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 새벽 4시 의정부 남쪽의 백석천 방어선이 돌파되던 그 순간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부슬비까지 내려 젖어 버린 군복과 진흙탕 범벅이 된 도로는 후퇴하는 국군 장병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마침 그 시간 서울 중앙청에서는 비상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전선 상황이 심각해진 만큼 이제 정부를 옮기는 문제를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27일 오전 2시 이승만 대통령이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의 주재로 열렸다.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27일 오전 4시 30분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은 서울을 포기하고 정부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비상국무회의에 조금 앞서 27일 오전 2시에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 수뇌부회의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했다. 채병덕 육군총참모장과 김영철 해군총참모장 대리, 김정렬 공군총참모장이 참석한 이 회의의 첫째 결론은 “육군은 패전이 계속되는 경우 게릴라 작전으로 전환해 최후까지 항전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참담한 둘째 결론은 “해군과 공군은 지상군 작전에 협동하며 마지막에는 망명정부의 수송을 담당한다”는 것. 이미 정부와 국방 수뇌부가 서울 함락보다 더 심각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둘 만큼 상황은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비상국무회의가 끝난 후 육군본부로 돌아온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서울 포기 결심을 육군본부의 주요 국장들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서울을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면 반대했다. 장황한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정부는 천도하더라도 군은 계속 서울을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채 총참모장은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를 불러 밀봉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유재흥 장군에게 전달하라는 지시였다.
김 중위가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채 총참모장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것 아니야. 서울까지 앞으로 몇 시간 더 버틸수 있느냐는 거지.”
창동방어선
서울에서 이처럼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을 때 국군 장병들은 유재흥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의 지휘 하에 창동 주변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투입된 부대는 1연대·3연대·5연대·25연대 등 동두천, 포천, 의정부에서 전투를 하던 연대들이 거의 망라돼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사단급을 상회하는 규모였지만 여러 차례 격전을 치르며 후퇴하던 상황이라 실병력은 1개 연대급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중랑천 동쪽 현재의 서울 노원구 방면에는 변변한 도로가 없는 실정이었다. 지금은 격자형 도로가 정연하게 들어서 있지만 당시만 해도 논 사이로 달구지가 겨우 지나갈 꾸불꾸불한 소로가 전부였다.
이 같은 당시 도로 사정상 의정부를 돌파한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창동과 수유리 방면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창동 방어선은 현재의 창동역 동남쪽 언덕에서 시작해 정의여고 뒷산과 쌍문근린공원을 지나 4·19 국립묘지의 북쪽 산기슭을 연결하는 곳에 설정돼 있었다. 병력이 부족해 종심이 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변한 대전차 화기도 없었으므로 도로를 차단할 방책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27일 오전 진지에 배치된 국군 M3 105㎜ 곡사포 6문이 접근하는 북한군 전차 부대 대열에 포격을 가하자 보병부대도 일제히 소총사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 대열은 지난 이틀간의 전투에서도 그랬듯이 국군 포화에 관계없이 도로를 따라 계속 전진했다. 포성과 소총 사격소리는 요란했지만 전투 결과는 단순했다. 전선 돌파.
김종필 중위가 유재흥 장군에게 전달할 편지를 갖고 수유리를 막 지나 창동에 도착한 시간은 27일 오전 11시를 전후한 시점. 마침 창동 방어선이 막 돌파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저기 총성과 함께 후퇴하는 국군 장병과 낙오자 통제선을 지키고 있는 헌병들이 뒤엉켜 전선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김종필 중위는 유재흥 장군을 만나지도 못하고 철수하는 병력들 사이를 오가다 겨우 정릉 입구에서 육본연락장교단장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김종필 중위는 육본 총참모장의 지시를 받고 온 상황임을 설명하고 이 대령의 의견이라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용문 대령이 한숨을 내쉬며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
김종필 중위가 용산의 육군본부로 이 같은 상황을 보고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수고했다”며 담배 하나를 권했다. 총참모장은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김종필 중위에게 담배를 권하는 손이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 육본 근무자들의 증언이다.
