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서울 철수작전

구름위 2013. 3. 1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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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장병들이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

 

국군에 의해 파괴된 한강 인도교.


  엄청난 교통 체증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에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자 경악했다. 한강교 폭파 연기 결정을 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한강교는 폭파돼 버렸다.

 당시 한강 이북에는 수많은 국군부대가 잔류하고 있었다. 사단급 부대만 해도 1ㆍ2ㆍ5ㆍ7ㆍ수경사 등 5개 사단 규모에 병력만 4만여 명이 넘었다. 이들 부대들은 이제 주된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한강 이남으로 후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사실 한강 인도교와 철교 폭파 당시 인도교와 경인선 철교는 제대로 폭파됐으나 경부선 복선은 제대로 폭파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육군 1공병단 엄재완 소령은 “폭파에 시간 차가 생기면서 다른 철교의 폭파 충격 때문에 경부선 복선 철교 폭약에 연결된 도화선ㆍ뇌관ㆍ도폭선이 날아간 것 같다”는 증언을 남겼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경부선 복선 철교로 도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한강 이북의 제 부대에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당시 육본 작전국과 공병감실은 한강교 폭파 이후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한강 인도교 옆 백사장에 공병 단정을 준비해 뒀지만 이 사실 또한 한강 이북에서 작전하는 부대들에게는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결국 상급부대로부터 체계적인 정보와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각급 부대들은 결국 부대 단위로 탈출로를 찾아야 하는 지경이 됐다.

주력부대의 철수

 중랑교 부근을 방어하던 8연대 2대대는 한강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비교적 건재를 유지한 상태에서 광나루 부근에서 한강을 도하해 철수했다. 역시 미아리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며 고군분투했던 20연대 1대대도 부대 통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광나루를 통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미아리 고개 서쪽에 배치돼 있던 15연대 2대대도 광나루를 통해 비교적 많은 병력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침입한 상태에서 모든 국군 부대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두천 북방에서 북한 4사단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치고 동두천 역습의 선봉에도 섰던 국군 1연대는 서울 성북경찰서 부근에서부터 병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철수하게 됐다.

 3연대 3대대도 안국동 풍문여고를 거쳐 경복궁 앞 중앙청에까지는 조직적으로 이동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실상 각개 분산으로 철수했다. 25연대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렇게 철수한 부대들 중 일부는 북악산을 통해, 일부는 서울 시내를 통해 마포에 도달한 후 한강에서 운행하던 나룻배 수준의 민간 소형 선박을 이용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포천-의정부 일대에서 방어전에 참전했던 9연대 1대대와 5연대 2대대, 16연대 일부 병력과 육군사관학교 요원들은 광진교를 통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1사단의 철수 

하지만 28일 새벽 4시 무렵 국군 공병에 의해 광진교마저 폭파됨에 따라 나머지 후퇴 병력은 나룻배를 이용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포와 하중리ㆍ광나루 나루터, 한남동과 서빙고 도선장 등 소형 선박을 입수할 수 있는 곳마다 국군 병력과 민간인이 몰려들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대형 선박은 없었으므로 야포와 중ㆍ대형 차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 복장을 하고 침투한 북한 편의대 등이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철수작전을 방해해 더욱 어려움이 가중됐다.

 하지만 그 어느 부대보다 위험 상황에 내몰린 부대는 문산-봉일천 방면에서 선전 분투하고 있던 국군 1사단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은 포천-의정부-미아리-서울 축선이 무참하게 붕괴되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봉일천과 고양 일대에서 북한군 1사단을 상대로 비교적 성공적인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강교가 폭파되는 그 순간에도 국군 1사단은 단순히 방어전을 펼치는 정도가 아니라 역습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11연대와 13연대로 역습해 문산천 남안의 고지군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1사단의 계획이었다. 한강교가 폭파되고 미아리 방면 각 부대가 필사의 탈출작전을 감행할 때까지도 1사단은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27일 전선상황을 시찰하러 왔던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장군이 중서부전선이 위기 상황이라며 1사단의 철수를 이미 권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군본부의 정식 명령이 없는 한 임의로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 1사단 지휘부의 판단이었다.

