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이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쟁은 마치 화산과도 같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르면 약한 지진이 일어나고 아황산가스가 새어 나와 동물들이 죽기도 한다. 이런 징조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화산 폭발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화산이 정확하게 언제 폭발할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6ㆍ25전쟁도 그랬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이미 1949년 12월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다. 유양수 전투정보과장 주도로 작성한 연말종합정보보고에는 “1950년 춘계에 북한이 38도선에서 전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담겼다. 5월 무렵에는 위기설이 널리 퍼져 군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군은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대기태세,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경계태세, 5월 2일부터 3일까지 대기태세를 잇달아 발령했다. 5월 9일부터 27일까지 또다시 대기태세가 발령됐다. 총선거를 전후한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는 한 단계 격상된 경계태세가 발령됐다. 6월 11일부터는 가장 높은 비상경계태세가 발령되면서 군의 긴장은 최고도에 달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다는 구체적 징후가 더는 없다고 판단한 군 수뇌부는 6월 23일 24시부로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했다. 마침 6월 24일이 토요일이라 각 부대에서는 일제히 외출ㆍ외박을 실시했다. 4월 27일 이후 거의 45일 동안 계속된 대기ㆍ경계태세가 해제된 만큼 어느 때보다 많은 병력이 외출과 외박을 나갔다. 부대에 따라 외출ㆍ외박자의 비율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전군의 삼분의 일가량이 병영을 비운 상태가 됐다.
하지만 육본 정보국 정보상황실 요원들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22일부터 23일까지 북한군의 움직임이 여전히 심상치 않았던 것. 22일 고랑포 북방의 북한군 1사단 예하 병력들이 38도선에 보다 근접한 곳으로 이동한 징후도 확인됐다. 춘천 방면에서도 자주포의 이동이 관측됐고, 철원에서도 북한군의 활발한 병력 움직임이 관측됐다.
전선 곳곳에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자 24일 오전 10시 육본에서 정보국 주도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을 비롯해 작전국장과 군수국장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김종필(당시 중위) 전 총리를 비롯한 정보국 요원들은 전선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현 육본 각 참모부 참모부장 격에 해당하는 국장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4월 이후 지속적으로 발령했던 대기태세와 경계태세를 해제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난 상황에서 또다시 경계태세를 발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일까?
당시 육본 정보국 소속이었던 이영근 씨는 1977년 증언을 통해 “당시 군 수뇌부들은 38선에 배치된 북한 경비대와 인민군이 서로 병력을 교대하는 것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고 24일 회의 분위기를 회고한다.
긴급 회의가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하고 끝난 가운데 24일 오후 3시 채병덕 총참모장(현재의 참모총장)이 육본 정보국장실을 방문, 전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 자신에게 결론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본 정보국은 전 전선에 걸쳐 육군 첩보대(HID) 소속 첩보파견대를 38선에 투입시켜 현장 상황을 다시 한 번 체크하기로 했다.
장도영 당시 육본 정보국장은 2001년 펴낸 회고록에서 “24일 첩보대 김병계 소령에게 지시해 첩보장교가 지휘하는 5~6명으로 구성된 정찰반을 하나는 개성에서 계정으로, 또 다른 정찰반을 동두천에서 전곡으로 투입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도 2006년 1월 펴낸 ‘6ㆍ25전쟁사 2권’에서 당시 첩보파견대 요원들이 옹진, 백천, 개성, 고랑포, 동두천, 포천, 강릉 등 총 7개조로 나눠 투입됐다고 설명한다.
당시 육본 정보국의 김종필 전 총리가 당시 중위 계급으로 정찰계획을 직접 기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 중위가 작성한 정찰계획에 따라 김경옥 대위가 인솔하는 정찰조는 개성 방면을, 김정숙 대위가 이끄는 정찰조는 연천 방면을 정찰하려 했다는 것. 여하간 이들이 38도선 이북에서 현장 상황을 정찰한 후 보고를 보내오면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 군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육본 정보국 소속 첩보대 요원들이 현지 정찰을 위해 이동하던 시점, 서울에서는 육본 장교클럽 신축 축하 파티가 열렸다. 파티 자체는 미 군사고문단 요원들도 참석하는 공식적인 모임이었던 만큼 채 총참모장을 비롯한 50여 명의 고급 장교들이 참석했다.
