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최후의 선택 낙동강

구름위 2013. 3. 1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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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말이 되었을 때 제8군사령관 워커는 최후의 보루인 부산을 반드시 지켜내려면 북한군의 우회 돌파가 허용되지 않도록 방어선을 단단히 구축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때문에 아군 부대들을 좀 더 촘촘히 연결하여 틈을 없애야 했는데 그때까지 한국군 및 유엔군의 전력은 절대 열세여서 물리적으로 즉시 간격을 메우기는 힘들었습니다. 따라서 워커는 전선을 좀 더 축소하여 부대 간 거리를 단축함과 동시에 절약된 병력으로 예비대를 구성하여 결사항전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러한 교두보로 낙동강을 선정하였습니다.


[대구에 설치 된 제8군사령부에서 작전을 숙의 중인 워커]


  이러한 사령관의 의지에 따라 시급히 설정 된 낙동강 방어선으로 8월 1일부로 철수하도록 모든 부대들에게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적에게 내어주고 그동안 7만 여명의 병력이 손실되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그 결과 아군은 증원 부대의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얻었고 적에게 계속적으로 소모를 강요하여 약화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더불어 개전 후 얼마 되지 않아 확보한 제해권과 제공권은 북한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로써 지난 7월 한 달 동안 중과부적의 상태로 많은 피해를 동반하며 지속하여 왔던 지연작전이 종식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쟁 개시이후 처음으로 좌우가 연결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설정 된 낙동강 방어선은 동에서 서로 영덕-청송-의성-낙동리까지 80킬로미터를 이어지다 여기서 꺾여 북에서 남으로 낙동리-왜관-남지-마산까지 160킬로에 이르는 총 연장 길이 240킬로미터의 교두보였습니다. 방어선의 상당 부분이 강폭 400~800미터, 수심 1~2미터의 낙동강에 연하여있어 방어가 용이했지만 모든 구간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부의 낙동리-영덕간의 80킬로미터와 서남부의 남지-마산 간의 80킬로미터 구간은 험준한 산악 능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북한군의 침투가 용이한 편이었고 이후 대부분의 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낙동강가에서 적진을 경계하는 미군]


  처음에 낙동강 선의 책임 지역은 서부의 마산-남지-왜관까지의 약 120킬로미터를 미군 3개 사단이, 북부의 왜관-낙동리-의성-청송-영덕까지 약 120킬로미터를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하기로 하였으나 미군에 비해 화력과 전투력이 미약한 국군의 방어선이 너무 크다고 판단되어 8월 11일부로 국군의 관할 지역을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연하는 선으로 조정하였고 그 결과 방어선의 전체 길이도 200킬로미터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구축과 동시에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에 대비해 부산 주변을 마지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예비방어선 구축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제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Garrison H. Davidson) 준장의 주도로 마산-밀양-울산을 잇는 90킬로미터의 예비진지를 구축하여 이를 ‘데이비드슨 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산항 확보에 주안을 둔 방어선으로 만일 유엔군이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한다는 것은 부산을 통해 해상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여서 반격을 염두에 두고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과 개념이 달랐습니다.


[대한민국을 구한 최후의 교두보, 낙동강 방어선]


  다시 말해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교두보였습니다. 낙동강 교두보는 이처럼 피와 공간을 받쳐가면서 얻은 천금 같은 시간으로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보루 삼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이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어야 했고 반드시 사수하여 적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8월 1일을 기점으로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자 북한군은 ‘신속히 추격하여 낙동강을 돌파한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아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인 부산을 안전하게 확보하기위한 마지막 보루였지만, 반면 이곳을 돌파 당하면 북한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낙동강을 넘어 부산으로 진격하여야 했고 필연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물러설 수 없는 혈전은 예고되었습니다.


[부산은 대한민국의 유일 생명선이었습니다.]


  폭염의 8월과 더불어 낙동강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어가기 시작하였을 때 다행히도 양측의 전력은 서서히 균형을 맞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반하여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진출하면서 5만 6천여 명의 병력 손실과 함께 초전승리의 원동력이었던 전차의 80퍼센트 이상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일선 부대의 전투력은 이미 최초 편제의 50~60퍼센트 수준으로 격감했습니다.