 1사단은 28일 오전 8시 계획대로 대대적인 역습을 개시했다. 북한군도 강하게 맞서 전선 상황이 고착된 가운데 사단에 속속 비보가 전해졌다. 1사단 부상자들을 태우고 서울 외곽 현재의 녹번동 방면으로 진입한 아군 차량이 북한군 전차와 마주쳤다는 소식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행주에서 한강 건너편인 김포비행장에서까지 총포성이 울려오자 1사단 장병들은 더욱 긴장했다. 잘못하다간 사단 전체가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갈 염려마저 있었다. 서부전선과 중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선전했던 1사단도 결국 눈물을 머금고 전면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하 장소는 행주와 이산포 두 곳으로 결정됐다. 도하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묘안을 짜낸 것은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공병으로 근무했던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병력들을 지휘, 강변에서 목재를 모아 급조 도하장비를 만들어 냈다.

 급하게 만들어 낸 장비였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지프까지 실을 수 있는 제법 그럴듯한 뗏목 형태의 선박이었다. 이런 급조 도하장비에 힘입어 적이 추격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사단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중장비와 대규모 인원 손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18연대의 철수

 이처럼 한강 이북에 잔류한 각 부대의 철수작전은 처절했다. 그중에는 기적에 가까운 철수작전도 없지 않았다.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18연대 주력 부대의 철수작전은 특히 그랬다. 18연대 주력은 26일 아침부터 동두천 역습작전에 참가한 부대였다.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북상한 18연대는 26일 오후 포천을 거쳐 의정부로 들어온 북한군 때문에 퇴로가 차단당했다.

 18연대 장병들은 6월 27일 오전 의정부 시가 서쪽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산 위에서 목격한 것은 국군7사단 사령부 연병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차가 가득한 광경이었다. 후방에 적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18연대 장병들은 혹시 미군이 참전을 결정해 전차가 지원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7사단 사령부로 정찰을 나갔던 장교척후는 27일 오후에야 18연대 지휘부로 복귀했다. 장교척후는 “전차는 적군 것이고, 아군은 이미 서울로 철수한 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했다.

 북쪽, 남쪽, 동쪽에 모두 적이 있는 상황에서 18연대 주력이 선택한 길은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18연대는 북한산-도봉산 북쪽 기슭을 따라 고양 쪽으로 철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철수작전마저 쉽지 않았다.

 18연대가 북한산 서쪽 기슭을 통과해 구파발 인근에 도달했을 때쯤에는 이미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18연대의 철수 경로 앞으로 사이드카를 탄 북한 정찰부대가 지나가는가 하면, 북한 T-34 전차가 부대 행군로 인근을 통과하기까지 했다.

 포위상태에 빠진 18연대는 이미 식량 공급이 끊기고 육군본부 등 상급부대와 연락도 두절됐지만 의연하게 부대 건재를 유지했다. 그리고 행주에서 도하해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의연하게 철수작전을 감행했다. 18연대 주력이 행주 나루터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28일 오후 3시가 넘어선 순간이었다.

 당시 18연대 소속이었던 이병형(중장 전역) 대위가 행주 나루터에 도착한 시간은 28일 오후 5시, 한강교가 폭파된 지 이미 12시간이 훌쩍 넘어선 후였다. 북한군이 산발적인 사격으로 도하작전을 방해했지만 18연대는 기어코 한강을 도하해 김포 방면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18연대 주력 병력은 26일 정오 무렵부터 48시간 이상 사실상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두천-의정부-북한산-구파발-행주나루로 이어지는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 아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김포지구전투

 2001년 라주바예프 보고서를 검토하던 한국의 6ㆍ25 전쟁사 전문가들은 보고서의 한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 북한 6사단의 개전 초반 움직임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구소련 측 관점에서 6·25전쟁을 정리하고 있는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그 이전에 공개됐던 자료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내용이 다수 수록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북한 6사단의 개전 초반 움직임이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 것.