공식 파티는 24일 밤 10시에 끝났지만 25일 0시를 넘겨 이어진 2차 비공식 모임까지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6월 19일부터 추적추적 계속 내리던 비는 24일 오후가 되자 폭우로 바뀌었다. 정찰요원들이 폭우를 뚫고 전방에 도착했을 때쯤인 25일 0시를 고비로 빗줄기가 점차 약해져 보슬비로 바뀌었다. 전방의 빗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서울 삼각지에 자리 잡고 있던 육본 정보국 사무실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전방에서 올라오는 보고 내용이 갈수록 수상쩍었기 때문.
25일 새벽 1시 육본 정보국 상황실 일직 장교로 근무 중이던 김종필 중위에게 정보국 옹진파견대의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국사봉 북쪽 능선에서 수 미상의 대병력 이동이 관측됐다는 내용이었다. 새벽 3시에는 문산 임진강 부근에서 북한군이 도하용 주정을 운반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보국 요원들의 걱정대로 전방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운명의 25일 새벽 4시 경기도 연천 전곡 방면에서 침투하고 있던 육본 정보국 첩보대 요원들은 번쩍 번쩍하는 불빛을 보았다. “미리 조준해 놓고 일제히 사격하는데 처음에는 번쩍번쩍할 뿐 소리는 없어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는 것이 정보국 최학모 중위의 증언이다. 최 중위가 보았던 불빛은 바로 북한군 M1938 122㎜ 곡사포의 일제 사격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그 누구도 그 불빛이 군ㆍ민간인 포함해 3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는 비극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채 총참모장은 첩보대 요원들의 보고에 따라 경계태세 발령 등 조치를 결정하려 했으나 그에게 최종 보고가 올라가기도 전에 북한군 남침이 시작된 것. 육본 정보국 요원들이 그토록 우려하던 북한군의 전면 남침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누구도 날짜는 알 수 없는 화산 폭발’처럼 그렇게 시작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은 공식적으로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6·25 사변’ ‘6·25 동란’ ‘한국전쟁’ 등 여러 용어가 혼용돼 왔다. 하지만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용어를 확정한 이후에는 ‘6·25전쟁’이 사실상 공식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 법률ㆍ행정명령ㆍ규칙은 물론이고 국방부가 간행하는 각종 공식간행물에서도 원칙적으로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6ㆍ25전쟁 연구의 중심기관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내고 있는 전쟁사 시리즈도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2004년 이후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습
“떨어집니다. 막 떨어집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에서 몇 분이나 더 지났을까. 육군 7사단 정보처에서 북한의 기습을 알리는 제1보가 육본 정보국으로 올라왔다. 숨을 헐떡이며 전해 온 보고 내용은 북한군의 122㎜ 곡사포 사격이 시작됐다는 내용이었다. 과거 38선 충돌 때 들었던 북한군 박격포 소리와는 전혀 다른 122㎜ 곡사포탄의 폭발음 때문에 전방 장병들은 소리만으로 평소와는 다른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미 그 시간 제일 서북쪽 옹진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육본 직속 17연대부터 경기도 개성과 문산에 자리 잡고 있던 1사단, 경기도 동두천의 7사단, 강원도 춘천의 6사단, 강원도 주문진의 8사단의 전방부대들도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 준비사격을 받고 있었다.
육본 정보국이 전쟁의 소동 속으로 빨려들어 간 바로 그 시간 육본 작전국도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날 육본 상황실 당직이었던 조병운 대위는 “강릉 북쪽 38선 지역과 춘천의 수리봉, 옹진의 까치봉에서 상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거의 동시에 전해져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 당시 작전군의 분위기를 전한다.
육본 정보국의 일직장교로 근무 중이던 김종필 중위는 즉시 작전국으로 뛰어 올라가 일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일직사령은 펄쩍 뛰며 “그럴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결국 작전국 요원들이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정식 보고를 통해 결심을 받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동안 정보국 요원들도 장도영 정보국장에게 전방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보고에 따라 장도영 정보국장이 육본 정보국에 나타난 것은 새벽 5시 40분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작전국장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사ㆍ군수국장과도 쉽사리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작전국에서 겨우 통화가 돼 육본에 도착한 주요 고급 장교는 새벽 5시 30분에 나타난 작전국 차장 이치업 대령뿐이었다.