  전후 파악된 여러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개시하였지만 막상 구체적인 후속계획이 미흡하여 전선이 남으로 내려갈수록 전력보충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데, 사실 북한군의 전력이 이처럼 고갈된 데는 아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었습니다. 개전 후 7월말까지 아군은 전사에 일방적으로 패배와 후퇴의 기록만 남긴 것 같지만 그러한 반대급부로 북한군의 급격한 소모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조기에 확보한 제공권은 북한군이 주간에 마음 놓고 작전을 펼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군의 포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북한군의 Su-76 자주포]


  따라서 단지 겉으로 북한군은 7월말까지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점령하는 엄청난 전과를 보였지만 당장 낙동강을 넘어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하여 격파할 여력이 없을 만큼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만약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초전 3일간처럼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능히 한반도 전역을 조기에 휩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였고 다만 그동안의 공세를 발판삼아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보급선이 38선으로부터 300여 킬로미터나 늘어났지만 운송수단이 열악한데다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하여 기본적인 보충조차 이루어지지 못할 만큼 최전선의 북한군은 애를 먹었습니다. 북한은 36만의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1인당 20킬로의 보급품을 심야에 하루 20~30킬로미터 씩 릴레이식으로 보내는 고육책으로 하루 평균 400톤 정도의 보급품을 전선에 공급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여건은 유엔군과의 전력균형이 변화하는 요인이 되었고 당연히 전투력의 저하를 불러왔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균형이 무너질 것임을 북한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서 의용군을 강제 징집하였을 만큼 북한군의 능력은 반감되었습니다]


  개전 초에 북한은 조공으로 정면을 견제하면서 주공을 아군의 간격사이로 진출시켜 후방을 차단하는 전술을 사용했지만, 낙동강에 촘촘히 방어선이 구축되자 더 이상 이런 전술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제는 피해를 무릅쓰고 정면으로 공격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북한군은 영천 및 포항 방향 그리고 창녕 및 마산 등 다양한 여러 곳을 선전하여 전선의 일각을 돌파한 후, 돌파된 지역으로 예비대를 신속 투입하여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습니다.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방어선을 구축하자마자 뒤쫓아 내려온 북한군이 8월 5일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면서 2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은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은 국군이 담당한 왜관-영덕 구간은 물론 유엔군이 담당한 마산-왜관 구간의 요충지 곳곳으로 돌파를 시도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한 국군 및 유엔군은 이를 반복하여 격파하였고 낙동강은 서서히 피로 물들어 갔습니다.


[8월의 시작과 함께 낙동강이 피로 물들어 갔습니다]


  미군 3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서남부 방어선은 강을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적의 공세를 막는데 좋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미군은 비록 참전초기에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제2차 대전의 다양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노련한 군대였습니다. 새롭게 징집된 말단 신병들은 전쟁 경험이 전무 하였을지 몰라도 이들을 지휘하는 간부들 대부분은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자 시행착오를 극복한 미군은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적을 서서히 격퇴하여 나갔습니다.


  8월 5일 자정, 북한군 제4사단이 야음을 틈타 낙동강을 은밀히 도하하여 미 제24사단이 배치된 영산을 장악하면서 밀양에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제8군사령부는 재빨리 보유한 예비대를 투입하여 북한군을 겨우 격퇴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었습니다. 8월 9일 밤, 북한군 제3사단이 왜관-현풍사이로 낙동강을 넘어 공격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미 제1기병 사단이 이를 간신히 격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위기는 미 제25사단과 북한군 제6사단이 진주-사천 일대에서 벌인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습니다.



 

[마산 공략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는 북한군 포스터]


  놀라운 기동을 선보이며 유엔군 수뇌부를 경악시킨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31일 마산의 서쪽 초입인 진주를 함락시키자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8월 3일, 미 제25사단이 상주로부터 마산으로 급거 이동 전개함으로써 위기가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북한군 제6사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끓임 없이 마산 정면으로 공세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북한군 주공이 대구 북방으로 집결되는 것이 파악되자 제8군사령부는 마산 앞에 있던 방어선을 진주-사천을 연하는 선까지 밀어붙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부산교두보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대구 정면에 집중된 북한군 예비대를 마산으로 유인시켜 대구 정면의 압력을 분산시키려는 일석이조의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제8군사령부는 24,000여명의 101대의 전차로 증강된 미 제25사단으로 반격을 담당할 특수 임무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사단장의 이름을 따서 ‘킨 특수 임무부대(Kean TF)’로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최초의 미군 역공격이 8월 7일 06시 3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의 최초 역공은 참담한 실패를 거두었으나 그 대가로 마산을 지켜냅니다.]


