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중서부전선의 붕괴

구름위 2013. 3. 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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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의정부 일대의 전경. 7사단이 방어하던 동두천과 포천의 함락으로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향한 길이 적에게 개방됐다.                                                                                                        <자료사진>

 

  6월 25일 국군7사단 예하부대들의 가장 큰 적은 ‘시간’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북한군이 아군 제2선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전에 먼저 신속하게 주력부대를 투입해야만 어떻게든 전체적인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외출·외박에서 복귀한 병력으로 국군7사단 1연대 1대대의 1차 재편성이 끝난 시점은 25일 오전 8시 무렵이었다. 마침 1대대장은 보병학교에 입교 중이어서 부대대장의 지휘하에 300여 명의 병력이 오전 9시 무렵 동두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2선 방어진지인 양주 마차산에 투입되기에 앞서 잠시 논란이 벌어졌다. 1대대 4중대장 박찬긍(육사7기·중장 전역) 중위는 “마차산 정상에 올라가 봐야 남하하는 북한군을 차단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차라리 도로 주변에 진지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부대대장은 “연대장의 명령이다”라는 말로 건의를 물리치고 마차산으로 올라갔다. 짧은 논쟁이었지만 이것이 국군 1연대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산 8~9부 능선에 1대대 병력이 포진을 끝낸 것은 이날 정오 무렵이었다.

 3대대의 집결은 1대대보다 조금 늦게 이뤄졌다. 참모학교에 입교 대기 중이던 3대대장은 부대로 복귀한 후 9시까지 집결한 병력 200여 명을 이끌고 전방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3대대가 동두천을 경유해 양주 봉암리에 진출한 것은 오전 11시가 넘어서였다.

 1연대 2대대의 선전

 이처럼 1대대와 3대대가 제2선 방어진지로 투입되는 동안 2대대는 일찌감치 제2선 방어진지인 소요산 입구에 포진해 3번 국도를 차단하고 있었다. 2대대 예하 전초 중대들이 25일 개전 초반 제1선 방어진지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2대대 본대는 25일 오전 동안 소요산 입구를 틀어막으며 나름대로 선전을 거듭했다.

 우선 연대 비상대기 중대인 1대대 3중대가 신속하게 2대대를 증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투입된 것이 주효했다. 3중대는 새벽 4시30분 연대 작전주임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고 신속하게 전방으로 이동, 이미 새벽 6시에 동두천을 통과해 말고개에 포진했다.

 국군 1연대는 최대한 전방에 추진시킨 3중대가 적의 예봉을 받아내는 동안 예하 1·2·3대대가 제2선 방어진지를 점령할 시간을 벌려 했다. 3중대는 연대의 의도대로 오전 7시 10분 양주 176고지 북쪽에서 적의 행군 대열 선두에 사격을 하는 등 적의 접근을 방해한 이후 소요산 입구의 2대대와 합류했다.

 2대대가 25일 오전 3번 국도를 차단할 수 있었던 보다 결정적 요인은 국군7사단 포병대대 2포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김한주 중위가 지휘하는 2포대는 25일 오전 9시 30분 동두천에 도착, 2대대 주진지 남쪽 5㎞ 지점의 보산리 부근 뽕나무 밭에 M3 105mm 곡사포 5문을 방렬한 후 사격을 시작했다. 2포대는 250여 발의 포사격으로 2대대 주진지를 향해 전진하는 북한군 4사단 예하 병력을 강타했다.

 2대대와 2포대의 활약으로 오전 11시까지 소요산 입구를 통과하지 못한 북한군 4사단은 정오 무렵 T-34 전차를 투입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T-34 전차는 동두천 북쪽 2㎞ 지점의 창말고개에서 윤종호 중위가 지휘하는 아군 57mm M1 대전차포 3문의 집중사격에 더 이상 진격할 엄두를 못 내고 또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5일 정오를 전후한 시간, 국군7사단 1연대의 상황은 다소나마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이미 1대대가 마차산, 2대대가 소요산 입구에 포진을 끝낸 상태였고, 3대대도 양주 봉암리에 배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특히 2대대가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함에 따라 한때 서울 시내에 아군의 반격설이 나도는 등 잠시나마 동두천 일대 전황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도 나왔다. 

