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계속된 6ㆍ25전쟁의 초반기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입니다. 유엔의 권한을 위임받아 침략군을 저지하려 애썼던 그의 노고 덕분에 대한민국은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던 인천상륙작전은 그의 지략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집념, 고집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작전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인천상륙작전 60주년 행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을 정도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인천상륙작전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 합참은 물론 맥아더의 직계와 다름없는 극동군 참모진조차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른 제한된 상륙시간,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너무 먼 거리, 상륙장비 및 병력의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는 충분히 타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계급이나 경력으로 맥아더의 생각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미국에는 없었습니다.
명령 계통상 미 군부의 최고 수장인 브래들리(Omar Bradley) 합참의장도 맥아더의 까마득한 후배였고, 전쟁 지휘에 바빠 본토에 갈 수 없다하자 투르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전황보고를 받으러 웨이크(Wake) 섬까지 오도록 만들었을 만큼 맥아더는 거물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던 인물이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념을 보였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반대한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본토에 갈 수 없다는 맥아더를 만나러 웨이크 섬에 도착한 투르먼.
1차대전 당시 맥아더가 장군이었을 때 투르먼은 예하 포대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설에는 맥아더가 대통령에게도 권위적으로 대했다고 전합니다.
맥아더는 전쟁발발 직후인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 때부터 상륙작전을 생각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북한군을 전면에서 막고 즉시 반격으로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하여 북한군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명령을 받은 미 극동사령부는 구체적 작전수립에 들어갔는데, 인천도 여러 후보지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으려 최후의 공세를 감행하던 8월 29일에 있었던 김일성의 연설문에서 보듯이 북한군도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인천도 그들이 예상하였던 여러 지점 중 하나였습니다. 서울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인천을 피?아 모두 작전 예정지로 생각은 하였지만, 막상 맥아더를 제외한 아군 대부분이 반대한 이유처럼 북한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특별히 방어망을 강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청색해안으로 1955년 촬영된 썰물에 드러난 갯벌.
갯벌에 돈좌되는 것을 피하려면 밀물 때만 상륙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은 인천상륙작전의 반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맥아더는 최종 제시된 인천, 군산, 주문진 중 인천이 가장 효과적인 상륙지점이라 판단하여 최종 낙점하였고, 결국 뚝심대로 밀어붙여 작전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러 극동군사령부를 방문한 콜린스(Joseph L. Collins) 미 육군 참모총장이 맥아더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오히려 설득되었던 것은 맥아더의 신념이 어느 정도로 강렬하였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결국 맥아더의 생각대로 거대한 계획은 9월을 목표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맥아더는 분신이나 다름없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기반으로 하여 재창설한 미 10군단을 인천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신임 군단장에 극동군사령부 참모장인 알몬드(Edward Almond)를 임명하였을 정도였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 후 즉시 원대 복귀하겠다는 맥아더의 자신감이기도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일본 항구에서 배에 오르는 미 해병 1사단대원들
모두가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반대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서해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수로가 너무 협소하며,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하여 극히 한정된 시간에만 상륙을 감행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상륙은 최대한 많은 부대를 최소한의 시간에 투입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인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인천은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전을 감행하기에는 엄청난 무리수였습니다.