벌집 쑤셔놓은 듯한 육본의 분위기에 한번 놀란 이치업 대령은 작전국 상황판을 보고 두번 경악했다. 상황판은 전방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판단돼 비상을 발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권한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작전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채병덕 총참모장, 김백일 참모부장, 장창국 작전국장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치업 작전국 차장은 독단으로 군에 비상을 걸고 ‘작전명령 1호’를 하달했다.
이에 앞선 새벽 4시 20분 6사단 7연대장인 임부택 중령은 채 총참모장 공관에 전화를 걸어 부관 나엄광 중위에게 전방에서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부관 나중위는 총참모장 부인 백경화 여사에게 보고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채 총참모장은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작전국의 보고가 전달되고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가 새벽 6시 무렵 총장 공관에 직접 찾아오자 그제서야 채 총참모장도 전방 상황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던군(全軍)에 비상하라, 각 국당(局長)을 불러라.” 평양이 고향이었던 채 총참모장은 즉시 구개음화가 없는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비상령 발동을 지시하고 육본 국장들에 대한 소집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고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 공관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국 생활에 경험이 있던 신성모 장관은 평소 주말이면 면회나 전화도 사절하는 등 프라이버시를 중시했다. 어쩔 수 없이 채 총참모장은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인 신동우 공군 중령에게 연락해 차량으로 서울 마포에 있던 장관 공관으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장관 공관을 경비하던 헌병들은 사전 연락도 없던 차량이 들어오려 하자 통과를 막으며 제지했다. 긴급 상황임을 알리는 채 총참모장 일행들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헌병들은 차량의 통과를 허가했다. 가운에 가까운 가벼운 옷차림으로 채 총참모장의 보고를 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경악했다. 그때가 오전 7시였다. 구두 보고를 통해 비상 동원령에 대한 재가를 얻은 채 총참모장은 육군본부로 복귀해 지휘를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오전 7시를 넘어섰을 때였다.
오전 8시, 채 총참모장은 김백일 참모부장과 함께 2ㆍ3ㆍ5사단 등 후방 3개 사단의 전방 출동을 결정했다. 동시에 수도경비사(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의 3개 연대에 출동 대기를 명령했다. 가시적인 병력 이동 조치를 취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장창국 작전국장이 육본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마침 서대문쪽으로 이사를 갔던 장 국장의 집에 공용전화는커녕 사설전화도 미처 가설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 국장의 집을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해 작전국에서 소동이 벌어지던 찰나 천만다행으로 장 국장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마침 차량을 타고 ‘비상소집’이라는 가두방송을 하던 헌병들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 장 국장도 상황 발생을 인지하게 된 것.
장 국장이 육본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맞닥뜨린 일은 전화 통화였다. 장 국장 책상 앞에 놓여 있던 15회선의 전화기는 육군의 사단을 비롯한 주요 부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기였다. 평소에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전화기였지만 전쟁 상황에는 무지 불편한 존재로 전락했다. 별도의 야전군사령부나 군단이 없던 시절이라 각 사단장은 일제히 장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통화하기를 원했다. 15개의 수화기를 교대로 집어들며 전화 통화의 홍수로 빠져든 장 국장은 전쟁 상황을 체계적으로 판단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장 국장은 1960년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이뤄진 공식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부대로부터의 상황보고는 산발적으로, 또는 긴급히 들어왔으나 정보와 작전 두 계통으로 왔기 때문에 상황 파악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체계가 정보를 교환하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합동회의도 없었으므로 부득이 개념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면서 우왕좌왕했던 것이다.”
장 국장이 전화통을 붙들고 우왕좌왕하면서 씨름하고 있는 동안 채 총참모장은 경기도 전방 지역을 순시 중이었다. 경기도 수색에 있던 1사단 사령부을 방문하고 예비 연대인 1사단 11연대의 전방 출동을 격려한 후 오전 10시 무렵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채 총참모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었던 1사단과 달리 7사단 전방의 포천은 이미 거의 전선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채 총참모장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전면적인 전쟁이고 위기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규모가 큰 대규모 충돌이라고 생각했을 뿐 미처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 육본의 주요 장교들도 같은 시간 이것이 평소보다 규모가 큰 충돌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점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막 떨어지는 포탄’과 함께 전쟁이 시작된 지 이미 6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전쟁이 시작된 것은 새벽 4시였지만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실제로나 심리적인 측면에서나 그야말로 북한군의 완전한 기습이었다.