미아리 방어선
27일 정오부터 미아리 일대에 또다시 방어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흔히 미아리방어선이라고 하지만 서쪽 미아리 고개에서 시작, 동쪽으로 회기동까지 연결되는 고지군 곳곳에 국군이 배치됐다. 현재의 미아삼거리역과 미아역을 연결하는 도로 서쪽 언덕 위에도 방어 병력이 줄지어 포진했다. 당시 행정구역상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돈암동부터가 서울이었다. 미아리 방어선은 진짜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셈이다.
마침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응준 소장이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으로 방어선을 책임지게 됐지만 창동을 방어하던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가 미아리 방면으로 후퇴해 오자 작전 책임구역을 분할하게 됐다. 유재흥 준장은 미아리고개 동쪽 지역을 방어하기로 했고, 이응준 소장이 미아리고개 서쪽 지역을 방어하게 된 것.
마침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 늦게부터 굵은 빗줄기로 바뀌었다. 미아리 고개 여기저기에 설치되는 참호 속에는 빗물이 가득차 진흙 범벅이 됐다. 국군의 분투를 바라는 시민들이 장병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미아리 고개에 배치된 국군 장병 상당수는 개전 이후 3일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병력을 모으기 위해 육군본부의 비전투 행정병력까지 투입됐지만 단화 차림에 소총도 없이 권총으로 출동한 병력도 부지기수였다.
창동 방어선을 무너뜨린 적이 미아리 입구에 출현한 것은 27일 오후 5시 무렵이었다.하지만 미아리 방어선에 육박하던 적은 국군 20연대 1대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자 후퇴해 버렸다.
마지막 혈전
해가 지자 돈암동과 회기동 일대에서 일제히 예광탄이 하늘로 치솟았다. 민간 복장으로 이미 서울로 침투한 북한군 편의대가 쏘아 올리는 신호탄이었다. 신호와 함께 북한군도 공격을 재개했다. 미아리 입구 산기슭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한 국군 20연대 1대대는 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방어정면에 있는 목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교량을 폭파하도록 공병에게 명령했다.
요란한 폭음이 울렸지만 구멍만 났을 뿐 교량이 무너지지 않았다. 북한군 전차 2대가 통과하고 세 번째 전차가 목교를 통과할 때 마침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20연대 1대대 장병들이 북한 전차에 사격을 집중하자 여기저기서 화염이 솟아올랐다. 40대의 전차 중에 5대만 진짜 전차였을 뿐 나머지는 트럭을 전차로 위장한 가짜 전차였던 것. 북한군은 국군 1대대의 기습적인 화력 집중과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큰 타격을 받은 듯 부상자들을 버려두고 창동 쪽으로 후퇴했다.
얼마 후 다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전차의 화력으로 국군 20연대 제1대대를 견제하면서 목교 위에 빠져 있는 전차를 옆으로 밀어제치고 5∼6대의 전차와 기마병을 포함한 수 미상의 보병부대가 대대 방어정면을 통과했다. 통과 병력이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20연대 1대대는 진지를 고수했다.
20연대 1대대의 진지를 통과한 북한군 전차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곧장 국군 제1연대 방어정면을 통과해 미아리 고개 앞 길음교 전방에서 일단 정지했다.
국군은 북한군이 진입할 때 길음교를 폭파하기 위해 사전에 폭약을 장착해 뒀으나 어찌 된 일인지 폭발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길음교를 통과한 북한군 전차를 공격하기 위해 국군의 모든 화기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20분에 걸쳐 사격했으나 단 1대의 전차도 파괴되지 않자 국군은 육탄 돌격까지 감행했다.
