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

구름위 2013. 3. 12. 10:37
728x90

불과 보름 전까지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면서 38선 인근까지 다가간 아군은 이곳을 넘어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조바심을 낼 정도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마침내 10월 1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되었습니다.

<감격스러운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국군 3사단>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를 위협하던 북한군 주력의 대부분은 배후가 차단당한 체 붕괴되어 아군을 막을 적대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행군속도가 바로 북진속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북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군이 한만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8선에서 한만국경까지 가는 중간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놓여 있습니다.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로 진격하고 있는 미 8군에게 이곳을 탈환하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적국의 수도 점령은 단지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는 행위일 뿐이며 승전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치적인 상징성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북한도 개전 초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선전효과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평양 비행장으로 맥아더를 영접 나온 워커>


 따라서 미 8군을 이끌던 워커(Walton Walker)는 물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패주중인 북한의 전쟁 의지를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평양을 탈환하도록 예하부대를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미 8군은 미 1군단, 미 9군단, 국군 2군단으로 구성 되었는데 미 1군단과 국군 2군단이 각각 전선 좌우를 담당하며 북진하였고 미 9군단은 아직 38선 이남에 머물며 후방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아군의 진격여건상 평양 탈환은 미 1군단 관할이었는데 당시 군단은 미 1기병사단, 미 24사단, 국군 1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선봉은 기동력이 가장 좋은 미 1기병사단이 담당하여 10월 4일, 38선을 돌파한 후 경의가도 본선이라 할 수 있는 개성-금천-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다가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미 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우측에서 조공의 역할을 담당하며 북진에 참가한 부대가 국군 1사단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경의가도를 이용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던 미 1기병사단>


 국군 1사단은 공격 우선순위에 밀려 10월 11일에서야 38선을 넘었고 대부분 행군에 의존했을 만큼 기동력도 부족한 상태로, 험악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평양으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적의 심장부를 우리가 먼저 점령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있어 그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습니다. 미군이 금천에서 고전하는 틈을 타 국군 1사단은 앞으로 내달렸고 이후 평양 선점을 향한 한미양국군의 경쟁은 치열하였습니다.

 10월 19일 거의 동시에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대동강에 다다랐는데, 국군 1사단 예하 12연대가 미군보다 조금 빨리 선교리를 점령함으로써 제일 먼저 東평양을 점령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도주를 완료한 북한은 대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였고, 평양(本평양 또는 西평양)에 입성하려면 강을 도하하여야 했습니다. 장비가 좋았던 미군은 지체 없이 부교를 가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진입을 준비 중인 국군 1사단>

 자칫 눈앞에 두고도 평양 선점을 미군에게 빼앗길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바로 그때 국군 1사단은 그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인근 출신인 사단장 백선엽에게 대동강은 어릴 때부터 물놀이를 하던 곳이어서 얕은 곳을 잘 알고 있었고, 그곳을 도섭지점으로 삼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하 15연대가 미군보다 하루 빨리 평양 도심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6ㆍ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것은 엄청난 치욕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을 수복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서울을 탈환한 주체는 미 10군단이었습니다. 때문에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호언장담했었던, 이승만 정부는 평양 탈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서울 피탈은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치욕이었습니다>


 국군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비슷한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조바심이 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무슨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미 8군의 우익을 담당하며 한반도의 정중앙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2군단의 일부 예하부대들이 평양을 향하여 진격방향을 좌측으로 틀었습니다.

 그 결과 국군 1사단 15연대가 본평양에 입성하던 시간과 거의 비슷한 19일 밤, 대동강을 건넌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 8연대도 김일성대학을 점령하며 평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군보다 국군이 선점한 것은 맞는데 먼저 평양에 도착한 부대가 15연대인지 8연대인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1사단과 7사단에게 평양을 탈환한 부대라는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대동강을 도하한 7사단 8연대도 거의 동시에 평양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UN군에게 지휘권을 일임한 상태여서 국군 2군단의 독단적인 진격은 명백한 군령 위반행위였습니다. 미 1군단에 속해 연합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이 국군 7사단 8연대가 평양에 왔다는 소식에 놀라서 직접 찾아가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대노하였던 사례만 보더라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국군 역사에 평양탈환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지만 사실 과유불급이었습니다.

 당시 국군 2군단이 진격 방향을 좌측으로 바꾸자 전선 중앙이 순식간 텅 비어져 버렸고 이틈을 노려 북한군 잔당들이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평양탈환 후, 원 위치하였지만 우회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렇게 한 번 벌어진 틈은 이후 중공군이 침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30일 평양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였지만 최전선의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던 중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평양시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의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후 후퇴 당시에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고 중공군에게 즉시 내어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상징성은 컸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 있는 거점은 아니었던 평양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평양 탈환이 전쟁의 끝이 아닌 이상 그 임무는 원래 예정된 부대들에게 맡겨야 했는데, 조급함에 사로잡혀 전선의 상당 부분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한 곳으로만 집중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제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50년 10월은 국군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시간이었고 그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평양탈환이었습니다. 특히 국군 1사단이 여건과 장비가 월등히 좋았던 미 1기병사단과 벌인 경쟁은 국군의 위상을 널리 알린 쾌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창설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군대가 이토록 쾌속의 진격을 선보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터에 제작된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狀 감격 속에 탈환한 평양을 이처럼 비극적으로 내주었습니다>


 엊그제까지 지옥의 인공치하 시기를 보내었던 국민들은 적의 심장을 국군이 점령하였다는 낭보에 감격하였고 곧바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냉정을 잃고 즉흥적으로 내달렸던 대가는 불과 한 달 만에 달콤했던 북진이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50년 10월에 있었던 감격스러웠지만 과하였던 평양탈환은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