[인천으로 향하는 수로는 극히 협소하여 함대가 종대대형으로 접근해야 했는데, 이것은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북한군이 방심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혹자는 당시에 동원된 유엔군의 전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엄연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일 북한이 인천의 자연적인 제약사항만 믿고 방심하지 않았다면 상륙작전은 실패하였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보름 뒤에 시도된 원산상륙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는 북진을 재촉하려고 인천상륙에 성공한 미 10군단을 동해안의 원산으로 다시 상륙시키는 작전을 펼쳤는데, 결론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인천에 비해 원산은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여건이 좋았는데도 미 10군단은 보름가까이 원산 앞 바다위에서 맴 돌았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군이 살포한 기뢰 때문이었는데, 결국 육상으로 진격한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접수한 이후에야 겨우 상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 제거도중 폭발하는 함정. 여건이 좋았던 원산상륙에 실패하였을 만큼 북한군도 방어능력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원산처럼 인천 앞바다에 충분한 기뢰를 부설하였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설령 많은 희생을 겪고 상륙을 하였어도 서울 탈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뢰에 막혀 아군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낙동강에서 격전을 펼치던 북한군 주력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서울 방어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였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군은 상당히 고전하였을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하여 지금의 지하철로 불과 한 시간 거리인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북한군의 저항이 그만큼 치열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북한군의 인천방어가 좀 더 견고하였다면 아군이 서울을 탈환하는데 더 많은 피와 시간을 받쳐야 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고 맥아더의 확고부동한 집념은 결국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13일 걸렸을 만큼 북한군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낙동강가의 혈전이 고비로 치닫고 있던 1950년 9월 14일 밤, 마지막 배가 경기만에 진입함으로써 총 261척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 7기동함대는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2시, 상륙명령이 하달되자 칠흑 같은 야음을 뚫고 19척의 공격함대가 여타 상륙작전에서 보기 힘든 종대대형으로 좁은 수로를 따라 인천항을 향해 전진하면서 역사적인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대적인 사전 포격과 폭격으로 적의 저항의지를 꺾은 후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탑승한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적재한 전차상륙함이 녹색해안(Green Beach)로 명명된 월미도 해변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여 06시 30분, 상륙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후 물때에 맞춰 주력부대가 상륙하기 전까지 400여명의 3대대원들은 고립 된 체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월미도와 인천을 연결하는 방파제를 차단하고 있는 미 해병대. 이들은 오후 본진의 상륙전까지 이곳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이 시점이 인천상륙작전 기간 중 가장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습니다. 아군의 상륙이전에는 포격이나 폭격으로 적들을 견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적과 아군이 가까이서 엉켜 붙으면 이런 화력 지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아군 선도부대가 월미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적군이 증원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다음 상륙부대는 12시간 후에나 투입 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는 인천항 초입의 월미도를 완벽하게 장악했지만 썰물로 인하여 적 지역에 고립된 형국이어서 만일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방파제를 건너 월미도로 진격하여 온다면 얼마나 교두보를 사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지휘함 마운트매킨리(USS Mount McKinley)호에서 직접 작전을 참관하던 맥아더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초조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운트맥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맥아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북한군이 접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근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계속 맹폭을 가하였고, 드디어 오후 물때가 되자 미 해병 5연대 본대가 인천항 북쪽의 적색해안(Red Beach)으로, 미 해병 1연대가 인천반도 남측의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유엔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북한군들이 간헐적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16일 새벽이 되자 적 치하에서 신음하던 인천은 완전히 탈환되었고, 한반도 중부의 가장 큰 항구인 인천항을 온전하게 확보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서 보기 드문, 직접 항구로 상륙하여 장악한 작전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 시설인 항구 일대는 항상 경비가 엄중하므로 이곳을 피해 작전을 펼치는 것도 초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상륙 당일 온전하게 확보한 인천항은 거대한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항구로 직접 상륙하는 발상을 전환으로, 초전에 인천항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만일 인천항을 즉시 확보하지 못했다면 서울로 향한 진격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후속하는 부대와 물자가 상륙한 후에야 내륙으로 진격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서는 해안가에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은 작전 개시와 동시에 최고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지체없이 전진을 시작한 아군 선도부대가 인천상륙작전 3일 만에 한강 남단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아군의 진출이 빨랐다고 그 과정이 결코 손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석리, 원통재, 오류리, 영등포 일대에서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과의 격렬한 교전이 있었고 부평, 송내촌, 김포공항 등지에서는 매복한 적의 기습에 의해 진격이 지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전진이 지체되지 않았던 것은 후방의 지원이 신속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상륙 후 배후의 안전과 교주보가 확실하게 장악되자, 지체하지 않고 격렬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항을 조기에 확보한 덕분에 앞으로 나가던 선도 부대들은 배후에 대한 걱정을 덜고,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적시에 보급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은 낙동강전선의 아군으로부터 3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지에서 홀로 싸우는 형세였기 때문에 인천항이라는 물류거점의 확보가 없었다면 전투를 오래 지속 못하고 고사할 가능성도 컸고, 이런 우려는 많은 이들이 인천으로 상륙을 반대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적들이 사전에 아군의 작전을 알았더라도 당시 북한군의 능력으로 상륙을 막지는 못하였겠지만, 아군을 곤혹스럽게 만들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염려와는 달리, 초전에 북한군의 전의를 상실하도록 만들만큼 완벽한 기습을 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의 판단이 전쟁 내내 맞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그의 고집스러운 집념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 경우였습니다.]
이런 거대작전이 실현된 결정적인 이유에는 노장군의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미군 체계상 맥아더를 권위로 압도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면 어쩌면 모두가 반대하는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서울 탈환은 2~3달 지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원산상륙이나 크리스마스공세의 실패에서 보듯이 그의 생각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힘이 있던 자의 옹고집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 긍정적인 예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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