  그런데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7,500명 정도이며 전차는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산악 능선의 주요 지점을 선점하고 있어서 위치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더불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계속되자 미군은 전투 손실의 6배에 이를 정도까지 일사병 환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선두 부대가 장천리-진주고개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했으나 매복해 있는 북한군들은 배후를 차단하면서 오히려 후방인 봉암리에 위치하고 있던 미군 지원포병 3개 대대가 북한군의 습격을 받아 참패하는 대 참사를 입었습니다.


  결국 지형의 이점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퍼붓는 북한군과 살인적인 무더위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입은 미군의 공격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제8군사령부는 12일 저녁에 작전 중지를 명령하면서 최초로 실시한 공격 작전은 종결되었습니다. 비록 적정 판단잘못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예기치 못한 큰 손실을 입고 말았으나 그 피의 대가로 마산을 지켜내었습니다. 이로서 부산 서측방 위협이 감소되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낙동강 방어선이 처음 구축되었을 때 왜관-영덕간은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7개 사단이나 되는 북한군의 8월공세가 시작되자마자 곳곳이 돌파되는 위기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국군의 담당지역은 지형상으로 낙동강과 같은 천연장애물도 없어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조건이었는데 그 만큼 여러 군데서 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 국군 수도사단과 제17연대가 담당하였던 전선중앙부의 안강-기계에서의 격전도 전사에 길이 전해질 격전이었습니다.


[전선 중앙부에서 거대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8월 5일, 청송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으로 의성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약 50킬로미터 전선에 간격이 발생하였지만 육군본부 및 제8군에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청송에서 기계에 이르는 유일 통로인 31번 국도가 워낙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소로라서 북한군 대부대가 기동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간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은 무주공산인 산악 지역을 기습 통과 하여 8월 8일에 기계 북방 20킬로미터 지점인 죽장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국군은 이러한 급박한 사태에 놀랐으나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10일, 기계까지 신속히 남하하였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계속하여 안강-경주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낙동강 방어선의 중앙은 완전히 절단되어 대구와 포항의 후방이 차단될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이었습니다. 위기를 실감한 육군본부에서는 8월 10일부로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방어에 나서도록 조치하였지만 문제는 가용병력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후방에서 편성 중에 있던 제25연대를 궁여지책으로 투입시켰는데,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악수를 두었습니다. 개전초에 의정부 방어전에서의 실수가 재현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북한의 공세는 예상을 넘어서는 강력한 수준이었습니다.]


  정일권 참모총장과 김홍일 제1군단장은 고심 끝에 제17연대와 의성에 있던 수도사단에게 현 전선에서 후퇴하여 안강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의성일대를 포기하면서 전선을 안쪽으로 좀 더 축소하는 대신 제17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로 하여금 안강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차단하고, 수도사단 제18연대가 기계에서 후방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안강-기계 일대에 포진한 북한군 제12사단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대담한 결심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북한군의 경주 또는 포항 진출보다 아군의 안강 도착이 빨라야 실현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전선에서 미묘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유엔 해‧공군의 쉴 틈 없는 후방공격으로 인하여 8월 10일, 기계까지 진출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이 보급이 지연되면서 진격에 탄력을 잃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틈을 타서 8월 12일, 제17연대가 안강에 도착하여 안강-포항간의 도로를 차단했고 다음날 수도사단 제1연대와 제26연대도 안강에 도착하여 북한군의 경주 진출을 막았습니다. 더불어 수도사단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가 기계 북쪽에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순식간 북한군 제12사단을 역포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안강-기계 전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


  이제 위기는 호기로 역전되었고 8월 18일, 기계 일대에서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북한군 제12사단은 후방이 차단되자 전투 의욕을 상실하면서 일거에 괴멸되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돌파로 전선 중앙이 붕괴될 위기는 아군의 대승으로 역전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적 1,24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습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개전 초에 있었던 홍천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에게 부대해체와 다름없는 참담한 대패를 당하였던 바로 그 부대였는데 안강-기계전투에서 또다시 치욕을 맛보았습니다.