 예상 못한 구멍

 물론 전체 전황의 실상은 아군 일부의 낙관적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양주와 동두천 일대에서 국군7사단 1연대가 분투하는 동안 포천 방면의 9연대는 악전 고투 끝에 거의 전선 붕괴의 지경에 몰리고 있었다. 포천이 예상보다 빨리 오전 11시에 함락됨에 따라 동두천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1연대는 포천 방면의 북한군 움직임까지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포천을 거쳐 의정부까지 조기 점령될 경우 동두천을 방어해 봐야 후방을 차단당할 염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25일 오후 3시 무렵 포천의 국군 9연대뿐만 아니라 동두천의 국군 1연대의 상황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동두천 서쪽의 양주 안흥리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 결국 동두천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도 북한군에 의해 포위되고 있는 조짐이 뚜렷해졌다.

 바로 국군 1연대 예하 1·3대대의 배치와 간격이 문제였다. 25일 오전 1·3대대가 배치될 때를 즈음해 이미 북한군 4사단 병력이 마차산 서쪽 도로를 통과해 남하해 버렸기 때문이다. 2대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북한군 4사단의 예봉을 막아내는 동안 북한군 4사단 소속의 또 다른 부대가 1·3대대의 배치 간격 사이로 이미 후방으로 뚫고 들어온 것이다.

 결국 마차산에 포진한 1대대는 박찬긍 중위가 우려했던 것처럼 적과 접촉하지 못하고 유휴 병력이 되어 버렸다. 봉암리에 배치된 3대대도 오후까지 적과 접촉하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 순간에 국군7사단 1연대의 주력 병력이 적과 전투하지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동두천의 함락

 25일 오후 3시부터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게 된 국군 1연대는 점점 전선 유지에 힘겨움을 느꼈다. 1연대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모아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외출과 휴가에서 복귀한 병력을 중대 단위로 편성해 계속 전방에 투입하는가 하면 사단 하사관 교육대 등 교육 중인 병력들도 최대한 집결시켜 중대 단위 전선에 투입했다.

 25일 오후 5시 무렵 국군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더 이상 동두천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느꼈다. 하지만 아군의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는 주간에 철수할 경우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우려한 1연대장은 일몰 이후 철수하도록 예하부대에 하달했다.

 이 같은 명령에 따라 국군 1연대 2대대와 3대대는 후방 철수작전을 감행, 이날 밤 자정 이전 후방 덕정국민학교에 집결을 완료했다. 하지만 마차산에 포진한 1대대는 철수 행렬에 동행하지 못했다. 1대대에는 SCR-609 무전기가 있었지만 이날 낮 동안에도 잘 연락되지 않았고 그나마 연락장교나 연락병을 통한 명령 수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고 산꼭대기에서 고립돼 있던 1대대는 후방 철수 명령마저 받지 못해 홀로 후방에 고립됐다. 25일 오전 11시 포천이 함락되고 오후 10시 무렵 동두천도 함락되면서 서울의 관문 의정부를 향한 길이 마침내 적에게 개방됐다. 중서부 전선 붕괴의 대참사가 시작된 것이다.  


 큰 강 없어 방어작전 펼치기 어려워- 7사단 1연대의 분투

국군7사단 1연대가 25일 오전 동안 가장 고민한 문제는 바로 ‘시간’이었다. 하지만 1연대는 시간보다 1대대와 3대대의 부적절한 병력 배치라는 또 다른 변수 때문에 고배를 들어야 했다. 물론 북한군에 상대가 되지 않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 싸웠던 전투인 만큼 25일 국군 1연대 장병들의 처절한 사투는 그것 자체로 충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2001년 공개된 러시아의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당시 1연대가 분투했던 동두천 점령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완강한 저항’이라는 문구 속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군 1연대가 분투했음을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북한군) 4보병사단은 동두천 지역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고 진격을 정지했다. 2시간에 걸쳐 전투를 실시해도 효과가 없어 사단장은 사단 제2제대를 전투에 투입하는 한편, 1개 특화점 공격조를 동두천 동북쪽 2km의 무명 감제고지를 점령하도록 했다. 특화점 공격조는 전투를 벌여 저녁 8시에 무명고지를 점령했다. 밤 9시 20분쯤 (북한군) 사단 주력은 동두천을 점령했다.”