6월 25일 0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의 공식 신문이었던 ‘민주조선’ 편집실로 낯선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잠깐 선잠이 들었던 민주조선의 편집간부 정명조 씨는 화들짝 놀라며 손님을 맞이했다. 마침 24일 초저녁에 노동당 중앙당 선전부에서 신문 인쇄를 시작하지 말라는 연락을 이미 받은 터였다.
낯선 손님의 요구는 특이했다. 조용한 방으로 가자는 것. 정씨는 그 손님을 주필실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서도 손님은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손님은 자신의 당원임을 증명하는 노동당 당원증을 보여준 후 정씨의 당원증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서로의 당원증 확인이 끝나자 봉인된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문서 안에는 “25일 금조 미명에 남한 군대가 북침했다. 인민군대는 불의의 침범을 받고 2㎞를 후퇴했다”는 놀라운 내용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발 뉴스로 적혀 있었다. 문서에는 신문의 제목을 활자 몇 호로 하라는 지시와 함께 ‘1면 머리기사로 실을 것’이라는 특별지시까지 빨간색 글자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25일 새벽에 한국군이 북침했다는 뉴스가 4~6시간 전인 25일 0시에 이미 북한 관영 언론에 전달됐다는 이야기다.
6ㆍ25전쟁 전문가인 박명림 교수는 정씨의 이 같은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자 민주조선을 수배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전쟁 통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던 것. 하지만 박 교수는 정씨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슷한 증언을 북한 조선중앙방송위원장인 남봉식 씨도 남겼기 때문이다.
남씨는 이미 그해 6월 23일 노동당 중앙당 선전부장 박창옥으로부터 “3일 후 중요한 뉴스가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상태였다. 그날 이후 24시간 비상대기 상태로 퇴근도 하지 않던 남씨는 결국 25일 새벽 “남한군이 침공했으나 인민군이 반격해 반공격으로 넘어 가고 있다”는 김일성 명의의 방송을 북한 전역에 내보냈다. 이미 전쟁이 나기 전부터 북한의 관영 언론기관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던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에 빠진 것 자체도 괴로운 일인데 북한은 개전 책임까지 한국에 뒤집어 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국방부 정훈국은 25일 낮 12시가 지나서야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북한의 허위 선전은 그들의 기습만큼이나 교묘하면서도 신속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거짓말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은 시종일관 명확하다. 한국이 먼저 북침했다는 것.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당당한 이 북한의 거짓말은 한때 일부 외국 학자들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기나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 소련파의 증언
하지만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북한의 거짓말에 커다란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한때 북한 정권이나 북한군에 몸담았다 소련으로 망명한 인물들이 수십 년 만에 증언하기 시작한 것. 1990년 서울을 찾은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씨는 북한군의 남침 계획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작성됐는지 속속들이 증언했다. 유씨는 소련군 고문단의 주도로 작성한 ‘선제타격계획’이란 제목의 남침 계획을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증언, 남침 계획의 작성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독소전에 참전하는 등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소련군 고문들이 1950년 남침 작전계획을 작성했고,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북한군 작전국장·공병국장·포병사령관 등이 이를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이 유씨의 증언이었다.
유씨의 증언을 시작으로 40여 년의 냉전 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공산 측 자료들이 봇물 터지 듯 공개되기 시작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6ㆍ25전쟁에 관련된 구소련 문서 216건 548쪽을 넘겨받았다. 옐친이 넘겨 준 문서는 러시아 대통령 문서고와 외무부 문서고에서 보관하던 자료들이었다.
옐친 문서에는 우리 정부가 원했던 러시아 국방부와 구 KGB 문서고 자료는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6ㆍ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일부 포함돼 있어 ‘6·25 북침설’이란 허위 주장은 이제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게 됐다.
