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은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도심에서 지체하는 군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습니다. 하염없이 무너지던 국군을 추격하러 한강을 건너지 않고, 3일간 공격을 멈춘 것은 6ㆍ25전쟁 중에 있었던 상당히 미스터리한 사건이었습니다. 붉은 새 세상을 열겠다며 인민재판을 열어 천인공노할 피의 학살을 자행하던 그들이 특별히 없던 자비심이 갑자기 생겨나서 그랬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인공치하 기간 중 자행된 인민재판]
이 사건이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은 이유는 그러한 행위를 벌였던 당사자의 설명이 없어서입니다. 한때는 아군이 한강다리를 폭파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하였지만, 이것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이유는 개전 초에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진격한 북한군 6사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적들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었고, 3개로 구성된 한강철교 중 단지 하나만 폭파에 성공하여 북한군 탱크가 도하할 통로가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북한군이 진격을 멈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암약하던 남로당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한군의 역량에 문제가 있어 재편과 보급을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는 의견, 남한 정부의 투항을 유도하기위해 시간을 주었다는 의견 등이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북한 자체의 말 못할 내부 문제로 인하여 한강을 곧바로 넘어 계속하여 진격하기 곤란하였다는 의견들입니다.
[북한은 개전 초에 서울을 점령하였지만 3일간 공격을 멈추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습니다]
더불어 1990년대 이후 중요하게 떠오른 가설이 있는데, 그것은 동부전선에서 선전을 펼친 국군의 분전 때문이란 의견입니다. 춘천-홍천일대에서 펼친 국군 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전으로 말미암아 북한군의 초기 남침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이로 인하여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답은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의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북한군이 지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의견 중 마지막 부분만이 우리에 의한 외생적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춘천지구에서 6사단이 이룬 성과는 가히 전쟁의 초기향방을 결정한 의의가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북한은 주공인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조공역할을 맡은 북한군 2군단이 춘천-홍천-수원으로 신속히 우회 남하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한 후 일거에 포위 섬멸하여 전쟁을 조속히 종결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국군 주력을 일거에 제거하려던 북한의 초기 전쟁전략]
전쟁 직전 약 98,000명이었던 국군은 7월 초 한강을 건너 남단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을 때 중장비의 대부분은 한강 이북에 남겨 놓았고, 남은 병력도 불과 3만 명 선에 불과하였던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이때 북한군 2군단이 국군 6사단을 격파하고 예정대로 홍천을 거쳐 수원까지 진격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면 국군의 잔여병력은 일거에 소멸되어 버리고 전쟁은 거기에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6사단은 놀라운 분전을 펼쳐 춘천지구로 출몰한 적을 나흘간 막아내는 기적을 연출하였고, 이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서부전선의 북한군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만일 북한의 처음대로 작전이 성공하였다면 대한민국은 그때 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춘천지구에서 6사단이 이룬 대승의 의의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춘천지구전투 전적비]
1950년 38선을 경계로 하여 춘천 북방에는 북한군 2, 5, 12사단, 603모터찌크 연대로 구성된 총 3만5천의 2군단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를 상대 할 아군은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7연대, 5월 1일 원주로 이동하여 사단 예비가 되었던 19연대, 6월 20일 인제로 이동을 막 완료한 2연대로 구성된 약 9천의 6사단이었는데, 그 전력 격차는 병력으로 4배, 화력까지 고려한다면 6배 이상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동부전선에서 고속기동부대 역할을 담당한 북한군 모터찌크 부대]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6사단은 사전 경계와 훈련을 철저히 하였는데, 특히 춘천지구전투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16포병대대는 훈련이 너무 가혹하다고 대대 장병들이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주야간 훈련을 반복하여 대대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즉, 눈감고도 적의 예상 집결지에 포탄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전투준비태세가 완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6월 25일 04시, 남침 개시명령에 발맞추어 동부전선의 북한군 2군단은 화천에 군단예비인 5사단을 대기시킨 후,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2사단으로 하여금 춘천을, 603모터찌크 연대의 지원을 받는 12사단이 인제를 거쳐 홍천을 점령하기 위해 38선을 일제히 돌파하였습니다. 이전의 국지적인 충돌과 다른 전면전이 틀림없었고 38선의 이러한 긴박한 소식은 초계병들에 포착되어 즉각 사단 본부로 전해졌습니다.
[1949년 춘천을 담당하던 6사단 7연대의 검열 모습]
7연대가 춘천으로 출몰한 북한군 2사단을 맞상대하였습니다. 김종오 사단장은 즉각 원주에 사단 예비로 있던 19연대에게 출동을 지시하였고, 명령을 하달 받은 19연대는 보유하거나 긴급 징발한 차량이 부족하자 우선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춘천으로 보냄과 동시에 본대는 중앙선과 경춘선을 거치는 장거리 열차편을 수배하여 즉각 이동 전개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개전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보기 드문 침착하고 신속한 대응이었습니다.