길음교에 매복한 국군 1연대와 15연대 소속 전차특공대가 2.36˝ 로켓포를 쏘고, 15연대 소속 김순 대위가 지휘하는 결사대가 전차에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이처럼 처절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북한 전차의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28일 오전 1시 마침내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 정상을 통과해 서울 돈암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강교 폭파
<폭파된 한강교량 중 일부의 모습.>
미아리 고개를 통해 T-34 전차가 서울 돈암동으로 진입한 직후에도 아직 미아리 일대 곳곳에는 국군이 남아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28일 새벽 1시 무렵 미아리 고개를 돌파한 것은 10대 미만의 북한 T-34 전차였을 뿐 북한군 보병이 제대로 후속하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서울 시내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피아를 구별할 수 없는 혼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공병들의 특공 공격
적 전차의 서울 진입 사실이 최초로 육본에 알려진 것은 28일 새벽 1시 30분 무렵 헌병사령부를 통해서였다. 헌병사령부는 현재의 용산에 자리 잡고 있던 국방부나 육본과 달리 남산 북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송요찬 헌병사령관이 “창경원 입구로 적 전차가 지나갔다”고 보고하자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은 경악했다. 아직 그 시간까지 미아리의 국군으로부터는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백일 참모부장은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특공 공격을 명령했다. 육군1공병단 1전투중대로 편성된 전차폭파조는 50㎏ 폭약 2개씩을 갖고 창경원 부근의 적 전차를 향해 즉각 출동했다. 공병들은 창경원 입구 등 곳곳에서 적 전차에 돌격해 전차궤도를 파괴시키는 성과를 거뒀으나 시내에 출현한 전차를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마침 미아리 방어선이 돌파되기 직전 육군본부와 수경사 병력은 서울 시내 곳곳에 전차의 이동을 방해할 바리케이드 설치를 시작한 상태였다.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을 비롯해 창경원 입구·안국동·종로 입구·광화문·남대문·삼각지, 그리고 당시 육본 입구에 해당하던 현재의 용산우체국 앞에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바리케이드는 화물차량과 버스를 동원해 도로를 가로지른 다음, 타이어의 공기를 빼고 주요 부품을 제거했다. 여기에 철조망까지 가설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바리케이드도 전차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된 대전차 장애물이 아니어서 전차 자체의 힘만으로도 밀어붙여 버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목격된 적 전차는 돈암동 전차 종점 2대, 창경원 입구 1대, 동대문 1대, 중앙청 앞 1대, 종로구 화신백화점 1대, 헌병사령부 2대 등 모두 8대였다.
전차가 이동할 수도 있으므로 실제 서울에 진입한 전차의 수는 이보다 적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서도 28일 새벽 시점에 이미 북한 전차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직접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있어 당시 서울 시내로 진입한 적 부대의 규모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육군본부의 조치
헌병사령부에 뒤이어 육본을 대표해 전선 상황을 총괄하고 있던 강문봉 대령이 육본으로 달려 왔다. 미아리 방어선이 뚫렸다는 정식 보고였다. 개전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강 대령은 28일 미아리 고개 방어선이 돌파되기 직전 돈암동의 감천여관에서 잠깐 선잠을 자고 있던 상태였다.
요란한 전차 엔진 소리에 잠을 깼을 때는 이미 적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통과해 서울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강 대령은 적 전차 대열을 겨우 피하면서 육본으로 달려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차 진입 사실을 보고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대략 28일 새벽 1시 30분과 2시 사이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보고를 받자 즉시 최창식 공병감에서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다. 그러고는 지프를 다고 한강 남쪽으로 건너갔다.
그 직후 이응준 사령관 등 미아리 전선 방어를 책임진 지휘부가 육본으로 도착했다.
이응준 사령관은 봉일천에서 아직 국군 1사단이 방어전을 진행하고 있고, 미아리 일대의 3·15·16·20·25연대 병력도 철수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강교 폭파가 명령됐다는 사실을 알자 경악했다.
이응준 사령관은 김백일 참모부장 등에게 강경하게 항의했다. “아직도 일선의 부대가 후퇴하지 않았다. 주력의 철수가 끝날 때까지 폭파를 늦추라.” 육본 측 참모진들이 생각하기에도 이 사령관의 항의는 일리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한강교 폭파를 책임진 공병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유선망은 물론이고 무선망도 제대로 유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창국 작전국장이 한강교로 직접 달려가려 했지만 엄청난 교통 체증이 문제였다. 피란민과 철수하는 국군 병사, 차량 행렬 때문에 장 국장이 탑승한 지프는 삼각지에서 전혀 이동할 수 없었다.