38선을 돌파하여 동해축선을 따라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은 서쪽에서 청송-기계 축선으로 남진하던 제12사단과 보조를 맞춰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영덕을 방어하던 국군 제3사단 제22, 23연대는 치열한 접전을 반복했지만, 제23연대의 일부 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순식간 전투력이 저하된 제3사단은 8월 10일, 강구의 남쪽 장사동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재편하게 되었습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동해축선의 교량을 파괴하는 모습 ( 울진 남대천 )]


  동시에 강구 남서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기계가 북한군 제 12사단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포항이 차단될 위기에 봉착하였고 이어서 다음날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마침내 포항 시내까지 진입하였습니다. 포항은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엔 해․공군의 발진 기지였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타격할 검점이었습니다. 때문에 북한군은 제 12사단, 제 5사단, 제766유격 연대 등을 모든 전력을 집중하였고 그 결과 8월 11일에 선도부대가 포항시내 진입에 성공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비행장과 항구를 통하여 외부와 연결되고 있는 낙동강 교두보 동북 측의 포항은 아군이 어떻게든 사수하여야 하는 전략 거점이었습니다. 포항항과 영일비행장의 중요성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제 8군사령관 워커는 위기 상황을 보고받자마자 미 제19연대 3대대를 증강시킨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Bradley TF)를 조직하여 즉시 포항에서 영일비행장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위기에 빠진 포항시내의 모습]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북한군 제 5사단 일부가 7번 국도를 우회하여 홍해까지 순식간 진출함으로써 배후가 차단된 국군 제 3사단이 장사동 일대에서 궤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제해권을 가진 유엔 해군의 지원으로 고립된 아군은 8월 17일 06시부터 해상철수를 단행하여 성공적으로 포항 남쪽의 구룡포로 이동함으로써 비록 장사동을 적에게 내주었으나 전력을 보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포항 탈환 임무를 부여받고 민부대(閔部隊)가 급거 출동하여 형산강 남쪽을 장악하였습니다.


  민부대는 개전 초에 의정부 축선에서 붕괴된 제7사단 재창설을 목적으로 민기식 대령 지휘 하에 기간요원으로 구성된 2개 대대규모의 임시부대였지만 포항의 위급한 상황이 민부대의 출동을 촉진시켰던 것이었습니다. 민부대는 포항 시내에 진주한 북한군이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포항 외곽으로 도주하였음을 확인하고, 8월 18일 새벽 포항 시내로 진입하여 포로 180명을 잡는 전과를 올리며 포항을 탈환하였습니다. 최초 출동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린 민부대는 다음날 구룡포에서 북상한 국군 제 3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한 후 대구로 복귀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민부대를 지휘한 민기식]


  포항에 매몰되어 앞으로만 달려온 북한군은 계속되는 작전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고 유엔 해‧공군의 집중적인 포격과 폭격으로 보급이 차단되어 전투력이 급감했습니다. 더구나 포항 공약에 동원된 3개 부대가 제대로 된 협조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달려들어 왔던데 반하여 가용 전투력이 극히 부족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로 북한군을 격퇴하고 포항의 요충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북한군은 상당 기간 동안 부대 정비에 임하게 되면서 이후 9월까지 동해안 지역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7월말만 해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목표는 달성 가능해보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고 적극 항전하면서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 변화를 인식한 북한군도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대구를 8월 15일까지 점령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산과 포항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북한군은 애를 썼으나 그중에서도 최우선의 목표는 대구였습니다.


[낙동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모습]


  8월 초, 대구를 압박하던 북한군은 총 5개 사단이었는데, 그중 북한군 제1, 13, 15사단이 8월 5일부터 대구 북방의 왜관-낙동리를 압박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기습하여오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며 전선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의 우익이 북한군의 강한 압박에 밀려나자 육군본부는 8월 11일부로 국군의 방어지역을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연하는 선으로 축소조정 하였고 따라서 국군 제1사단도 8월 13일 후방인 다부동 일대로 물러나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다부동에 국군 제1사단이 도착 했을 때 북한군은 이미 인근 요충지인 328고지와 유학산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북한군이 이곳을 돌파하여 대구로 내려 올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장 국군 제1사단을 가까이서 도울 수 없었던 제8군은 북한군 예상 집결지를 타격하기 위하여  8월 16일 정오에 98기의 B-29를 출격시켜 융단폭격을 퍼부었을 만큼 다급하였습니다. 이런 대대적인 폭격으로도 적의 진공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의 진공이 공습으로 잠시 주춤하는 순간 제8군의 예비인 미 제25사단 27연대가 다부동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부동의 사수는 국군 제1사단이 용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융단폭격에 나선 B-29비행대]