6사단 예하 연대 중 가장 오래전부터 현진지에 투입되어 지형을 숙지하고 군관민 유대를 공고히 하였던 7연대는 방자에게 유리한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방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1대대는 전략거점인 모진교의 폭파에는 실패하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사전에 구축된 다음 방어진지로 철수하여 북한군을 저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만들어 놓았던 진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7연대 장병들은 증원군 도착 전까지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최초의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심일 소령]
동북쪽에 전개한 2대대는 30명의 특공대로 소양강을 역 도하시켜 이곳에서 도하준비에 여념이 없던 적을 기습하는 기상천외한 전과를 올려 침력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동시에 옥산포에서는 심일 소위가 이끄는 결사대 5명이 SU-76 자주포를 공격하여 2대를 파괴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국군이 얻은 최초의 적 기갑부대에 대한 육탄공격이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심일 소위는 최초로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7연대의 분전으로 남침 당일 춘천을 점령하겠다는 적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북한군 2사단은 다음날 예하 6연대를 북한강 하천부지로 투입시켜 남쪽으로 돌파를 시도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이곳을 적의 주 침공로로 예상하고 사격훈련을 반복하였던 16포병대대의 불벼락이 적들의 머리위로 떨어졌고, 그 결과 적 6연대는 해체될 수준인 70퍼센트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엄청난 대승이었습니다.
[춘천지구전투의 수호신이었던 M-3 곡사포]
춘천을 선방하고 있던 7연대에 비해 2연대는 워낙 불리한 여건이어서 처음부터 고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개전초기에 관대리, 현리 일대를 경계하던 1대대와 2대내는 부대 재편이 요구될 정도의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양강 마노진 나루터 등에서 적을 저지했습니다. 하지만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고립되어 싸우던 이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의 춘천지구의 피아 배치 및 북한군 진격로]
증강된 적 12사단이 양구-신남-홍천으로 내려오자 2연대는 20여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편성하여 아랫다무리고개에서 적 자주포 2문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려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철정리까지 철수하는 동안 무려 8배나 강한 전력을 보유한 적과 맞선 2연대는 절반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2연대는 모든 것을 바쳐 맨주먹으로 적을 저지하여 나갔습니다.
바로 이때 춘천을 공격하던 북한군 2사단이 7연대의 선방에 가로막혀 예상외의 출혈을 입자, 북한군 2군단은 25일 21시 경 자은리까지 남진한 12사단의 2개 연대와 자주포 10대를 양구로 회군시켜 춘천공략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2연대에 대한 압박이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북한군의 결정은 춘천지구전투에서 아군이 대승을 이끄는 마지막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춘천지구전투 당시 적의 선봉이었던 소련제 SU-76자주포]
적 12사단이 주춤한 틈을 타서 철정리까지 후퇴한 2연대는 6월 27일 말고개 일대에 거점방어 진지를 편성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춘천방어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16포병대대의 일부 포대와 원주에서 황급하게 올라 온 19연대 일부 대대가 위기에 처한 2연대를 도우러 속속 증원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군 관계로 잠시 진격을 멈춘 적 12사단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동안 중과부적의 상태에도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너무 지쳐있던 2연대를 대신하여 후방에서 전개한 19연대에서 차출된 11명의 용사가 말고개를 넘어서 전진하는 북한군 SU-76 자주포 10문을 파괴 및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고 동시에 후방에 전개하고 있던 16포병대대의 M-3곡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 말고개 일대에 고립된 북한군 12사단과 603모터찌크연대 잔류부대를 괴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말고개전투 기록화]
이러한 2연대의 분전과 19연대의 구원 그리고 적시에 지원을 한 16포병대대의 분투를 바탕으로 국군 6사단은 최후 보루이자 요충지인 홍천을 끝까지 지켜 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아군이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춘천과 홍천 일대에서 연이어 벌어진 이러한 대승은 동부전선을 공략하던 북한군 2군단의 전력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고 더 나가 북한의 남침 전략 전체를 뒤흔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군이 낙동강까지 밀려갔을 때 편제를 그나마 유지하여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던 부대는 수도, 1, 6, 8사단이었는데 춘천지구전투의 대승으로 수도사단과 1사단이 경부축선을 따라서 효과적으로 후퇴 할 수 있었고, 동해 축선이 막힌 8사단이 청성의 엄호 하에 태백산맥을 넘어와 동부전선을 담당 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춘천지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춘천지구전투는 용기와 기백으로 얻은 대첩입니다]
이처럼 6사단의 춘천지구전투는 국군이 초반의 패전하면서 서울을 3일 만에 적에게 내주는 굴욕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보존된 전력을 구원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춘천지구에서의 신화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단장이하 모든 장병들이 사전에 충분한 훈련을 거쳐서 습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불굴의 용기와 기백으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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