 또한 군사편찬연구소의 남정옥 박사는 “특히 7사단의 방어 지역은 횡으로 가로지르는 큰 강이 없었다는 점에서 1사단이나 6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어에 어려움이 있는 지형이었다”고 평가한다.

7사단의 포천·동두천 함락은 의정부·서울 함락으로 연결돼 6·25 초전 참패의 연쇄고리를 이루지만 개별적인 상황을 따져 보면 ‘불가항력’ 네 글자로 요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았던 것이다.

 

포천이 함락된 이유

국군7사단 9연대가 방어하던 포천의 함락은 중서부전선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였다. 6월 25일 밤 10시까지 버텨냈던 동두천의 국군7사단 1연대와 달리 9연대의 포천 방어선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개전 반나절 만인 오전 11시에 뚫려 버렸을까.

 사실 9연대장은 전쟁 시작 전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 장병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연대장이 직접 머리를 삭발하기까지 했다. 또 24일 장병들의 외출ㆍ외박을 허용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전방 배치 연대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9연대라고 해서 경계 상태가 더 이완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연대의 방어선이 그토록 쉽게 붕괴된 이유는 바로 문제의 T-34 전차 때문이었다. 국군7사단 9연대 3대대 소속이었던 왕규익 중위는 25일 오전 가랑산에서 적 전차들의 남하 행렬을 지켜보며 전차 대수를 일일이 계산, “직접 목격한 적 전차는 모두 69대였다”는 구체적인 증언을 남겼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 증언은 전적으로 무시됐다. 북한의 전차 보유량을 고려할 때 포천 회랑에 그토록 많은 전차가 투입됐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미군들도 왕 중위의 증언에 대해 장갑차나 자주포까지 전차로 오인한 결과라며 포천 회랑에 투입된 북한 전차는 아무리 많아야 40대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1년 라주바예프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착각은 왕 중위가 아니라 미군들이 했음이 50년 만에 뒤늦게 밝혀졌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개전 당일 출동시킨 T-34 전차 120대 중 80대를 포천에 집중시켰다.


 ■ 후방에 고립된 9연대

당시 국군9연대의 보병 병력은 주로 산에 배치돼 있고 일부 대전차포와 곡사포, 2.36인치 로켓포가 도로변에 배치돼 있었다. 하지만 전차를 파괴해야 할 대전차포와 로켓포 등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도로를 통제할 방책이 없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만세교 부근에 설정돼 있던 국군9연대 2대대의 제1선 방어진지는 25일 오전 8~9시 사이 북한 T-34 전차의 돌격에 맥없이 뚫려 버렸다. 개전 이후 4시간 동안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내던 2대대는 이때 사실상 부대 지휘체계가 와해됐다. 후방으로 탈출한 장병들의 수도 겨우 30여 명에 불과했다.

 천주산과 가랑선에 걸친 국군9연대의 주저항선이자 제2선 방어진지도 10시 30분 무렵 적 T-34 전차의 돌격에 그대로 붕괴됐다. 더욱 황당한 일은 25일 오전 11시 북한 105전차여단 소속 전차들이 43번 도로를 따라 포천읍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포천읍 동북방의 천주산과 가랑산에 배치된 국군9연대는 두 산 사이의 43번 도로 방어에 실패하긴 했지만 부대 자체는 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105전차여단은 국군9연대를 그냥 방치해 두고 후방으로 뚫고 들어간 것. 결과적으로 국군9연대는 포천을 거쳐 의정부로 후퇴할 수 있는 퇴로마저 막혀 버린 셈이 됐다.

 이 상황에서 북한군 3사단 보병 병력들이 정면에서 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11시 30분쯤 국군9연대 예하 1ㆍ3대대는 북한군 3사단 보병 병력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시 40분쯤 포천읍을 점령한 이후 다시 되돌아온 북한 105전차여단 소속 T-34 전차들이 국군9연대 3대대의 후방을 덮쳤기 때문이다.

 천주산과 가랑산 일대의 국군9연대 주력은 ‘앞에는 북한 3사단, 뒤에는 북한 105전차여단’을 상대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고약한 처지로 내몰렸다. 설상가상으로 1대대는 탄약까지 떨어졌다. 25일 오후 2시 마침내 북한 3사단 보병들도 신북대교를 통과하면서 9연대의 주저항선은 적 전차에 이어 적 보병에도 또다시 뚫렸다.