 당시까지 알려진 북한 6사단의 초반 움직임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 된다. ‘북한 6사단은 6월 25일 개전 당일 열차를 타고 개성역으로 병력을 진입시키는 등 팔로군 스타일의 변칙적인 작전으로 개성을 점령했다. 개성 점령 후에는 북한 1사단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문산-봉일천 지구 전투에 참가해 국군 1사단을 공격했다. 다만 14연대 등 북한 6사단 일부 병력만 아군 12연대를 추격하면서 김포반도로 진입했다.’

 이 같은 줄거리의 설명은 당시까지 군에서 출간한 공식적인 6·25 전쟁사들이 거의 대부분 수록할 정도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간주됐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0년대에 총 11권으로 출간한 ‘한국전쟁사’는 2001년 시점에서 군의 공식적 입장을 담은 대표적인 6·25 전쟁사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리즈 2권에서도 개전 초반 북한 6사단의 주력은 문산-봉일천 지구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2001년 공개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뜻밖에도 북한 6사단의 주공격 방향이 김포반도-영등포로 돼 있었다. 북한군 6사단은 6월 25일 오전 개성을 점령한 후 임진강을 넘어 문산 방면의 국군 1사단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개성에서 정남쪽으로 남하해 바로 한강 하구를 건너 김포반도로 진입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만약 북한 6사단이 이렇게 움직였다면 서부전선과 중서부전선을 포괄하는 서울 방어전의 전체 상황은 기존에 생각해 온 것과 전혀 차원이 달라진다. 우선 6·25전쟁 개전 초기 문산-봉일천 방면으로 공격해 온 북한군 전력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에 비해 약 절반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 된다.

 더 큰 논쟁거리는 이렇게 김포 쪽으로 공격 방향을 잡은 북한 6사단의 의도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6사단의 원래 작전계획은 25일 오후 늦게 하조강리에서 한강을 도하해 김포반도에 진입한 후, 26일 오전까지 통진을 중심으로 교두보를 확보하게 돼 있었다. 그 이후의 작전계획에 대해서는 날짜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서울의 국군 병력이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영등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춘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작전계획의 의미에 대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최용호 박사는 “북한이 계획대로 6사단을 김포로 먼저 도하시켜 한강 남쪽 영등포를 점령하면 한강 이북에서 공격에 나선 북한 1ㆍ3ㆍ4사단과 105전차여단은 한강에서 굳이 강습도하를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북한군이 3일 동안 한강을 도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제기됐고 말들이 많았지만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이 문제에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새롭게 밝혀진 북한 6사단의 기동로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결국 북한 1군단이 한강선 일대에서 국군 주력부대를 완전 포위 섬멸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1ㆍ3ㆍ4사단과 105전차여단으로 서울 북쪽에서 압력을 가해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그 후방인 영등포를 북한 6사단이 점령한다면 한강 이북에서 작전하던 국군 주력부대는 포위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이전까지 한국의 전사연구가들은 춘천에서 공격한 북한 2군단 전력 중 일부가 이천이나 수원선으로 진입,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을 가능성 정도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북한 2군단 병력이 참가하는 좀 더 큰 포위망과 함께 그 안쪽에 북한 1군단 자체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줬다. 북한은 2중 포위로 국군을 섬멸할 계산이었던 것.

 국군 6사단이 개전 초반 춘천 방어전을 통해 북한 2군단이 춘천을 점령한 후 수도권 외곽으로 진입해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던 작전계획을 좌절시킨 공적은 높게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북한 6사단을 키플레이어로 삼은 북한 1군단의 포위망을 국군이 분쇄시킨 과정은 그동안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최 박사는 “라주바예프 보고서 공개에 따라 그동안 한강지연전의 일부로 대수롭지 않게 간주했던 김포지구 전투의 경과에 대해 새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만약 북한 6사단 주력부대가 계획대로 도하를 완료해서 공격했다면 늦어도 26일 오후 늦게는 영등포를 점령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군 1군단 주력이 서울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상황에서 한강 남쪽의 영등포마저 개전 초반에 북한군에 점령됐다면 6ㆍ25 전쟁의 큰 흐름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김포지구 전투의 의미가 있다. 



