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태극기가 보인다, 351고지 지원 작전

구름위 2013. 3. 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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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막을 내린 중공군의 6차 공세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휴전 시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전으로 급격히 변모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남북을 급격하게 오가며 있어왔던 기동전이나 대공세는 어느덧 사라졌고 좁고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과도하다고 표현할 만큼 많은 병력과 화력이 집결되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혈전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전쟁이 1년이 지나자 휴전을 염두에 둔 고지전으로 변하였습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공산군은 야간에 병력으로 밀어붙였고, 아군은 주간에 강력한 화력으로 맞상대하였지만, 살이 맞닿을 정도로 좁은 고지에서의 화력 지원은 아군의 피해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고지전은 병력이 우세한 공산군 측이 유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군이 화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종종 위험한 도박을 하여야 했습니다.

 예들 들어 1951년 5월에 홍천 북방 778고지에서 벌어진 벙커(Bunker)고지 전투에서 고지를 선점하던 미 2사단 38연대가 10배 가까이 많은 중공군 12군에게 포위당하여 점령될 위기에 놓이자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진지에 몸을 숨기고 진내 포격을 실시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사실 상당히 위험한 전술이었습니다. 정밀유도무기가 없던 당시에 이러한 위험을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하늘에서의 폭격이었습니다.

[고지의 목표지점을 공습하는 모습]



 적어도 제대로 통제만 된다면 포격보다는 좁은 고지를 놓고 혈전을 벌이는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공습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휴전을 앞둔 1953년 3월에 동부전선 351고지 전투에서 대한민국 공군이 보여준 항공 지원 작전은 이러한 예에 걸 맞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 훌륭했던 전과는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로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952년이 되었을 때, 어느덧 대한민국 조종사들은 단독으로 출격하여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기량이 향상되었지만 보유한 하드웨어는 그리 충실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인수한 주력기는 지금까지도 최강의 프로펠러 전투기라는 명성을 가진 F-51이었지만 한반도 하늘의 주역은 어느덧 제트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공군의 F-51은 공대공 전투가 아닌 대지 공격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한국공군의 위상을 만천하에 떨친 승호리 철교 폭격 작전]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351고지를 적이 확보한다면 우리 측 방어지역의 전부를 감제할 수 있게 되어 아군의 방어가 위태롭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어를 위해, 북한은 공격을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점으로, 연일 피 비린내 나는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공산군이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피아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아군의 이점인 화력지원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연일 이어진 공산군의 공세에 고지가 피탈될 위기에 놓이자 공군이 전면에 나섰습니다. 강릉기지에 위치한 제10전투비행단은 위기에 몰린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가동이 가능한 25대의 F-51전투기를 쉴 새 없이 교대로 투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순히 고지에 대한 공습이라면 크게 어려울 일이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작전의 주안점은 피아를 정확히 구별하여 정확히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 본 351고지]



 그러기 위해 최대한 저공비행을 하여야 했고 더불어 공격유도에 나선 전선통제기의 역할도 막중하였습니다. 작전수립부터 실행까지 한국 공군 단독으로 진행된 351고지 지원 작전을 위해 미군에서 파견 나온 T-6 전선통제기에도 한국 조종사들이 탑승하여 공격 목표를 정확히 지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유도 받았지만 F-51 전투기 조종사들도 피아식별이 육안으로 가능한 위치까지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적을 공격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군 지상군은 오폭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던 반면 정확하게 타격을 당한 공산군은 커다란 손실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투 과정은 5월말까지 계속 반복되었는데 기체에 그려진 태극기가 뚜렷이 보일 정도로 낮게 내려와 지원하는 공군의 활약은 고립된 351고지에서 악전고투하며 방어전에 임하던 지상군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고 반면 공산군에게는 악몽이었습니다.

[은빛 날개에 새겨진 태극기는 승리의 표상이었습니다.]



 비록 아쉽게도 휴전 직전 단행 된 공산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고지가 피탈되면서 치열했던 전투가 막을 내렸지만 수개월간 지속된 351고지 지원 작전은 대한민국 공군의 모범적인 지상군 지원 사례가 되었고, 특히 산악지형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에서 앞으로도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아야할 지침이 되었습니다. 피격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상군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선배 조종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