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조국을 수호한 피의 방어전, 낙동강지구전투

구름위 2013. 3. 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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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1950년 6월 29일 수원에 도착하여 처음 전선을 시찰하였을 때만 해도 침략자를 손쉽게 제압하여 전쟁을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부대를 선두로 해서 후속하여 한반도에 건너온 미군 부대들이 처참하게 격파되어 나갔을 정도로 북한군의 공세는 예상보다 거셌습니다. 특히 7월 20일, 대전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미 24사단이 풍비박산나자 자신감은 불안감으로 급속히 바뀌어 갔습니다.

[대전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 24사단 하지만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허겁지겁 사령부만 이끌고 한반도로 넘어온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병력이 부족한 현 상태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는 구조적으로 힘들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국군은 상당수가 붕괴된 형국이었고, 미군도 증파되고는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여 전선의 상당부분이 무주공산으로 넓게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적의 우회 돌파를 수시로 허용하여 포위당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당시 전쟁의 핵심은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은 대한민국이 외부와 연결할 수 있던 유일 생명선이어서 반드시 이곳을 확보하여야 했고, 반대로 적들에게 점령당한다면 적화통일이라는 비극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장 지금의 부족한 전력으로 북한군이 부산 점령을 저지하여야 했는데, 그러기위해서 워커는 적이 우회 돌파할 수 없도록 방어선을 촘촘히 연결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부산 사수가 전쟁의 최대 핵심이었습니다. 전쟁 중 부산항을 통해 공급되는 군수물자]


 그의 눈에는 한반도 동남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낙동강이 들어왔습니다. 폭이 넓은 낙동강 하류를 서쪽 방어선으로 정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면, 현재의 전력으로도 전선을 연결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우선 별다른 지리적 방어물이 없던 호남지역을 그대로 적에게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땅 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력, 자원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적에게 내어주는 대신 얻고자 했던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의 전력이 강화될 것은 명약관화하였으므로 그러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군사전략상 상당 부분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군사전략상 이런 선택은 어쩔 수 없었지만 문제는 낙동강 방어선이 부산으로부터 불과 100여 킬로미터 내외였고, 가까운 곳은 50여 킬로미터도 되지 않았을 만큼 상당히 종심이 짧은 방어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선의 일각이라도 돌파된다면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즉, 끝까지 싸워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이처럼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쉽게 선택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더구나 바다를 건너와 허겁지겁 투입된 수많은 미군들은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절박함이 없었습니다. 국군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려면 미군의 역할, 아니 그보다 동기부여가 중요하였습니다. 워커 미 8군사령관이 훗날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신문기사로 잘 알려진 의지를 예하 장병에게 설파하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워커 미 8군사령관]


 그리고 8월 1일부로 모든 예하부대들에게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로써 지난 7월 한 달 동안 중과부적의 상태로 많은 피해를 동반하며 지속하여 왔던 지연전이 종식되었고, 전쟁 개시이후 처음으로 좌우가 촘촘하게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후퇴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뜨거운 여름과 함께 낙동강지구에서는 조국을 수호한 피의 방어전이 벌어지려 하였습니다.

8월 1일을 기해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자마자 북한군은 지체 없이 추격하여 왔습니다. 방어선이 촘촘히 구축되면서 지금까지 재미를 보았던 우회 침투 전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북한군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파상적인 정면공세를 시도하였습니다. 북한의 전략은 방어선의 곳곳을 찔러본 후 일각이라도 돌파되면 예비대를 신속하게 투입하여 부산을 점령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전 전선에서 파상적인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의도는 방어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습니다. 북한이 전력을 분산하지 않고 한 곳으로만 집중하여 진격하였다면 방어선이 뚫릴 가능성이 오히려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군은 6ㆍ25전쟁 초기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아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낙동강까지 내려오면서 그 전력은 서서히 소모되어 기진맥진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보급로의 신장과 제공권의 박탈로 인해 북한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감소되었고, 광정면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력 분산은 사실상 무리수였습니다.

 북한군이 8월 5일을 전후하여 공세를 개시하면서 2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은 동시에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군은 곳곳을 파고 들어왔고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반복하여 격퇴해 나갔습니다. 낙동강은 서서히 피로 물들어 갔습니다. 가장 먼저 위기가 닥친 곳은 서남부의 마산으로 방어선 중 부산과 가장 가까웠던 곳이었는데 '킨 특수 임무부대(Kean TF)'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적의 위협을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 마산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어선 동북쪽 중앙부에서도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 소로를 기습 통과한 북한군 12사단이 기계까지 남하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국군 25연대가 서둘러 달려갔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아군은 의성을 포기하면서 전선을 안쪽으로 좀 더 축소하는 대신 적을 아군 포위망 안으로 끌어드려 일거에 역 포위하는 대담한 작전을 구사하였고 그 결과 북한군을 격멸하는데 성공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기계가 위협에 빠졌을 때, 동해축선을 따라 남진한 북한군 5사단이 UN해ㆍ공군의 전진기지 노릇을 하던 포항을 맹렬히 공격하였습니다. 그 결과 8월 11일 포항 시내가 피탈되었고 우회한 북한군 일부가 홍해까지 진출함으로써 이곳을 방어하던 국군 3사단이 위기에 놓였습니다. 다행히도 제해권을 발판으로 해상철수에 성공하였고 이와 동시에 급편 중이던 민부대(閔部隊)가 형산강 남쪽을 장악하면서 8월 18일 포항을 탈환하였습니다.