■ 전투 경과-북한군 오른쪽 날개 꺾어

개전 초반 국군이 전혀 배치돼 있지 않던 김포반도의 방어전은 도대체 어떤 경과로 진행됐을까. 김포지구 방어전은 개성지구를 방어하던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 병력의 일부가 25일 오후 늦게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을 뒤따라 북한군 6사단의 2개 대대가 한강 하구 도하를 완료한 시점은 6월 26일 오전 6시30분쯤이었다. 26일 김포반도 북쪽 일대는 아군과 북한군이 뒤섞인 상태였던 것.

 당시까지 육군본부는 북한군 병력 일부 도하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북한이 도하를 시도할 움직임이 있다고 판단,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하게 편성했다. 사령부는 만들었으나 병력이 없어 예하부대는 국군 12연대 2대대 일부 병력과 기갑연대 1장갑수색대대 병력 일부, 보병학교 일부 후보생으로 충원했다. 여기에 귀순 장병으로 구성된 보국대대 174명까지 투입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육본은 급한 대로 병력을 충원해서 김포로 보냈으나 정규 보병연대 1개도 김포반도에 투입시키지는 않았다. 김포반도 상황에 대해 걱정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위험한 지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투입된 부대의 리스트는 길었으나 실제 병력은 약 3개 대대급이었다.

 26일 오후부터 북한군은 주력부대의 도하를 위한 사전 정찰에 나섰다. 북한군 일부 병력은 소형 선박으로 도하를 시도하기도 했다. 조강리 등에 배치된 국군 1장갑수색대대는 M8 장갑차의 37㎜ 포 사격으로 선박을 격침하면서 북한군 주력의 도하 준비를 지연시켰다.

 하지만 북한군은 26일 새벽에 도하한 병력과 26일 야간에 도하한 병력으로 꾸준하게 공격을 시도, 27일 오전까지 13연대와 15연대를 주축으로 한 6사단 주력 도하를 완료했다. 2개 연대 도하 완료로 김포반도에서 북한군 총병력 규모가 한국군 방어병력 규모를 앞서게 됐다. 27일 오후 운유산에 배치돼 있던 보병학교 병력의 방어진지가 붕괴되면서 위기에 빠졌으나 1장갑수색대대의 맹렬한 반격으로 방어선의 완전 붕괴는 피할 수 있었다.

 28일 T-34 전차를 보유한 북한군 전차중대가 마침내 도하하면서 김포반도의 전세는 급격하게 북한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북한 6사단은 김포읍과 김포비행장을 차례로 점령하는 등 석권 태세를 갖췄다. 28일은 바로 한강교가 폭파된 그날이었다. 북한군 6사단이 이 기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면 한강지연전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끝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됐다. 하지만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열렸다. 28일 오후부터 29일 새벽까지 15연대와 18연대 병력들이 행주 등 한강 북쪽에서 김포반도쪽으로 도하해 왔던 것. 이들은 퇴로를 찾아 김포반도로 철수작전을 감행한 것이지만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입장에선 너무나도 소중한 증원병력이었다.

 이렇게 추가 확보된 병력과 함께 29일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에 나서는 등 격렬하게 방어전에 임했다. 김포지구전투사의 역습 작전은 결국 실패, 참모장이 전사하고 사령관 대리가 자결하는 비극이 연출됐으나 그들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역습 실패에도 불구하고 김포지구전투사는 북한군 6사단이 영등포를 점령하는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김포지구전투사는 김포반도를 상실한 이후에도 오류ㆍ소사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후퇴하면서 한강 지연전의 최후 순간인 7월 3일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화려한 승리는 없고, 뚜렷한 영웅도 없었지만 김포지구 방어전은 국군 장병들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싸웠던 결과, 북한군이 계획했던 2중 포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2중 포위를 위한 북한군 공격부대의 왼쪽 날개를 국군 6사단이 꺾어버렸다면 북한군 오른쪽 날개를 꺾은 것은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장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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