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이것은 미 해병 1사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에게 가해진 압박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2만의 미 해병 1사단을 포위한 것은 8만으로 추산되는 중공군 9병단이었는데, 함경도 일대에 출몰한 중공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미 해병 1사단이 제거되면 그 북쪽에 있던 나머지 미 10군단 소속 부대들은 자동적으로 고립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병대는 미 10군단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포기하기 않고 탈출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밤에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습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되어 하염없이 쓰려져 갔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후 미군의 동계전투 전술이 새롭게 연구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예하 5연대와 7연대가 적진을 뚫고 하갈우리로 철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스미스는 가장 앞서 있던 양 연대를 12월 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철수시키는데 극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날씨에 부상병을 둘러매고 이룬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하갈우리에는 4,300여 부상자를 포함한 10,000여명의 병력과 각종 장비가 집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황초령을 넘어 함흥까지 온전히 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중장비는 유기시키고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스미스는 최소한 2개 대대가 마지막까지 활주로에 잔류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단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공수하고, 미 해병 1사단은 탈출길에 올랐는데, 그들이 장진호에서 써 내려간 위대한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갈우리 임시 비행장에서 이송되는 부상병]



 다행히도 진격 당시에 곳곳에 확보하여 놓은 보급로와 물류 기지로 미 해병 1사단이 극악한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원의 하갈우리에 만든 임시 비행장은 미 해병 1사단이 살아나게 된 결정적인 생명선이었습니다.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툭하면 미 해병 1사단의 진격 속도가 지지부진하다고 불만을 표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신중함이 미 10군단 전체를 살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미 해병 1사단의 소식은 전 세계에 타전되어 자유 세계인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 반면 중국 당국은 승리를 확신하며 전황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사단장 스미스는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12월 6일, 드디어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병대원들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흥남을 향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흥남항을 향해 탈출하는 미 해병 1사단]



 유담리와 하갈우리에서 실패를 맛본 중공군은 4개 사단을 황초령 일대에 추가 투입하였습니다. 중국은 미 해병 1사단을 완전히 섬멸할 경우, 미국인들이 입게 될 심리적 충격을 잘 알고 있어서 매체를 통해 연일 전황을 선전하였고, 미국 언론들도 그 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인이 생중계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을 만큼 미 해병 1사단의 탈출극은 극적이었습니다.

 추위에 따른 비전투 손실이 많았던 만큼, 장진호전투의 환경은 미군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군이 적보다 더 무서워한 혹한은 중공군에게도 지옥의 사신이었습니다.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을 원시적인 수단에만 의존하였던 중공군은 혹한의 산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고립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고는 하였습니다. 이것은 압도적 병력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도 미 해병 1사단을 격멸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장진호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공군]



 결론적으로 미 해병대의 의지는 중공군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사투를 거듭하며 황초령을 넘어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맞섰던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전사자만도 25,000으로 추산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궤멸된 수준이라 할 수 있는데 때문에 9병단은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이후 4개월 동안 부대정비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항공철수를 거부한 해병대의 분투는 막대한 장비와 보급품의 유기를 막는 효과도 가져왔습니다. 물론 물자보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적들이 유기된 장비를 이용한다면 결국 더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장진호전투가 가진 의의의 미미한 일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미 해병 1사단의 분투는 진격하여 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 포함 여타부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주었습니다.

[역사적인 흥남철수도 장진호전투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으로 평가받는 10만의 피난민이 동반 철수에 성공한 흥남철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만일 중공군 9병단이 후방으로 완전히 빠져 재편을 필요로 할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고, 1.4후퇴를 불러온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즉시 참가하였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유가 장진호전투를 패배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온라인 사전 등에서는 후퇴한 것이니 전략적으로는 패배, 하지만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혔으니 전술적으로는 승리라고도 표현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런 의견도 후퇴를 무조건 패배로 보는 고루한 사고 때문에 나온 해석입니다.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으므로 전술적 승리라는 정의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미 10군단을 포함한 사상 최대의 인도적 작전과 중공군 9병단의 전선이탈은 분명한 전략적 승리입니다. 

[전설의 당사자였던 Chosin Few]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진호전투가 어떤 면으로도 결코 패배로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Chosin Few로 통칭되는 참전용사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기 싫을 만큼 지옥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잊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이기 때문에 장진호전투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6ㆍ25전쟁 중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이처럼 장진호전투는 전설로 손꼽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