[학도병까지 나서서 포항을 사수하였습니다.]


 동시 돌파에 실패한 북한은 전술을 바꾸어 왜관 일대로 전력을 집중하였습니다. 이곳을 담당한 국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8월 11일, 다부동으로 후퇴하면서 방어선을 축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북한군이 발사한 박격포탄이 대구시내에 떨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여서 1사단은 미 27연대를 배속 받아 최초의 한ㆍ미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군도 전차부대를 증강하여 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 다부동은 동양의 베르됭(Verdun)전투라고 불릴 만큼 낙동강지구전투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미 8군도 이곳에 집중된 북한군 주력을 격멸하고자 2개 연대를 추가 투입했을 만큼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결국 지원에 힘입어 아군은 적의 격퇴하고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그것은 매일 평균 600~700여명의 피를 바쳐가며 얻은 눈물의 전과이기도 했습니다.

[다부동전투에서 파과된 북한군 전차]


 이처럼 낙동강지구 곳곳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연일 벌어졌습니다. 낙동강은 피로 물들어갔고, 그 결과 대반격을 위한 천금 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더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이 투입되어야 했고, 반드시 사수하여 적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계속하여 필요하였습니다.

북한군의 8월 공세는 3만 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실패로 끝났지만, 아직까지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8월말까지 낙동강지구에 증원시켜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부산을 점령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후방을 텅텅 비워둔 체 모든 것을 낙동강에 올인하였습니다.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1950년 8월의 부산항 모습)


 이런 상황은 맥아더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북한군의 전력을 최대한 낙동강방어선으로 유인시켜 놓고, 뒤통수를 강타할 회심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미 8군이 지속적으로 낙동강방어선을 공고하게 지켜주어야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맥아더의 의중을 잘 알고 있던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전선을 쉼 없이 뛰어다니며 일선부대를 독려하였습니다.

 사실 8월 한달 내내 계속된 북한군의 거센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국군과 유엔군도 1만 여명이 희생되었을 만큼 많은 피를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한때 마산지역에 출몰한 적들이 부산으로부터 불과 40여 킬로미터 지점까지 근접하였을 만큼, 1950년 8월의 낙동강지구전투는 어려운 순간의 연속이었으나, 불굴의 용기와 신념으로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가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군은 불굴의 신념으로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였습니다.]
(왜관지역에서 파괴된 북한군 전차)


 8월 공세가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예상을 뒤엎는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꾸준한 유엔군의 증원으로 전력면에서 아군이 점차 우세해졌으나, 전장의 주도권은 아직까지 북한군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월 공세는 초전부터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8월 31일 낙동강지구 서남부인 마산-창녕일대에서 대규모의 북한군이 출몰하더니 순식간에 미 25사단, 미 2사단을 몰아붙여 거대한 돌파구를 만들기 일보직전까지 갔습니다.

 위기에 빠진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미 8군의 예비대가 서남부로 달려가자 북한군 2군단이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 지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적들은 아군의 시선을 서남부로 돌리게 하고 주력을 동북부로 투입한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8월에 있었던 격전으로 전사자의 시신을 아직 치우지도 못한 다부동, 영천은 또 다시 피바다로 변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세가 가해진 영천전투의 모습]


 적의 공세를 막아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아군은 예상보다 강력한 새로운 공세에 당황하였습니다. 특히 국군 1사단을 대신해 다부동을 인계받은 미 1기병사단이 불과 3일 만에 돌파당하면서 다부동이 피탈되자, 미 8군도 철군을 전제로 설정되어 있던 '데이비드슨 선'으로 후퇴를 진지하게 검토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다가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전선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쉴 틈 없이 연이은 공세에 나선 북한군도 전력이 바닥나기 일보직전의 기진맥진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초가을까지 계속된 낙동강지구는 누구의 인내심이 더 큰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9월 12일, 하염없이 밀리던 미 1기병사단이 대구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거의 동시에 영천지구로 돌입한 적을 국군 2군단이 격파하면서 적의 공세는 기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낙동강지구전투 60주년 행사 당시의 재연모습]


 바로 앞의 부산 점령의 유혹에 사로잡힌 북한군은 경인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예비대까지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최후의 공세를 감행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불퇴의 각오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며 피를 흘린 국군과 적절한 시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유엔군 덕분에 낙동강지구의 혈전은 영천 전투를 끝으로 우리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렇게 대한민국은 피와 눈물로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냄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