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차례대로 38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인접부대와의 연결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누가 일등으로 한만국경에 도달하는가 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무제한의 진격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미 해병 1사단처럼 신중하게 진격한 부대도 있기는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종결짓고 싶은 욕심이 앞섰던 맥아더를 비롯한 최고 지휘부는 이러한 경쟁적인 진격을 오히려 독려하였습니다.
<북진이 개시되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선두를 달린 부대가 전선 중앙부를 가르며 압록강으로 향하던 국군 6사단이었습니다. 지난 춘천전투, 동락리전투, 낙동강방어전 등에서 북한군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던 철벽으로 명성을 떨쳤던 6사단은 제일 먼저 국경에 도착하는 영예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진격을 계속하였습니다. 함경도 방향으로 진군한 미 10군단이 10월 25일에서야 원산에 상륙하기 시작하였을 때, 6사단은 이미 압록강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만큼 진격이 빨랐습니다.
이미 북한의 기후는 겨울로 향하여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데, 6사단 장병들은 하복차림으로 추위를 참아가며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낙동강을 박차고 나온 이후 계속된 승리와 진격의 즐거움은 추위와 배고픔도 잠시 잊게 만들었고 통일의 증거인 국경 도착을 가장 먼저 이룬 부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분일초가 아까웠던 그들은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을 기다릴 틈도 없이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였습니다.
<국군이 압록강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은 온 국민을 들뜨게 하였습니다.>
6사단의 선도 부대인 7연대는 희천(熙川)을 점령한 후 1950년 10월 26일 북한군의 간헐적인 저항을 2시간에 걸친 공방 끝에 격멸하고 국경도시인 초산(楚山)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2시간을 더 북으로 내달린 끝에 14시 15분, 선발 1대대가 꿈에 그리던 압록강에 손을 담글 수 있습니다. 낙동강방어선의 신령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0일 만에 하루에 15킬로미터 이상을 달려가며 달성한 위업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달려온 병사는 감격에 겨워 조심스럽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고 이 장면은 이후 두고두고 국군역사의 자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6사단의 국경 도착은 즉각 후방에 알려졌고 국민들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고 환호하였습니다. 6ㆍ25전쟁 당시 6사단 7연대 외에 한만국경에 도달한 부대로는 미 7사단 17연대가 있는데, 이들이 압록강변의 혜산진에 다다른 것이 11월 21일이었으니 이와 비교하면 6사단의 엄청난 진격속도를 알 수 있습니다.
<11월 21일 혜산진에 도달한 국군 6사단 7연대. 미군보다 한 달 정도 빠른 쾌거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전체가 감격에 겨워하던 바로 그때 가까운 산속 깊숙이에 숨어서 7연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떼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은밀히 남하하여 매복 중에 있던 중공군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바로 어제 운산방면으로 진군하던 국군 1사단과 교전을 벌이면서 처음으로 그 정체가 확인되기는 하였지만, 참전규모나 성격 등에 대해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북진이 한참이던 10월 19일 이미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은 한반도 북부 깊숙이 산줄기를 타고 소리죽여 남하하였고, 그중 38, 40軍(서방측 개념으로 군단)이 초산과 북진(北鎭) 사이의 깊은 산속에 포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7연대가 예상보다 빨리 초산을 향하여 다가오자 한창 배치 중에 있던 중공군은 주력부대가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국군이 계속 앞으로 전진 하도록 고의로 방치하였습니다.
<아군이 정신없이 앞으로 나갈 때 중공군은 은밀히 배치되었습니다.>
7연대를 구하기 위해 2연대가 출동하는 도중 주원계곡을 통과하게 되었을 때, 봉우리 위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기습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피할 곳이 없을 만큼 순식간에 적에게 포위된 2연대는 우왕좌왕하였고, 날이 저물고 공중지원도 무산된 상태에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더불어 꽹과리, 나팔,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자 2연대 장병들은 그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공포에 급속히 빠져들었습니다.
<중공군이 구사한 낯선 전술에 급속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연대는 어디에다 대고 총을 쏘아야 할지도 모른 체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접한 중공군의 전술은 대개 이처럼 산악지대에서 야간에 고도의 심리전을 병행한 패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군은 중공군 참전 초기에 적의 낯선 전술에 상당히 곤혹을 치렀지만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이 전술은 이미 국공내전 등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7연대를 구하러 달려가던 2연대가 오히려 먼저 전멸당할 형국이 되자 7연대의 철수 또한 자력으로 타개하여야 할 처지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사단본부와 함께 후방에 있던 19연대도 거의 동시에 출몰한 중공군을 막아내는데 급급하여 어떠한 도움도 제공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압록강까지 제일 먼저 진출하였던 6사단은 연대별로 쪼개져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살아남기 위한 각개 병사들의 탈출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새롭게 변하였고 통일의 꿈은 멀어졌습니다-군우리에서 중공군의 급습으로 대패를 당한 미 2사단의 잔해>
공교롭게도 이 당시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상에 있던 6사단장 김종오는 예상치 못한 급박한 상황을 당하고난 후 "최선을 다하여 철수 작전에 성공하기 바람"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마디로 명령이 아닌 도와 줄 방법이 전무하니 알아서 후퇴하여 살아달라는 기원문이었습니다. 동계복장이나 보급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6사단은 휴대가 불가능한 중장비를 파기한 체 완전히 쪼개져 형극의 탈출 길에 올랐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장병들이 두려움, 혹독한 추위 그리고 배고픔을 극복하며 계곡과 산등성이를 따라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와 11월 6일 개천에 집결하였을 때, 탈출하는데 성공한 병력은 열흘 전 압록강 도착 당시의 50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장비는 거의 망실된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부대 해체 수준까지 다다른 심각한 몰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고 전혀 다른 형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사실 6사단뿐만 아니라 전 전선에서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온 국민이 통일을 꿈꾸게 하였던 6사단의 북진은 초산전투 후에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참담한 상황은 6사단 뿐만아니라 전선의 이곳저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던 미군도 갑자기 출몰한 중공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1.4후퇴 후 중공군의 약점이 간파 된 후에야 이런 공포를 겨우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경으로 향한 감격의 진격이 이렇게 갑자기 반전을 맞은 가장 큰 이유는 한마디로 만용 때문이었습니다. 북진이 개시되면서 UN군 지휘부는 전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판단하여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 정부는 아군이 38선을 넘은 뒤에 거듭된 경고를 하였지만, 미국은 내전을 간신히 끝낸 중국이 새로운 전쟁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만일 참전하더라도 극히 형식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였습니다.
<일장춘몽이 악몽으로 바뀐 초산전투는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반면교사입니다.>
더불어 북으로 갈수록 전선이 급격히 넓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북진 당시 아군은 옆 부대와의 연결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거리 경주처럼 앞만 보고 종으로 내달리는 무모함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틈새로 침투한 중공군에게 쪼개져서 고립된 아군은 녹아내렸고, 결국 통일의 꿈은 접게 되었습니다. 압록강에 손을 담근 대가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초산전투는 결코 잊지말아야할 반면교사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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