한강교 폭파
비슷한 시간 한강교 다리 위에서 공병들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6월 26일 저녁부터 최창식 공병감은 ‘적 전차가 서울 시내에 진입하면 2시간 이내에 폭파시켜라’라는 명령을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받은 상태였다. 개전 초반 임진강 등에서 교량 폭파 실패가 거듭돼 방어전에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한강교 폭파만은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공병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사전에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27일부터 공병감실, 1공병단, 공병학교, 수경사 공병대를 중심으로 한강교와 광진교 등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에 대한 폭파 준비를 사전에 해놓은 상태였다. 인도교 폭파에는 약 300파운드의 폭약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여유분을 감안해서 총 700파운드의 폭약을 설치했다. 나머지 복선철교 1개와 단선철교 2개에도 폭약이 설치됐다.
폭파 순간에도 한강 인도교로 진입하려는 민간인과 장병들 때문에 헌병들은 교통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인원은 통제를 벗어나 한강 인도교로 진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폭파 신호는 카빈소총으로 공포탄을 사격한 후 휴대용 전등으로 신호를 주기로 했지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누군가는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사격 소리를 듣지 못한 가운데 마침내 중위 한 명이 점화대 스위치를 눌렀다. 애당초 한강 인도교 교통 통제용으로도 공포탄이 발사되는 상황이어서 누가 카빈으로 사격 신호를 시작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부질 없는 상황이었다.
황원회 당시 공병학교 전기과 과장은 약 4피트 길이의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90초였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서 40분 사이 철교와 인도교에 설치된 총량 약 7000파운드의 폭약이 일제히 폭발했다.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도 폭발음을 들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엄청난 폭음이었다.
■ 중랑교 방어선 붕괴-공병들의 특공 공격육군본부의 조치한강교 폭파
서울 방어전 과정에서 미아리 방어선만 유명하지만 사실 한 곳에 방어선이 더 있었다. 중랑교가 바로 그곳이다. 당시 경기도 동북쪽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는 의정부-창동-미아리-돈암동 방면의 통로와 퇴계원-중랑교-청량리 방면의 통로 등 두 곳 뿐이었다.
국군 주력 5개 연대가 미아리를 방어할 동안 중랑교와 그 서쪽 고지군 일대에는 국군수도경비사령부 소속 8연대 2대대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8연대 2대대는 개전 직후 서울 노량진 일대에 배치됐다가 이동 명령을 받아 경기도 가평으로 출동을 했었다. 이후 서울 함락 가능성이 높아져 다시 서울로 복귀한 상태였다.
육본이 미아리에 3·15·16·20·25연대 등 5개 연대, 실병력으로 3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한 데 비해 중랑교에는 1개 대대급 정도의 병력만 배치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퇴계원-중랑교로 연결되는 도로는 미아리 도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멀리 우회하는 길이었다. 두번째로 27일 새벽 무렵 국군3사단 공병대가 이미 중랑교를 폭파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육본의 판단과 달리 중랑교 방어선은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뚫려 버렸다. 경춘선 철도교가 폭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8연대 2대대는 M1 57mm 대전차포 사격을 가하면서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경춘선 철도교를 통과해 서울로 진입하는 북한 병력을 막을 수가 없었다.
중랑교 돌파 시점에 대해서는 참전자들마다 증언이 엇갈리지만 28일 오전 0시 30분에서 2시 사이라는 증언이 많다. 중랑교 방어선을 돌파한 적 부대도 보병이 아닌 전차였다는 증언이 대부분이다.
북한 보병의 경우 국군 8연대의 사격 때문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전차만 통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전 종료 후 구 소련에서 공개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에서는 북한군 3사단 병력이 27일 밤 11시 이전 청량리 부근을 확보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북한 3사단 소속 보병 중 일부는 이미 이 시간에 중랑천 서쪽으로 진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관문에 해당하는 미아리와 중랑교는 거의 비슷한 시간 북한군 공격에 방어선이 뚫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