 
 ■ 9연대의 철수작전

이 무렵 국군7사단 사령부에서 9연대로 명령이 하달됐다. 명령의 요지는 주저항선을 최대한 방어하되, 실패할 경우 포천읍 동서 양측면의 청성산(284고지)과 181고지를 점령해 방어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주저항선은 물론이고 이미 후방의 포천 읍내까지 북한군 전차에 점령된 상황이었다. 국군9연대장은 결국 동남쪽로 우회해 철수한 후 다시 의정부 축석령으로 북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1ㆍ3대대 병력을 주축으로 한 국군9연대 주력은 포천읍 동쪽으로 크게 우회해 광릉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3대대에게는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못하는 사태가 또다시 벌어졌다. 이미 붕괴된 2대대에 이어 3대대가 후방에 추가로 고립되면서 국군9연대는 사실상 대대 규모로 전력이 약화됐다.

 포천의 위기 상황을 인지한 육군본부와 7사단은 9연대가 방어하던 포천 방면의 전선을 수습하기 위해 잇따라 증원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11시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3연대를 7사단에 배속하고, 대전에서 북상하는 국군2사단도 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25일 밤 8시에는 2사단 5연대 2대대가 2사단 예하 병력 중 처음으로 의정부 금오리에 도착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동두천이 함락된 25일 밤 10시, 이제 의정부를 향한 양방향의 길이 모두 열린 상황에서 위기를 해결할 방안이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25일 밤 육군 수뇌부들 사이에서 전쟁의 운명을 가늠할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사연구가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는 이른바 ‘즉시 반격 vs 축차 투입’ 논쟁이 폭발한 것이다. 


“대전차포·로켓포도 별무효과”- 참전 소대장이 증언한 적 전차와의 조우

 북한 T-34 전차들이 포천에 나타났을 때의 상황에 대해 가장 상세한 목격담을 남긴 인물은 9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차규헌(육사8기ㆍ대장 전역) 중위다. 그가 1985년에 증언한 6월 25일 포천의 상황은 이렇다.

 6월 25일 의정부 주둔지에서 새벽 비상 나팔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대대 주번 사령이 뛰어다니며 “출동준비 빨리하라”고 외치고 다녔다. 전면전 상황을 가정한 기동훈련을 받지 못해 연병장이나 탄약보급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병사는 병사대로, 차량은 차량대로 왔다 갔다 해 마치 시골 장터를 방불케 했다.

 소대는 단독무장만 하고 첨병소대가 돼 최선두로 출발했다. 차량이 포천 만세교에 들어섰을 때 억수 같은 빗속에 적 포탄이 여기저기 낙하했다. 우리 소대는 무명고지로 올라가 사전에 준비된 진지를 점령했다. 엉성하게 파 놓았던 개인호에는 빗물이 넘쳐 이를 퍼내고 들어갔을 때는 흙탕물에 뒤범벅이 됐다.

 우리 부대의 뒤를 이어 57㎜ 대전차포 6문이 만세교 부근에 배치된 나의 소대 진지 바로 옆 도로변에 진지를 점령했다. 진지작업 중 적 전차를 발견한 병사는 “전차 출현”이라고 큰 소리로 외칠 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뛰다가 사격 준비를 했다.

 바로 이 무렵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선두 전차 앞에서 포연이 관측됐다. 전차에 57㎜ 대전차포탄이 명중한 것이다. 이를 보던 병사들이 “명중”이라고 함성을 질렀으나 전차는 멈칫하는 듯하더니 전진을 계속해 우리가 배치된 진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적 전차는 이때부터 맹렬히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아군 진지 쪽으로 질주해 왔다. 57㎜ 대전차포 사수들의 피해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포의 조준경만 빼 들고 후방으로 후퇴해 버렸다.

 얼마 후 적 전차 종대가 보병도 동반하지 않은 채 소대 진지 옆 지뢰를 피하는 듯한 방법으로 지그재그식으로 통과하려 했다. 이때 이곳에서 연대의 미 고문관 무어 중위는 병사들로부터 2.36인치 로켓포를 받아들어 사격했다. 2발을 사격해 명중했으나 적 전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전진했다. 이를 본 무어 중위는 쏜살같이 후방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 병사들의 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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