◆ 구소련 문서
북침설에 대한 보다 결정적 타격은 러시아 연구자들로부터 나왔다. 러시아 외교 아카데미 부원장이었던 예프게니 바자노프와 러시아 동양학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나탈리아 바자노바 부녀는 현직 러시아 관료와 연구원이란 이점을 활용, 미공개 러시아 문서를 뒤져 1997년 자료집을 펴낸 것.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가 “6ㆍ25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진행됐고, 왜 그렇게 종결됐는지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라고 평했던 바자노프 문서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어떻게 전쟁을 기획하고 협의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2000년에는 러시아 외무부 부설 국제관계대학의 학장인 A.V. 토르구노프가 6ㆍ25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수집, 해제한 책을 펴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공개된 문서 중 가장 적나라하게 남침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는 두 건이다.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 대사는 1950년 6월 16일 모스크바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세부 계획에 의하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공격이 개시될 것임. 공격의 첫 단계에서 조선 인민군 부대들은 옹진반도의 국지 작전처럼 행동을 개시한 다음 주 공격을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갈 것임. 두 번째 단계에서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장악해야 함.”(폰드 3, 목록 65, 문서 830, 리스트 9-11)
같은 달 21일자 보고는 더욱 노골적이다. “김일성은 정보 보고에 의하면 ‘남측은 인민군의 공격 사실을 세부적으로 알고 있다’고 본직에게 말하였음. 그 결과 남한은 군대의 전투능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음. 방어선들이 강화되고 있으며, 부대들이 옹진 방면에 추가적으로 배치되고 있음. 이러한 상황 발생으로 김일성은 본래 공격 계획이 수정돼야 한다고 믿고 있음. 총공세의 서막으로 옹진반도에 대한 국지 작전 대신 6월 25일 전 전선에 거쳐 전면 공격을 가하자고 제안하고 있음.”(폰트 45, 목록1, 문서 348, 리스트 14-15)
이상의 자료로 공산 측의 남침으로 6ㆍ25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됐다. 물론 아직까지 논쟁이 남아 있는 대목은 있다. 김일성과 스탈린 중 누가 개전을 주도했는가라는 주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공개한 구소련 자료들은 남침을 망설이는 스탈린을 김일성이 설득해 남침 결정을 받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북한의 역학관계상 북한이 아니라 소련이 전쟁의 기획자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소련 측이 자신의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국과 북한에 주된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문서만 선별적으로 공개했다는 비판을 하는 학자도 있다. 거짓말과 함께 시작된 전쟁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 노획문서로 본 북한의 남침 증거
‘아군의 공격 정면에는 적의 7보사 1보련이 방어한다’.1950년 6월 22일 북한 4사단이 예하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는 전투명령 1호는 남침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 중 하나다. 최고 비밀을 뜻하는 ‘극밀’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는 이 문서는 러시아어 필사본 2쪽, 등사판본 전투계획일람표와 함께 1950년 7월 16일 대전 근방에서 아군에게 노획됐다. 이 문서는 시작부터 아군의 ‘공격 정면’이라고 명시해 북한이 이미 22일 구체적인 남침 명령을 예하 부대에게 하달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은 이미 6·25전쟁 중에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입증하는 북한군 문서들을 다수 노획했다. 1990년대 이후 소련 측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명할 문서들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90년대 이전까진 북한이 이들 문서에 대해 ‘조작’이라고 부인한 탓에 이들 문서가 그리 주목받지 못했으나 구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6ㆍ25전쟁 중 아군이 노획한 북한군 문서들도 다시금 주목받게 됐다.
이 밖에도 북한 총사령부 명의로 6월 18일자로 하달된 정찰명령 1호도 북한의 전투 준비 과정을 잘 보여주는 문서 중 하나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보관 중인 1950년 6월 15일자 북한 531군부대 부대장이 작성한 명령서 ‘신관조제 작업에 관하여’는 “각 연합부대 포병부사단장 및 포병공급과장은 책임지고 현 보유 포탄 100%를 신관 결합시켜 사격에 지장이 없게끔 기술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보유 포탄 신관 100% 결합은 이미 이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역시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6월 24일자 북한 657군부대 제5과 공병정찰계획은 25일 새벽 3시 30분까지 북한강 부근 마평리의 지뢰원과 지뢰 종류를 확인하고 주변 소로와 협곡의 지뢰까지 확인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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