  18일 새벽,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자 국군 제1사단은 이런 절체절명의 난관을 타개하고자 배속 받은 미 제27연대와 함께 적진 돌파를 감행하였는데, 이것은 한‧미간에 이뤄진 최초의 협동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도 기갑부대를 증강하여 야간공격을 개시하였고 결국 다부동 일대에서 물러설 수 없는 거대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제8군사령부도 3개 사단을 집중한 북한군에 대응하고자 미 제2사단 23연대와 국군 제8사단 10연대를 추가 투입했을 만큼 전력을 다하였고 다부동은 서서히 전쟁의 분수령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같이 총력지원에 힘입어 아군은 적의 돌파구를 틀어막으며 방어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국군 제1사단이 매일 평균 600~700명의 피를 바쳐가며 얻은 전과였습니다. 이런 분투 결과 8월 21일을 기점으로 국군 제1사단 지역의 상황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고 초조해진 북한군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이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그날 밤 대규모 야간 역습을 감행해왔지만 미 제27연대가 전차로 맞대응하며 이를 방어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이 되었을 때 북한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피격 된 북한군 T-34전차]


  8월 공세 기간 중 북한군은 3만 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을 만큼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국군과 유엔군도 1만 여명의 전사자가 나왔을 만큼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은 그야말로 치열하였습니다. 그중 다부동 전투는 피아가 뿌린 엄청난 피로 얼룩진 격전중의 격전이었습니다. 폭염 속에서 다부동 일대는 시체 썩는 냄새로 진동하였는데, 북한군이 물러간 후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전선을 인계받은 미 제1기병사단이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틸 정도였습니다.


  8월의 최대 위기였던 다부동 공방전은 이와 같이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며 대구, 더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 전체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미 제27연대를 예하 부대로 지원받아 협동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보여준 국군 제1사단의 용전은 그동안 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극히 불신하였던 미군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이는 국군의 위상 제고와 함께, 차후 작전에서 한‧미군의 협동 및 연합 작전에 기여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폭염 속에 계속된 북한군의 8월공세가 아군의 선방으로 실패하였지만 그렇다고 북한군이 부산 함락에 대한 희망까지 완전히 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8월 공세가 서서히 둔화될 시점부터 오히려 북한군은 기존의 제8, 13사단 외에도 제7, 9, 10사단 등 3개 사단을 추가로 전선에 투입했는데 이것은 당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이었을 만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9월공세에 쏟아 부었습니다.



 

[9월이 되자 북한군의 새로운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북한군은 8월 31일 마산-창녕일대의 서남부에서부터 공세를 재개하여 9월 2일에는 왜관-포항에 이르는 동북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시작하였는데, 서남부 지역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유엔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리게 하여 제9군 예비대의 이동을 촉진시킨 후, 동북부 지역으로 돌파구를 열려고 하던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였습니다. 비록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전력균형은 서서히 국군과 유엔군의 우세로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전선의 주도권은 북한군이 잡고 있어서 9월공세의 초전 분위기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세 첫날, 마산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6, 7사단은 미 제25사단을 함안까지 밀어붙였고, 영산 및 창녕 일대를 공격한 북한군 제2, 4, 9사단은 미 제2사단이 담당한 방어선의 가운데를 돌파하여 미 제2사단을 창녕과 영산 지역으로 양분시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제8군사령부는 예비대를 영산에 투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군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아군 예비대가 서남부로 움직이자 9월 2일부터 북한군 제2군단이 왜관-다부동 지역과 신령-영천지역, 안강-포항 지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산지역에서 노획된 북한군 장비]


  이러한 북한군의 9월 공세는 과연 미 제8군이 부산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게 만들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그 기세 또한 격렬하여 지난 8월 내내 시체로 산을 쌓았던 다부동, 영천은 또 다시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1사단을 대신하여 다부동에 투입된 미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자마자 불과 3일 만에 다부동을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킬로미터 후방으로 철수하고 말았고 9월 5일이 되었을 때 아군의 엄청난 손실에 놀란 제8군사령부는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를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회심의 반전 카드인 인천상륙작전을 위해서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했고 누구의 인내심이 더 큰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9월 12일 북한군의 공세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 10킬로미터 전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돈좌시켰습니다.


  다부동 돌파와 더불어 북한군 제8, 12, 15사단이 신령, 안강, 영천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면서 이곳의 위기도 함께 고조되어 갔습니다. 특히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열려진 간격으로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하여 영천을 점령하면서 중․동부 전선이 순식간 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은 제1,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 씩 차출하여 영천에 투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북한군 제15사단은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는데 이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북한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였고 대한민국은 살아났습니다.]


  제15사단을 측면에서 지원할 북한군 제8사단이 아군에게 격퇴당하며 움직이지 못하자 어느새 홀로 떨어진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9월 8일 국군은 영천을 탈환함과 동시에 9월 10일, 북한군 제15사단을 완전 포위섬멸하면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막아내었는데 이로써 북한군 제15사단은 동락리 전투, 화령장 전투에 이어 영천 전투로 세 번째의 참패를 당하는 치욕을 맛보았습니다. 결국 여름의 마지막에 시작된 북한군의 9월 공세는 영천 전투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막을 내렸고 대한민국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로 8월의 시작과 함께 개시된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결국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치열했던 공방전에서 아군이 승리하였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군의 전력 증강은 유엔 해,공군의 후방 차단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유엔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계속 힘을 보태왔고 8월이 끝났을 때 어느덧 전력차이는 역전된 상태였습니다.


[9월이 되었을 때 피아간의 전력은 역전된 상태였습니다]


  개전 초에 병력만으로도 아군에 비해 2배나 많았던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왔지만, 9월이 시작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17만여 명까지 증강되었던 반면 북한군은 10만여 명 선으로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특히 개전 초에 국군을 공황상태로까지 몰아넣었던 전차 전력은 어느덧 5 : 1 수준까지 역전되어 있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은 비교불가의 상태였습니다. 이와 같이 위기의 8월을 넘기고 나서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력은 북한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9월초부터 약 열흘간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북한군은 남침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9월 중순까지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면서 영산, 대구, 영천, 포항 지역에서 공세를 지속하여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역전된 전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펼치기는커녕 방어선을 틀어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병력의 숫자보다 전장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누가 행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주도권을 한번 내주어주면 이를 빼앗아오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공세를 가하던 북한도 그들의 전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너지고 녹아내린 전력을 보충하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쓸어 모아 낙동강을 넘기 위해 애썼습니다. 북한군은 전선의 한곳만 제대로 돌파하면 부산으로 쇄도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착각을 하게 된 데는 김일성 등 북한의 전쟁 지도부가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너무 빠져있어 ‘조금만 더’하면 낙동강 교두보를 점령할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북한 수뇌부와 달리

마오쩌뚱은 낙동강 전선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하였습니다]


  8월말 북한의 이상조(李尙朝) 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의 군사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희망적인 전황을 보고하였을 만큼 낙동강 돌파를 낙관하고 있었으나, 마오쩌둥의 견해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무서울 만큼 정확한 조언을 남겼습니다.


  첫째, 북한군이 낙동강 선에서 한 달이나 공세를 지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엔군이 계속 증원되고 있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둘째, 유엔군의 반격은 상륙작전 형식이 될 것이며 상륙 지역은 인천 또는 남포가 될 것이다.


  셋째, 이 시점에서 북한군은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축차적인 저지 진지를 준비하고, 유엔군의 인천 또는 남포상륙에 대비하여 후방 예비대를 보유해야 한다.


[그러나 조국을 지켜낸 힘은 바로 무명용사들의 피였습니다]


  결국 승리가 바로 앞에 다가온 같은 신기루에만 매달린 북한군의 수뇌부는 마오쩌둥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경인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예비대까지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판단은 침략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엄밀히 말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불퇴의 각오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며 피를 흘린 국군과 적절한 시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유엔군의 노고 때문입니다.